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신상구(辛相龜)
조선 말 실학자이자 항일독립투사인 해학(海鶴) 이기(李沂, 1848~1909) 선생은 전북 김제시 성덕면 대석리 340-1번지에서 태어났다.
김제 시내에서 만경 방향으로 지방도를 따라 약 10여 분 가다 보면 좌측으로 해학 이기 선생 생가 이정표가 보인다. 김제시 성덕면 대석리 마을 한가운데 있는 해학 이기 선생의 생가는 대지 면적이 863㎡이고, 안채 1동과 사랑채 1동으로 이루어진 초가였었다. 그런데 현 거주자가 안채는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조하였고 사랑채는 모두 파손되어 현재는 그 터에 창고를 지어 사용하고 있다. 안채의 규모는 정면 4칸으로 제일 왼쪽에 부엌이 있고 그 다음 큰방, 윗방, 머릿방 순으로 3개의 방이 들어서 있다. 현재는 큰방과 윗방의 가운데 벽을 터서 하나의 방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 앞에 폭 120㎝의 마루가 놓여 있다. 2003년 12월 26일 전라북도기념물 제118호로 지정되었으며 이정환이 소유, 관리하고 있다.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 1864-1920)의 수제자인 해학 이기 선생은 황현(黃炫), 이정직(李定稷)과 함께 호남 3걸로 불렸다. 그는 고종 31년인 1894년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을 찾아가 동학군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려 하였으나 김개남(金開男, 1853-1895)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이기 선생은 전통적인 도학자들의 폐습을 절감하고 유학이 공리적이며 고식적인 굴레를 벗고, 보다 실용적이면서 진취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과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학풍을 이은 새로운 실학적 풍조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모든 국민이 학문을 배워야 할 의무가 있으며 전문대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자 고종 42년인 1905년에 동경(東京)에 가서 천황과 요인들에게 한국에 대한 침략을 항의하였고, 미국 포츠머스로 가서 국내의 처지를 세계에 알리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리고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귀국하여 한성사범학교에서 재직하는 한편 장지연(張志淵, 1864~1921)·문효정 등과 대한자강회를 결성하여 민중 계몽과 항일운동에 전력하였다. 1906년에는 장지연, 윤효정 등과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민중계몽에 힘썼다. 순종 1년인 1907년에는 나인영(羅寅永) 등과 같이 자신회를 조직하여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의 암살을 기도하였으나 권중현(權重顯, 1854-1934)에게 부상만 입혔을 뿐 실패하였다. 7년 유배형으로 진도에 갔다가 고종의 특사로 귀향하였고, 돌아온 후에도 다시 서울에서『호남학보』를 발간하며 민족운동에 헌신하였다. 1909년에는 자강회원인 계연수(桂延壽),이연보(李延普), 김효운(金孝雲) 등과 함께 단군을 신봉하는 단학회를 창립하고 회장으로 취임했다.
이기 선생은 이건창(李建昌)·황현·이정직(李定稷)·왕사부(王師夫), 왕사찬(王師瓚) 형제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그리고 저서로는『해학유서(海鶴遺書)』 (국사편찬위원회, 1955)가 있다.
그런데 1910년 9월 28일에 일제가 한일합방을 하려고 하자 이에 분통하여 1909년 7월 13일 경성여관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단식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소는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에 있다가 국립묘지로 이장되었고,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