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구한말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 선생 출생지 논쟁 글쓴이 localhi 날짜 2012.07.02 18:02

 

    <특별기고> 구한말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고우 김옥균의 생애와 출생지 논쟁

 

         충청문화역사연구소 소장(천안중 교사, 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신상구(辛相龜)

 

                                    1. 김옥균의 생애와 업적

                            1) 구한말 문충공의 10대손으로 태어남

  고우(古愚) 김옥균(金玉均)은 인조 때 우의정을 지낸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10대 손으로 1851년 음력 1월 23일 충남 공주군 정안면 광정리의 안동김씨(安東金氏) 문중에서 호군을 지낸 김병태(金炳台)와 은진송씨(恩津宋氏)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옥균(玉均)'이라는 이름은 그의 외모가 '백옥같이 곱고 희다'고 해서 짓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나이 2세 때에 그의 부친 김병태가 서당을 차리기 위해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원덕리로 이사했다. 6세 때에는 생부인 김병태의 결정에 따라 상경하여 5촌 당숙인 좌찬성 김병기(金炳基)의 양자로 들어갔다. 11세 때에는 양아버지 김병기가 강릉 부사로 부임하여, 양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강릉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그곳의 송담서원에서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16세 때에는 중앙으로 전임하는 양아버지를 따라 한성부로 올라온 후 더욱 면학에 정진하였다.

                              2) 고종 10년 문과 알성시에 장원 급제

  그는 남달리 총명하여 1870년(고종 8년) 초부터 한성부 북쪽에 있는 양반 거주 지역인 북촌(北村)에 드나들던 중인 출신 한의원 유대치(劉大致)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인 박규수(朴珪壽)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승려 이동인(李東仁)과 역관(譯官) 오경석(吳慶錫)등을 만나 개화사상을 갖게 되었다.

  그는 1872년(고종 10년) 문과 알성시(謁聖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그해 바로 성균관 전적(典籍)에 보임되었다. 그는 1873년에 24세의 젊은 나이로 홍문관 교리를 거쳐 관료로서 출세의 길이 열리는 바람에 옥당 승지(玉堂 承旨)와 정언(正言)을 지내고 호조참판을 역임했다. 1877년 김옥균은 백의정승이라 일컬어지는 의관 유홍기(劉鴻基)를 통해서 역관 오경석이 가져왔던 서적을 입수하여 탐독하였고, 박규수·유홍기·오경석 등으로부터 개화사상을 습득하였다. 1879년 김옥균은 박영효(朴泳孝)와 함께 이동인의 여비를 대주어, 이동인은 그들이 제공한 돈으로 일본에 건너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를 포함한 일본 인사들을 만나고 돌아왔다. 이때 이동인은 정보와 함께 일본에서 구한 각종 책들과 문물을 김옥균과 유홍기에게 제공하였다. 그 뒤 김옥균은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홍영식(洪英植) 등과 함께 개화당을 이루어 그 지도자가 되었다. 김옥균은 개화파에게 우호적이었던 김홍집(金弘集), 어윤중(魚允中), 김윤식(金允植) 등과 동지적 유대 관계를 형성하고, 그들을 통해 국왕과 측근들에게 개화의 필요성을 설득, 호소했다. 그는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려면 부패의 척결과 낡은 인습을 타파하고, 신분차별을 완화할 것과, 문호를 열어 서구의 미지의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고 새로운 지식과 문물을 도입하여 나라를 근대화하는 길이 청나라나 외세로부터 자주독립 할 수 있는 길이라고 강조하였다.

                           3) 신사유람단과 수신사의 일원으로 도일

   그는 1881년 12월 생가와 양가의 재산과 주변의 후원금 등을 모아 환전, 일본돈 2만 엔의 자금을 마련해서 박정양, 홍영식 등과 함께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일원으로 도일했다. 신사유람단 일행은 나가사키(長崎)에 도착했고 이들은 일본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각자 흩어졌다. 김옥균은 나가사키 현의 조선소, 제련소, 탄광, 금광 등을 시찰하고 채굴기계의 존재와 금속 가공원리를 파악하였다. 이어 김옥균은 오사카(大阪)로 건너가서 군수기지 공장과 조폐국을 둘러보고 물자 운송용 차량의 존재를 접했고, 지폐 주조 기술을 목격하였다. 이어 교토(京都), 고베(神戶)를 거쳐 1882년 3월 도쿄에 도착했다. 도쿄에서는 일본의 개화파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의 집에서 4개월 정도 머물면서 일본의 발전상을 관찰하고, 그와 담론을 나누었는데 조선인 청년들의 애국심에 감격한 후쿠자와 유키치는 특히 김옥균과 서재필, 박영효, 윤치호 등과 수시로 서신을 주고받았다. 김옥균은 귀국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후쿠자와를 통해 일본 정계와 재계의 여러 인물들을 만나 그들의 조선에 대한 시각과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진의를 파악하려 하였다.

