김희곤 관장이 인터뷰 뒤 특별전 전시물인 백범 김구 ‘적소성대’ 휘호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김희곤 관장이 인터뷰 뒤 특별전 전시물인 백범 김구 ‘적소성대’ 휘호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꿈갓흔 옛날 피압흔 니야기’(꿈같은 옛날 뼈아픈 이야기).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관장 김희곤, 이하 기념관)이 지난달부터 8월18일까지 여는 특별전 이름이다. ‘회고록으로 본 임시정부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린 이 전시에는 50여 명의 임시정부 사람들이 쓴 회고록 70여 점이 전시된다. 전시 제목은 상하이에서 남편 김예진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펼친 한도신 선생이 1979년에 낸 회고록 제목에서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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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분노, 즐거움, 고달픔과 슬픔, 희망’ 4개 감정으로 나눠 구성된 이번 전시에는 양우조·최선화 부부독립운동가의 친필 육아일기인 ‘제시의 일기’, 한국광복군 대원으로 활동했던 김우전의 친필 수첩인 ‘김우전 수첩’ 원본이 최초로 전시된다. 국가등록문화재 ‘도산 안창호 일기’와 ‘지청천 친필 일기’도 볼 수 있다.

재작년 4월 초대관장으로 취임해 임기를 약 11개월 앞둔 김 관장을 지난 3일 서울 독립문역 근처 기념관에서 만났다. 임시정부 연구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은 김 관장은 2007년 출범한 안동독립운동기념관 관장을 7년 지냈고 이 기념관을 2배 반으로 키워 문을 연 경북독립운동기념관 관장도 6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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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사람 중에서도 주역에 가려 덜 알려진 인물의 이야기를 끄집어내 그들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얼마나 힘겨운 삶을 살았는지 보여주려고 했죠.” 전시 취지를 이렇게 밝힌 김 관장은 양우조·최선화 부부가 1938년부터 8년간 기록한 ‘제시의 일기’를 소개했다.

‘제시의 일기’.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제공
‘제시의 일기’.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제공
‘김우전 수첩’.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제공
‘김우전 수첩’.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제공

“양우조 선생은 미 보스턴의 한 대학에서 방직공학을 전공한 뒤 서울을 거쳐 중국 난징으로 가, 서울에서 만났던 최선화 선생과 결혼합니다. 부부는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하기 바로 앞서 임시정부와 함께 창사, 광저우, 충칭으로 탈출하는데요. 첫딸 제시가 창사, 둘째딸 제니(양제경)가 충칭에서 태어납니다. 제시 출생 뒤 부부가 번갈아 쓴 ‘육아일기’를 보면 제시를 끌어안고 힘겹게 일본군 폭격을 피하는 모습이나 딸을 데리고 류저우에서 굉장히 험한 길을 넘어 치장을 거쳐 충칭으로 탈출하는 과정이 생생해요.” 그는 양제경 선생이 이번 전시를 위해 대여해준 친필 일기를 각주까지 달아 내달 책으로 낼 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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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관장은 “이번 전시는 1920년대 중반에 태어나 회고록을 남길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학병 출신 광복군 기록이 상대적으로 많다”고 전한 뒤 “일본에서 도쿄미술학교를 다니다 학병으로 끌려간 최덕휴 선생이 광복군 시절 그린 그림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1940년대 중국 사람들의 일상이나 일본군 포로 모습을 많이 남기셨죠.”

기념관은 개관 이후 자료 수집과 정리에도 나서 지난해 ‘영국국립문서보관소 보관 임시정부 자료집’(전 6권)과 ‘조소앙 소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전 2권), 일본 외무성 문서에서 임정 자료만 뽑아 묶은 자료집(전 6권)을 각각 펴냈다. 김 관장은 2005년 임정자료집편찬위원장을 맡아 임정 자료집 51권(2012)을 완간하기도 했다.

“영국국립문서보관소를 직접 찾아 2차 대전 때 영국군 인도·미얀마 전구 문서에 나타난 임정과 광복군 자료를 발굴해 묶었죠. 당시 영국군이 광복군을 활용하려고 했다는 사실이나 임정의 열강에 대한 외교 노력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료들입니다.” 사료에서 확인된 구체적인 내용을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영국군이 처음엔 민족혁명당 계열인 김원봉 쪽에 합작을 요청했으나 중국 국민당 쪽에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며 임시정부 쪽과 연결시켜준 내용이나, 재중 영국 대사관 쪽에서 임정의 승인 요청을 받고 미국 대사관에 ‘함께 무시하자’고 통보한 내용 등이 나오더군요. 열강이 임정의 계속된 승인 요청을 무시하는 상황이 적나라하게 나옵니다.”

양우조·최선화 부부육아일기 등
임정 사람들 50명 회고록 보여주는
‘꿈갓흔 옛날 피압흔 니야기’ 특별전
“방문자 매해 30% 늘어 올 20만 예상”
영국 쪽 임정자료 발굴해 6권 묶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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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법통 확립에 이승만 크게 기여
임정 처음 쓴 ‘대한민국 연호’ 고집도”

그는 “기념관 방문자 수가 해마다 30% 가량 늘어, 올해는 20만 명 정도 예상된다”고 밝힌 뒤, 지난 2년 기념관이 무게를 둔 사업 중 하나는 교사나 학생의 교육활동이라고 했다. “지난해까지 초·중생 약 1만 명에게 눈높이 맞춤형으로 온·오프 교육을 했고 올해는 1만5천명이 교육을 받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역사교사 대상 교원 직무 연수도 그간 두 차례 진행해 높은 평가를 받았고 일반 교사 자율연수도 올해 7~8차례 할 예정입니다.”

