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총을 든 선비 박상진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1.08.25 19:03

“무장투쟁으로 국권을 회복하고 공화국을 세운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271. 총을 든 선비 박상진



                                                경주 세금 마차 강도사건

   1915년 12월 26일 일요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를 받아든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쾌재를 부른 사람도 있었고 충격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기독교 성탄절 기사 가운데에 실린 사건 기사 제목은 이러했다. ‘경주 아화(阿火)에서 관금봉적(官金逢賊) 팔천칠백원 분실 - 도적은 조선 사람’. 조선인 강도가 경주에서 세금 수송 마차를 털어 8700원을 강탈해갔다는 것이다. ‘…이십사일 오전 인시 사십분에 경주를 출발해 대구로 배송될 관금 팔천칠백원의 행낭이 경주 아화간에서 분실된 대사건이 있더라.’(1915년 12월 26일 ‘매일신보’)

조선일보

1915년 12월 26일자 ‘매일신보’ 3면.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기사 가운데에 ‘세금 운송마차 탈취 대사건’ 기사가 실려 있다. 군기(軍器)를 마련하기 위해 광복회가 벌인 사건이었지만, 총독부는 광복 때까지 사건 실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1915년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뒤 조선 총독부 시정(施政) 5주년을 대대적으로 기념한 해였다. 석 달 전 총독부는 경복궁을 허물고 조선물산공진회를 열어 식민 근대화를 과시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경사스러운 해’에 조선 강도에게 세금을 뜯겨? 그해 경성 숙련 목수 일당은 76전이었고(김낙년 등, ‘한국의 장기통계’1, 해남, 2018, p191) 이 목수가 연 200일 일을 한다고 했을 때 연봉은 152원이니, 목수 60명 연봉에 달하는 세금을 강탈당한 것이다.

   태평양전쟁이 터지고, 일본 천황이 항복하고 조선이 해방된 뒤까지도 이 강도들은 잡히지 않았고, 사건은 영구 미제로 남았다.

   사건 후 30년이 지난 1945년, 마침내 그 강도범 친척이 전모를 밝혔다. 내용은 이러했다. ‘…권영만은 환자로 변장하고 마부에게 부탁해 우편마차를 빌려 탔으며 우재룡은 효현교 천변에서 다리를 부숴놓고 대기하다가 마차가 물을 건너는 사이에 마차에 올라타…’ 그리고 사건의 주범(主犯)을 이렇게 명기했다. ‘이는 박상진씨의 명령에 의해 이뤄진 일이었다.’(이상 박맹진, ‘고헌실기약초’, 1945) 박상진은 평소 동료 무리에게 거듭 이리 말했다. “중국 동삼성(東三省)에서 병사를 양성해 국권을 회복하고 공화국을 세운다.” 이 강도범,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에 대한 이야기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271. 총을 든 선비 박상진

                                          암울했던 1910년대 무단정치

   1910년 8월 29일, 총성 한 번 울리지 않고 나라가 사라졌다. 수많은 지사들이 저마다 길을 제시하며 망국(亡國)을 피하려 했지만, 대한제국 황실은 망국을 택하고 말았다. 황실은 일본 왕족(王族)과 공족(公族)으로 살아남았다.(땅의 역사 201. 기미년 만세운동 특집 ③'왕족들은 무엇을 했는가’ 참조)

   한일병합조약에 도장을 찍은 조선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초대 총독으로 취임하며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헌병사령관이 경무총감을 겸직하고 헌병과 경찰은 범죄 즉결처분권부터 민사소송조정권까지 폭넓은 권한을 가졌다.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됐던 태형(笞刑)도 부활시켰다.(윤경로, ‘1910년대 독립운동의 동향과 그 특성’, 한국독립운동사연구 8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그런 엄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만주로 건너갔다. 감시를 피해 ‘독립전쟁’을 위한 기지를 해외에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국내에서는 천도교와 대종교, 기독교 같은 종교단체와 신민회(新民會)를 비롯한 각종 비밀결사 조직이 생겨났다.