  김옥균은 일본에서 귀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민영익과 함께 수신사의 고문 겸 부사가 되어 철종의 부마(駙馬)인 박영효, 김만식(金晩植), 홍영식, 서광범 등과 같이 다시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 그는 메이지 유신 후의 일본의 조야(朝野)와 교제하는 동안 본국 개혁 혁신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리고 그는 메이지유신으로 발전한 일본을 하나의 개혁의 본보기로 보고 일본의 힘을 빌려 국가제도의 개혁을 꾀할 결심을 굳혔다. 그러나 그는 1883년 5월 인천항을 통해 조선으로 귀국하기 전에 일본이 재정을 늘린 것으로 군비에 투입하는 것을 목격했고, 정한론의 주장까지 일본 개화파에서 일부 나온다는 사실을 접하자 그는 이를 반신반의하면서도 서신을 통해 일본이 미구에 조선을 침략할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을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윤치호 등에게 알렸다. 귀국 후 그는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과 함께 국가의 개혁방안을 토론하였으며, 그들과 함께 개화독립당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일본 유학생 파견과 군사 견습생 파견운동을 주도하였고, 저서『치도약론』을 집필하였다. 이 책은 도로 정비에 관련된 내용으로서 치도국 설치, 기술자 양성, 기계 구비, 오물 처리법 등을 포함한 17개 세목의 내용을 논하였고, 이는 한성순보에 게재되었다. 특히, 김옥균은 조선의 종주국인 청나라의 내정간섭에 매우 비판적이었고, 조선의 자주권을 확립하려면 국방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1883년 김옥균은 고종을 설득하여 서재필과 그의 동생 서재창을 비롯한 17명의 청년들을 일본으로 보내 근대식 군사기술을 배워오도록 하였다.

                                     4) 고종 22년 갑신정변 주도

  김옥균은 박규수, 오경석 등으로부터 신문물을 접하고 서방에 문명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개화(開化)를 해야 나라의 부흥과 발전을 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성리학적 위정척사파들의 폐쇄적인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반대, 비판하였지만 족벌체제로 변질되는 민씨 정권을 지지하지도 않았고, 외세의 강요에 의하여 무분별하게 개방하는 것도 비판하였다. 그러나 나라를 여는 것은 세계적인 흐름이기 때문에 조선이 스스로의 힘을 기르고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는 조선 스스로 개항을 하여 외국의 선진문물과 장점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옥균은 처음에 평화적 수단에 의한 개혁운동(改革運動)을 추진했으나, 민씨 일족의 부패와 청나라와 결탁한 민씨 일파의 벽, 청나라의 영향력 등에 부딪치자 위로부터의 점진적인 개량주의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급진개화파로 변신해서 1884년(고종 22년) 10월 17일 우정국(郵政局) 청사의 낙성연(落成宴)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주도하다가 민씨 척족 수구파들과 위정척사파 양측의 방해공작과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실패하여 망명객이 되고 말았다. 그는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피신하여 망명생활을 하였으나, 여러 차례 테러위협에 시달리다가 청나라로 망명했다.

  결국 그는 구한말 개혁을 주도하다가 조선왕조의 미움을 사는 바람에 1894년 3월 28일 상하이 동화양행 호텔에서 조선 정부에서 보낸 홍종우(洪鍾宇)에게 리볼버 권총으로 저격당해 4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의 시신은 선박으로 운구되어 강화도 양화진에서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하고, 그의 머리는 장대 위에 꽂혀진 삼각발에 끼워져 석 달 간이나 저잣거리에 효시된 후 실종되었다. 효시(梟示)된 그의 목에는 '모반(謀反) 대역부도(大逆不道) 죄인 옥균(玉均) 당일 양화진두(楊花津頭) 능지처참'이라고 쓰인 커다란 천이 나부끼고 있었다. 그의 생부 김병태는 연좌제에 의거 대역죄인으로 몰려 공주에서 참수당한 후 김옥균과 같이 효수되었고, 모친 은진송씨는 음독 자결하였으며, 김옥균의 부인 유씨는 딸 1명과 함께 관비가 되어 끌려갔다. 또한 이 사건으로 그의 가까운 친척들은 항렬자를 균에서 규로 바꾸기도 했다. 한편, 김옥균에게는 정실 부인의 딸 외에도 1894년 3월 사다라는 딸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895년 갑오개혁으로 개화당 내각이 들어서자 법무대신 서광범과 총리대신 김홍집의 상소로 사면·복권되었고, 아관파천 후 복권이 취소되었다가, 1910년 다시 복권되어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달이다.