그는 기념관 홈페이지 인사말에서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에서 시작되었음을 강조했다. 기념관 상설전시관 출구에도 ‘대한민국 여기서 시작하다’ 문구가 걸려 있다. “대한민국 국호와 연호가 1919년 4월11일 공포된 임시정부 헌법(대한민국 임시헌장)에서 결정되었어요. 임정 문서를 보면 국호나 연호가 다 대한민국으로 나옵니다.”

그는 임정의 법통을 확립하는 데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뜻이 크게 작용했다고 말했다. “제헌 국회 때 헌법 기초위원 유진오 박사는 헌법에 전문을 굳이 넣을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이승만 제헌국회의장은 ‘기미년 3·1운동으로 궐기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세계에 선포한’이라는 내용을 담은 전문이 꼭 필요하다고 고집했어요. 이 대통령은 또 미군정 때 다시 쓰기 시작한 단기 연호 대신에 ‘관보 1호’에 ‘대한민국 30년’이라고 표기했지요. 그런데 국회가 단기 연호를 의결해버리니까 대국민담화문까지 내어 ‘30년 전에 민국정부를 수립하여 선포한’ 좋은 역사를 놔두고 왜 상고사에서 연원을 찾느냐고 반발했죠.”

중2 때 ‘백범일지’를 보고 “어려운 여건에도 쓰임새 있는 삶을 살았던 백범 김구의 삶에 큰 감동을 받고 사학과로 진학했다”는 김 관장은 1988년 안동대 교수가 된 뒤 안동을 비롯해 대구·경북 지역 독립운동 연구에 힘을 쏟아왔다. 6·10만세운동을 이끈 안동 출신 권오설(1897~1930) 자료집을 내고 퇴계 학맥 경북 유림의 독립운동을 조명하는 책도 썼다. 안동 출신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이육사 생애를 다룬 책도 냈다.

“안동대에서 한국 근대사를 가르치면서 위기에 빠진 인문학을 살리려면 대중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 뜻으로 ‘안동의 독립운동사’를 내고 2001년에는 안동대 박물관에서 ‘퇴계학맥의 독립운동’ 전시회를 열었는데 시민 반응이 매우 좋았어요. 사실 안동은 기초 지자체 중 가장 많은 390여 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지역인데도 당시 안동 사람들은 퇴계 이황 학문과 학맥이 뛰어나다는 말만하고, 그 후예들이 펼친 독립운동은 제대로 알지 못했거든요. 그 전시 이후 본격적으로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설립도 추진했죠.”

김 관장이 한자 백성 민 글자가 표시된 상설전시관 설치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강성만 선임기자
김 관장이 한자 백성 민 글자가 표시된 상설전시관 설치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강성만 선임기자

안동 지역 독립운동은 1894년부터 50년에 걸쳐 꾸준히 전개되었고 유림이 이끈 의병부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까지 이념적 스펙트럼도 넓다. 그는 안동에서 독립운동가가 많이 배출된 배경으로 우선 퇴계 학맥을 꼽았다. “안동 지역은 퇴계 학맥과 통혼권(결혼할 수 있는 집안 범위)으로 촘촘히 엮인 그물 같아요. 지도자가 나타나 (그물) 한 가닥을 끌면 다 따라갑니다. 임정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집안이 대표적이죠. 퇴계 학맥의 영남 남인이 2백년 동안 정권에 참여하지 못해 노론 등 다른 유림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화하면서 군신 의리에 강하게 집착한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정권 주도 세력인 노론 인사들은 중국이나 일본도 다니면서 사상적 전환이 많이 나타나지만 영남 남인은 그런 기회가 없었잖아요.”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나온 까닭은? “국가 붕괴 위기에 명분을 앞세워 의병에도 많이 뛰어들고 순국도 많이 했던 안동 유림 상당수는 3·1운동 이후 사회주의로 돌았어요. 만주로도 많이 갔죠. 그때는 붕괴된 나라를 살려야 한다는 게 시대적 과제였거든요. 일제를 독점자본가계급으로 설정하고 계급투쟁으로 이를 타도하여 민족해방을 이루자고 나섰지요. 이를 위해 유림은 빠르게 변신해 사회주의라는 새 사조를 받아들였어요. 이들 가운데 한국전쟁 전후로 월북한 인물도 여럿 있습니다.”

인터뷰 끝에 가장 마음에 두는 독립운동가를 꼽아달라고 하자 그는 국망 뒤 만주에 망명해 독립운동을 펼치다 일제에 체포되어 옥사한 김동삼(1878~1937) 선생을 꼽았다. “김동삼 선생은 민족 독립을 최고 가치로 두고 이념과 투쟁방법의 차이를 넘어 독립운동세력을 통합하려고 했어요. 자기가 가진 기득권을 다 내어주면서요. 자기 것만 고집하던 여느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달랐죠.”                                                                                                                                                                             <참고문헌>                                                                           1. 강성만, "무명 독립운동가들의 헌신 ‘70편 회고록’으로 보여줍니다", 한겨레신문, 2024.5.13일자. 2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