   봉건 조선을 부활하려는 복벽파(復辟派)는 사실상 소멸했다. 이미 1908년 유학자 이기(李沂)는 “농사꾼도 못 되고 상인과 공인도 못 되고 선비 노릇도 제대로 하지 못한 우리들은 이미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선언했다.(이기, ‘일부벽파론·一斧劈破論’, 1908) 대신 사람들은 공화국을 염원했다.

   울산 사람 박상진(1884~1921)은 바로 그 독립공화국을 꿈꾸며 ‘국내에서’ 무장투쟁을 시도했던 선비였다.

                                                박상진이 권총을 들기까지

   다른 이들에 앞서 근대 시대정신에 눈을 뜬 선비들을 ‘혁신유림’이라 한다. 이들은 현실적으로 엄존하던 노비들을 해방하고 스스로 상투를 자르고, 근대 교육을 실시했다. 총을 잡기도 했다. 안동 혁신유림 허위(許蔿·1855~1908)는 1908년 13도창의군을 지휘해 서울 진격작전을 벌였다. 그해 경기도 연천에서 체포된 허위는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배후를 묻는 일본 관리에게 허위는 “이등박문이 배후요, 대장은 바로 나”라 답했다. 허위는 그해 9월 27일 서대문형무소 첫 사형수로 처형됐다.(허복, ‘왕산허위선생거의사실대략’)

   그 시신을 수습한 사람이 허위의 제자 박상진이다. 1884년 음력 12월 7일, 양력으로는 1885년 1월 22일 당시 경남 울산 송정에서 태어났다. 나이 열여섯에 허위 문하로 학문을 익힌 뒤 스물한 살이던 1905년 서울 양정의숙에 입학해 법률과 경제학을 공부했다.(국역 ‘고등경찰요사’(총독부 경북경찰부·1934), 류시중 등 역주, 안동독립운동기념관, 2010, p338)

   일본 경찰에 따르면 박상진은 ‘우국(憂國)의 생각이 대단히 심각한 데가 있는’ 청년으로 성장했다. 양정 재학 시절 많은 사람을 만났다. 선교사 헐버트와도 교류했다. 충청의 혁신유림 김좌진도 만났다. 그 인연이 깊게 이어져, 1921년 박상진이 죽었을 때 김좌진은 ‘박의사 상진씨를 곡함’이라는 만사를 쓰고, 스스로를 ‘도원결의 20년인 의동생’이라고 칭했다.(박중훈, ‘고헌 박상진의 생애와 항일투쟁활동’, 국학연구 6집, 국학연구소, 2001)

   1911년 중국을 여행하며 손문의 신해혁명을 몸으로 목격했다. 그리고 만주에서 안동 혁신유림과 신민회가 건설 중인 해외 독립기지도 경험했다. 그해 귀국한 박상진은 아버지 회갑연을 열며 ‘만주 동지의 실정과 사관 양성 기관을 설명한 뒤 집단이민을 제안했다.’(박상진 아들 박경중, ‘고헌박상진선생약력’, 1946) 과연 이민이 급증했다. 총독부에 따르면 1912년 ‘한일합병에 불평을 품은 계급들에 의한 선동과 교사’로 만주 이민이 급증했다.(박중훈, 앞 논문)

                                                      “무장 혁명을 한다”

   그리고 1915년 8월 25일 박상진은 그때까지 인맥과 자금을 기반으로 대구 달성공원에서 ‘대한광복회’를 결성했다. 박상진은 ‘총사령(總司令)’이었다. 그러니까 단순한 계몽단체가 아닌, 군사조직임을 뜻하는 직책이다.

   “각국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조선에서도 가능하다.”(경성복심법원, 1919년 9월 22일 박상진 등 판결문) 혁명은 1911년 중국 신해혁명을 말한다. 이에 앞선 1905년 제정러시아에서도 제정을 향한 혁명 시도가 있었다. 왕정복고는 박상진 안중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혁명을 위한 수단은 무장이었고 무장을 위한 기초는 자금이었다. ‘광복회의 목적은 국권을 회복하여 공화정치를 하는 것으로, 그 방법은 조선 내 자산가로부터 금전을 모집하여 군기(軍器)를 구입하여 독립을 도모하는 것이다.’(위 판결문) 중국 여행 때 반입한 권총 11정이 무장의 기초였다.(총독부 경북경찰부, 앞 책, p339)

