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중국 조선족자치주의 충북인 마을인 정암촌의 발전 방안 글쓴이 localhi 날짜 2014.04.20 01:17

               중국 조선족자치주의 충북인 마을인 정암촌의 발전 방안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신상구(辛相龜)

                              1. 정암촌의 위치와 유래

  중국 조선족자치주의 충북인 마을인 정암촌은 중국 길림성 도문시 량수진의 두만강변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북한쪽으로는 두만강 건너에 남양시가 있고, 멀리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가 살았다는 왕재산(王在山)이 보인다. 정암촌은 1938년 일본의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충북의 청주, 청원, 충주, 보은, 옥천의 농민 80가구가 집단 이주해 개척한 전형적인 농촌이다.

  당시 일제 감점기에 있었던 조선의 순진한 백성들 상당수가 북간도에 가면 땅도 주고 집도 준다는 일제의 꼬임수에 넘어갔다. 실제로 일제가 충청북도에서 감언이설로 이주민을 모집할 때 청주, 청원, 보은, 옥천, 충주에서 모인 180세대가 이민 행렬에 가담했던 것이다. 180세대 중 100세대는 왕청현 하마탕으로 가고 80세대가 지금의 량수진 석두촌에 안치됐는데 석두촌은 당시 경작지가 적은 등 불리한 점이 있어 다시 왕청현 라자구에 안치됐다고 한다. 그런데 라자구는 물이 좋지 않아 당지인들이 수토병을 심하게 앓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시 지금의 정암촌에 삶의 터전을 잡게 됐던 것이다.

  정암촌(亭岩村)은 마을 북쪽의 정암산에 정자같은 둥그런 바위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정암산에는 발해시기의 중요한 군사요새로 사용됐을 것으로 짐작되는 정암산성이 있고, 마을안에도 같은 시기에 축조됐을 것으로 보이는 170cm 가량 높이의 돌로 쌓은 성이 있었다.

                     2. 정암촌 아리랑 문화 형성의 역사적 배경

  다수의 충북인들이 모두들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해주겠다'는 일제의 꾐에 빠져 만주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들이 1938년 음력 정월에 처음으로 정암촌에 이주했을 때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척박한 불모지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좌절하지 않고 움집(코야:땅에 움을 파서 지붕에 갈대나 쑥대를 얻어 지은 간단한 집)을 짓고 살면서 억척스럽게 황무지를 개간해 터를 잡고 밭을 일궜다. 그래서 그들이 이곳에 정착한지 3년이 지나자 어느 정도 생활할 정도의 토지가 개간됐지만 일제는 군량미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식량을 빼앗아 갔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남한에서는 전혀 경험할 수 없었던 갑작스런 혹한 때문에 노인들과 아이들은 폐렴이나 동상으로 많은 이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처럼 추위와 굶주림, 일제의 수탈로 이주민들의 생활은 언제나 궁핍하고 불안했다. 해방이 되자 정암촌 사람들은 상당수가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남아 지금까지 살고 있다. 전성기에는 900여 명의 인구가 있었을 정도로 번창했으나 지금은 100여 가구에 300여 명이 모여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그런데 이주 1세대는 거의 다 돌아가시고 1.5세대나 2세대가 살고 있다.

  충북 이주민들이 혹독한 추위, 일제의 수탈로 인한 지독한 가난, 중국인들의 보이지 않는 차별 속에서도 고향의 말과 풍습을 꿋꿋하게 지킬 수 있었던 버팀목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다행히도 2003년에 길림성 재정지원 시범촌 건설의 혜택을 입어 정암촌에는 산뜻하고 아담한 새 주택들이 줄지어 들어섰다. 마을 서쪽에 커다란 가스탱크가 있었는데 정암촌 촌민들은 대부분 늪가스를 사용하고 있다. 마을에는 병원, 노인활동실, 촌판공실 등 공공시설들이 갖추어져 있다. 30여 명 되는 마을 학생들은 통근차를 타고 량수진에 있는 학교에 다니고 있고, 또 30여 명의 젊은이들이 해외나 외지에 돈 벌러 나갔다고 한다. 중국대하무역유한주식회사에서 2000만원을 투자할 계획으로 세운 송원록장이 현재 정암촌 뒤산에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정암촌에는 충청도 사투리와 충청도 웃다리 농악 등이 지금껏 잘 보존되고 있다. 1960년대 정암촌에서 공청단 서기직을 맡고 있었다는 안승만 노인은 그때는 현에서 운동대회나 민속활동을 할 때면 정암촌 촌민들의 농악놀이가 늘 한마당을 차지했는데 '문화대혁명'시기 농악놀이가 사라졌다가 개혁개방 이후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고 한다.