  그가 수구파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한 후 처음에는 일본 동경의 청산외인무덤에 묻혔는데, 1914년 아산군수였던 그의 양자 김영진이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로 옮겨와 부인 유씨와 합장하였다. 그리고 그의 생가 터인 충남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에는 추모비가 설치되었으며, 1976년 충청남도 기념물 13호로 지정되어 공주시가 관리하고 있다. 한편 일본 도쿄 아오야마 공원묘지 외국인 묘역에는 머리털과 옷을 묻은 무덤이 있다.

                                   2. 김옥균에 대한 사후 평가

  김옥균은 개화사상에 철저히 심취하여 스승 유홍기가 중인 신분임에도 그에게 존댓말을 썼다고 전해진다. 최근 뉴라이트는 김옥균, 박영효 등의 급진개화파가 기존에 청나라에 바치던 조공제도와 문벌제도를 폐지하는 등 개혁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한국 근대화를 빛낸 선각자”로 높이 평가했다. 한편 그는 민씨 일파의 폐쇄적인 위정척사 주장을 반대하면서도 외세의 강요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무분별하게 개방하는 것도 배척했다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반면에 그는 명나라와 청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와 외세의 개입을 비판하면서도 갑신정변 당시에 일본에 의지하게 되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리고 사전 준비가 치밀하지 않았던 점과 정변의 주체 세력이 너무나 허약했던 것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그가 처음에는 평화적 수단에 의한 개혁 운동을 추진했으나 청나라와 결탁한 민씨 세도정권의 벽에 부딪히자 부득이 쿠테타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변혁을 시도했으나, 민심의 지지를 받지 못한 채 위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하다가 실패했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3. 고우 김옥균의 출생지 논란 

  최근 프랑스 파리에서 한국의 전통을 바탕으로 한 미술작품을 선보여 유럽 예술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으나 1960년대에 동백림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많이 겪은 고암(顧菴) 이응노(李應魯, 1904-1989) 화백의 출생지를 놓고 예산군과 홍성군이 오랫동안 소모적인 논쟁을 벌려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 바 있다. 뒤늦게나마 이응노 화백의 출생지가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임이 밝혀지는 바람에 지루한 출생지 논쟁이 끝나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홍성군이 2010년에 이응노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관을 세워 관광지로 개발하여 지역경제가 서서히 활성화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구한말 목숨을 걸고 개혁과 개방을 주도하여 “한국 근대화를 빛낸 선각자”로 높이 추앙받고 있는 고우(古愚) 김옥균(金玉均) 선생이 타계한지 118년이 지난 지금 그의 출생지에 대한 논쟁이 끊이질 않고 계속 벌어지고 있어 충청지역을 중심으로 향토의 역사와 문화를 체계적으로 조사연구하고 있는 향토사학자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지난 2012년 6월 2일 토요일 오후 대전광역시 동구의 역사와 문화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 은진송씨(恩津宋氏) 집장촌(集葬村)을 찾아 학술조사를 하는 도중, 김옥균의 출생지가 이사동이라는 안내간판을 우연히 보고, 나는 정말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충청남도와 공주시가 충남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감나무골 38번지를 김옥균의 출생지로 보고, 각종 기념사업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충청남도는 1976년 12월 6일 김옥균 생가지인 광정리 감나무골 38번지를 충남 기념물 제13호로 지정하여 공표했고, 공주시에서는 광정리 감나무골 38번지에 유허비를 건립하고 안내판까지 건립하여 놓았다.