   광복회 결성 3년 전인 1912년 박상진은 ‘동지’라고 불렀던 평양 사람 김덕기, 전주 사람 오혁태와 함께 대구에 ‘상덕태상회’를 개업했다. 문중이 소유한 대토지도 그에게는 독립자금이었다. 그렇게 전국에 설립한 상회는 갑인, 이춘, 백산, 평북상회와 충부상회 등이었다.(’고헌실기약초’) 상회를 통한 무역과 거래로 합법적 자금 축적을 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벌인 작업이 친일 부호를 대상으로 한 ‘의연금’ 모금이었다. 박상진은 동지들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비밀과 암살, 폭동과 군령은 우리의 강령이다. 폭동은 현시점에 불가능하니 암살로 미래를 준비한다.’(경성복심법원, 앞 판결문)

   가장 유명한 사건은 전 경북관찰사 장승원 사건이다. 1917년 11월 광복회는 전 경북관찰사 장승원을 권총으로 사살했다. 박상진 스승 허위에 의해 경북관찰사가 됐던 장승원은 훗날 “군자금을 지원해달라”는 허위 측 요청을 일본에 밀고했던 사람이다.(총독부 경북경찰부, 앞 책, p339) 광복회 회원 채기중과 경창순, 강순필, 유창순은 장승원을 사살하고 집 대문과 마을 버드나무에 이런 경고문을 붙여놓았다. ‘너의 큰 죄를 꾸짖고 우리 동포에게 경고한다 – 광복회원’.

   세금 운송 마차 습격도 자금 모집에 동원된 비합법적 투쟁이었다. 1917년 미국 자본이 운영하던 평안도 운산금광 현금마차 탈취 미수 사건도 광복회가 주동했다. 이 사건에 연루된 광복회 만주지부장 이진룡이 체포되자 후임에 임명된 김좌진이 만주로 떠났다. 서울 인사동에서 박상진은 김좌진에게 전별시를 이렇게 써주었다. ‘칼집 속 용천검 북두까지 빛나니 이른 때 공을 세워 개선가를 부르자’.(박중훈, ‘역사, 그 안의 역사’, 박상진의사추모사업회, 2021, p294)

                                                1910년대를 살아낸 광복회

   부호(富豪) 가운데 처단 대상을 골라 사살하고 그 현장에 광복회 행위임을 밝혀놓았으니 광복회는 강도 집단이 아니었다. 성리학과 신문물을 공부하고 대륙으로 간 혁신유림과 교류 끝에 나온 행동이니 박상진은 단순한 비분강개형 투사만도 아니었다. 세상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던 1910년대, 광복회는 뒷날 독립운동이 갈 길을 먼저 걸어간 조직이 아니었을까.

   결국 1918년 1월 충남 도고면장 박용하가 광복회에 의해 처단되고 현장에서 광복회 명의 경고문이 발견되면서 박상진은 경찰에 체포됐다. 1919년 2월 28일 공주지방법원 1심 선고는 다음 날 팔도를 뒤흔든 만세운동으로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총 여섯 차례 재판을 거쳐 사형이 확정된 박상진은 다른 동료들과 함께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 처형됐다. 딱 100년 전이다.

   스승 허위가 서울 서대문형무소 처형 1번이었고, 제자 박상진은 대구형무소 처형 1번이었다. 그가 이리 썼다. ‘이룬 일 하나 없이 가려 하니 청산이 조롱하고 녹수가 찡그린다(無一事成功去 靑山嘲綠水嚬·무일사성공거 청산조녹수빈)’(박상진, 옥중절명시) ‘지지리도 가난하게 살다가 울산 생가로 돌아와 사는’ 증손자 박중훈(67)이 말한다. “할아버지 본인은 원치 않았더라도 시대가 원했기에 기꺼이 격랑 속으로 들어가셨다.”

조선일보

경북 경주에 있는 박상진 의사 묘 비석. /박종인

                                           <참고문헌>

  1. 박종인, “무장투쟁으로 국권을 회복하고 공화국을 세운다.” 조선일보, 2021.8.25일자. A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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