  정암촌이 충북의 마을이라고 해서 지난 1990년대부터 정암촌과 충청북도와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한국에서 각종 농악기들을 지원해 주고 또 한국인들이 직접 농악놀이를 배워주고 가르쳐줘 지금 노인들은 물론 많은 촌민들이 북 치고 장구 치는 기본적인 농악놀이는 다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보름같은 명절 때면 정암촌 주민들이 노인활동실이나 공중장소에 모여 옛 '청주아리랑'을 부른다.

          시아버지 죽으면 좋다 했더니 빨래줄이 끊어지니 또 생각나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시어머니 죽으면 좋다 했더니 보리방아 찔 때마다 또 생각나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시아버지 골난데는 술받아 주고 시어머니 골난데는 이 잡아주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정암촌 북쪽에는 귀틀집과 격자문 등 충북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이 남아있는 초가집 3~4채가 아직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중국 동북지역에는 정암촌 이외에도 무주촌, 남도촌 등이 골고루 분포하고 있다. 이 마을들은 모두 1930년대 이주한 마을로 각기 고향의 풍속과 말 그리고 전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어서 언어학과 인류학 적으로도 연구의 가치가 있다.

                        3. 전형적 개척촌 형태 장방형 배치

  정암촌은 전형적인 개척촌의 형태로 열지어 산자락 아래 평지에 장방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주택의 평면은 거의가 1자형 통칸집이다.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거의가 초가집이고 연료는 장작과 석탄을 사용하고 가금류를 키우고 넓은 텃받을 가지고 있었다. 옥수수 창고와 엽연초 건조장 등 모든 부속 건물이 농촌의 실정에 맞춰 충분한 창고 공간을 가지고 있으며 담장은 바자울로 나무를 잇대어 묶어 만든 형태이다.

  마을 주위에는 너비 4, 높이 8정도의 토성을 쌓고 그 위에 나무로 울바자(울타리를 만드는데 쓰는 것처럼 나무를 발처럼 엮어서 만든다)를 엮고 토성의 동서남북에는 포대를 쌓고 문은 남과 북에 한 개씩 내었다. 토성 주위에는 깊이가 1.7, 너비가 4 되는 해자(출입을 먹을 목적으로 성주변에 파놓은 물 웅덩이)를 만들었다. 이러한 토성을 만든 이유는 당시에 자주 출몰하던 토비(산적)들을 막을 목적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당시 지배군이었던 일본군의 작전 목적에 따라 생산돼 비축된 양식의 외부 반출을 막을 목적이 더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군이 말하는 토비는 조선의 독립군이나 중국의 공산당이었기 때문이다.

  남한사람들이 이주해 정착한 곳의 주거 특징은 북한 사람들이 살던 주거와는 다른 내부공간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함경도가 원류인 통칸형 정지가 있는 집 즉, 부엌(정지)과 방이 칸막이가 없는 형태가 아니고 방과 부엌의 칸막이를 가진 형태로 처음에는 외부에 툇마루가 있는 남쪽 고향에서와 비슷한 평면 형태였으나 혹한의 기후 조건 때문에 지금은 거의 사라져 약간의 흔적만이 남아 있고, 부엌과 방을 막았던 칸막이도 문화혁명을 지나면서 민족주의의 비판 때문에 그 주변의 주거 형태인 통칸형으로 개조돼 지금은 그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4. 한중수교 이후 충북과의 인·물적 교류

  1992년에 한중수교가 이루어짐에 따라 한국과 중국 사이에는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졌다. 그런데 정암촌의 존재가 국내에 알려진 것은 1990년대 초이다. 당시 청주농악보존회장을 맡고 있던 충북대 국문과 임동철(64) 교수가 중국 옌볜대(延邊大)와 학술교류를 하던 중 정암촌에서 구전되고 있는 아리랑 가락이 과거 충북 청주지역에서 노동요로 불려지던 청주아리랑이란 사실을 확인하고 난 이후부터였다.