  그리하여 나는 이사동 135-2번지에 거주하고 있는 송진국(宋鎭國, 69세)씨 댁을 방문하여 사우당효정공파종중(四友堂孝貞公派宗中)이 1984년 3월 대전 회상사(回想社)에서 발간한 족보인『은진송씨효정공파보 전(恩津宋氏孝貞公派譜 全)』을 잠간 빌려보았는데, 분명히 30페이지에 김옥균의 출생지가 이사동(二沙洞)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족보 22페이지에 김옥균의 외조부인 송인덕(宋潤德, 1791-1822)과 외숙인 송인식(宋寅植, 1818-1900)이 기록되어 있고, 30페이지에 김옥균의 생부인 김병태(金炳台)가 기록되어 있었으나, 생모 은진 송씨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2012년 6월 6일 안동김씨 족보편찬을 주도해 온 김은진(金殷鎭, 84세)씨의 증언에 의하면, 안동김씨 대동보소가 1984년 12월 농경출판사에서 간행한 족보인『안동김씨대동보(安東金氏大同譜)』5권 1066페이지에는 김옥균의 출생지가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38번지로 기록되어 있고, 김옥균의 생모는 은진송씨로 기록되어 있어 김옥균의 생모 이름을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송진국씨와 김은진씨에게 이 족보들에 왜 김옥균의 생모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고 질문을 던져보았더니, 원래 은진송씨 족보와 안동김씨 족보에는 어느 파의 족보를 막론하고 예로부터 여자의 이름은 관행으로 기록하지 않는 전통이 있다고 답변해 주어 의문을 어느 정도 풀 수 있었다. 그리고『은진송씨효정공파보 전(恩津宋氏孝貞公派譜 全)』에는 분명히 김옥균의 출생지가 이사동으로 되어 있고, 안동김씨 대동보 5권』에는 김옥균의 생가지가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38번지로 기록되어 있어 서로 상이한데, 왜 지금까지 김옥균의 출생지를 정확하게 바로잡지 않았는지 궁금하다고 질문했더니, 조선시대에는 결혼 초에 1년 또는 2-3년간 처가살이 하는 풍습인 서류부가(?留婦家) 제도가 있어 김옥균의 생부 김병태가 이사동 웃사라니 음지뜸에 위치한 장인 송인식의 집에서 결혼 초에 처가살이 할 때에 김옥균이 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옥균의 출생지를 상례에 따라 아버지 김병태의 본적지인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38번지로 잘못 기록한 것 같다고 대답해 주었다.

  나는 그 당시 대전광역시 이사동과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에 실제로 살아보지 않아 두 곳 중 어느 곳이 김옥균의 출생지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은진송씨효정공파보 전(恩津宋氏孝貞公派譜 全)』의 기록과 그 당시 처가살이 풍습으로 미루어보아 김옥균의 출생지가 대전광역시 이사동 윗사라니인 것 같은 심증이 간다.

  그런데 청주대 국문과를 거쳐 단국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대전대 국문과 명예교수로 있는 한상수(韓相壽) 선생은 그의 저서에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결혼 초에 남자가 1년 또는 2-3년간 처가살이 하는 풍습인 서류부가제도(?留婦家制度)가 있어 김옥균의 생부 김병태가 이사동 윗사라니 음지뜸의 안산 모랭이 산 아래 위치했던 처갓집인 송인식(宋寅植)의 집에서 결혼 초에 처가살이 할 때인 1851년 1월 23일에 김옥균이 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이 행정체제를 갖추지 않아 출생지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이 출생한지 21일 이내로 출생신고를 해야 하는 제도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출생 장소를 구체적으로 기록해 두지 않았다. 다만 반상(班常)을 구별하기 위해 조선시대 인물에 대한 각종 기록을 보면 시조의 고향이 되는 관향(貫鄕)만 표기했다. 게다가 조선시대는 유교의 영향을 받아 부계중심사회였기 때문에 신생아의 본적지는 아버지의 본적지를 따르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제까지 김옥균의 생가지가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 윗사라니 음지뜸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김병태의 본적지인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감나무공 38번지로 잘못 기록된 것 같다고 논증해 지금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아무튼 앞으로 빨리 역사학자들의 정확한 고증에 의해 김옥균의 생가지가 확실하게 밝혀져 더 이상 불필요한 <김옥균 생가지 논란>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필자 소개>

.천안중학교 사회과 교사(국학박사, 향토사학자?시인?칼럼니스트)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A study of Korean inflation, 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A study of shamanic culture in Taean, 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아우내 단오축제?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실학자 홍양호의 생애와 업적 등 49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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