  지역 문화계는 "자칫 사라질 위기에 놓였던 청주아리랑이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있다"고 반겼다. 임 교수는 이후 충북의 각계 인사들을 모아 '정암회'를 조직하고 정암촌에 장학금과 마을발전기금을 전달하며 인연을 쌓아갔고, 충북대와 옌볜대의 교류도 활발해졌다.

  충북도는 2000년 10월 정암촌 1세대 32명을 초청해 도내 친지들과 고향 상봉을 주선했다. 그리고 2001년부터 해마다 정암촌 농민을 초청해 도내 농장이나 식품가공업체 등에서 농업연수를 하고 있다. 청원군도 2002년부터 격년제로 이주민 2세들을 데려와 선진 영농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지역 문화계에서는 청주아리랑을 완전하게 복원해 내는 작업을 하고, 정암촌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창작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그리고 청주민예총이 중국 조선족들의 삶과 애환을 노래극에 담아 청주아리랑 축제를 열기도 했다.

  지역학계에서는 충북대 기초교육원 안상경 초빙교수가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정암촌에 전해지고 있는 청주아리랑을 문화관광관광 콘텐츠로 개발하는데 성공해 2009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에서 문힉박사 학위를 받았다.

  충북대 봉사단은 2006부터 6차례나 정암촌을 방문해 정암촌과 이웃 마을 양수촌(凉水村)에서 담장·대문 페인트칠, 마을길 청소, 밭일 등 궂은 일을 맡아 했다. 또 마을 소학교(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영어와 수학, 과학을 재미있는 놀이로 가르치는 교육봉사 활동도 했다.

  충북도 자원봉사센터 의료봉사단도 정암촌을 찾아 주민들의 건강검진과 함께 진료 활동을 벌였다.

  이처럼 고향인 충북도민들의 지원과 교류가 이어지면서 정암촌은 몰라보게 달라지고 있다. 1960년대식 낡은 초가집은 산뜻한 벽돌집으로 새단장 했고, 마을 안길도 말끔하게 포장됐다. 농업연수를 하고 귀국한 주민 중 일부가 고추장·된장 공장을 세워 운영 중이고, 마을공동 한우사육단지도 들어섰다. 2년 전 충북대봉사단이 노인회관 뒷마당에 만든 게이트볼장에서는 70, 80대 어르신들이 운동을 한다. 정암촌은 이제 지린성 내에서 가장 활기차고 잘사는 농촌 마을로 자리매김했다.

                  5. 정암촌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통문화 보존

  정암촌 주민들은 중국의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1966~1976)을 겪었으면서도 한국의 충청도 사람들보다 더 충청도 사람답게 살고 있었다. 실제로 그들은 동북3성(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이 급속히 산업화되고 도시화되어 농어촌이 점차 황폐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충청도 방언과 노래, 전설, 춤과 농악, 풍습을 잘 보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정암촌의 괄목할 만한 변화는 우리의 고유한 전통문화를 사라지게 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귀틀집과 격자문을 갖춘 전통 양식의 초가집들이 점차 자취를 감춰가는 등 전통문화가 급속하게 사라져가고 있다. 북쪽에 서너채를 그대로 남겨두고 민속촌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 그나마 위안거리다. 충북도와 청원군이 마을 주민들 초청 연수를 통해 정암촌을 이끌어갈 지도자를 키워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마을 젊은이들은 안정적인 소득원을 찾아 마을을 등지고 대도시나 한국으로 거주이전을 하고 있다. 지금 정암촌에는 빈집이 늘어나고, 초등학교가 폐교돼 민족교육을 시킬 수 없다고 한다.

  지금 정암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암촌 주민들이 한민족(韓民族)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정암회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면서 좋은 일자리를 많이 창출하고 지금까지 계승 발전시켜 온 한민족의 전통문화를 잘 보존하고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아우내 단오축제』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55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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