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위당 정인보의 생애와 업적 글쓴이 localhi 날짜 2014.04.05 02:57
                                   위당 정인보의 생애와 업적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신상구(辛相龜)

   한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1893~1950.10)는 1893년 5월 6일 서울 종현(鍾峴, 현 명동성당 부근)의 외가에서 장례원부경(掌禮院副卿)과 호조참판을 지낸 아버지 정은조(鄭誾朝)와 어머니 달성 서씨(達城徐氏) 사이의 독자로 태어나 후손이 없는 큰집의 양자로 들어가 살았다. 본관은 동래(東萊), 호는 담원(?園) 또는 미소산인(薇蘇山人), 자는 경업(經業), 아호는 위당(爲堂)이다.

   동래정씨 문중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 명종대에 대제학을 역임한 유길(惟吉), 철종대에 영상을 지낸 원용(元容) 등을 들 수 있다.

   정인보는 어려서부터 아버지 정은조(鄭誾朝)로부터 한문을 배웠고, 13세 때부터 외삼촌 서병수(徐丙壽)를 통해 조선 양명학의 본류인 강화학파의 학자인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의 휘하에서 양명학 등을 수학하였다. 그는 이미 10대 때부터 문장이 능숙하고 재기가 넘쳐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총애를 받으며 자랐다.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국가의 주권이 손상되고 이에 대한 국권회복투쟁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세상이 시끄러워지자, 그는 관리 진출의 뜻을 버리고 부모와 더불어 진천(鎭川)·목천(木川) 등지에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하고 무력으로 한반도를 강점하여 조선조가 종언을 고하자 1911년과 1912년 두 차례 망국의 한을 품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 동북성 회인현(懷仁縣) 흥도촌(興道村)과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이곳에서 독립기지를 건설하고 있던 이회영(李會榮) 형제를 만나,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부평의 전답을 팔아 신흥강습소 등 이회영 형제의 독립군양성소를 위한 군자금으로 지원하였다. 그리고 1913년에는 중국 상해(上海)로 활동무대를 옮겨 신채호(申采浩), 박은식(朴殷植), 신규식(申圭植), 김규식(金奎植), 문일평(文一平)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고 교포의 정치적·문화적 계몽활동을 주도하며 광복운동에 종사하였다. 1913년 9월에 부인 성씨(成氏)가 첫딸을 출산한 후 엿새 만에 산고로 타계했다는 비보를 듣고 노모의 비애를 위로하고자 귀국하여 충청도에 머물며 학문연구에 매진하였다. 양명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역사에서 정신적 요소를 강조하는 그의 학문관은 이때 기초가 이루어졌다.

   정인보는 귀국 후에 항상 검은색 한복과 모자, 검은색 안경과 고무신 차림으로 다녔다.. 이것은 부인을 애도하는 뜻뿐만 아니라, 나라 잃은 슬픔을 조복으로 나타내어 독립에 대한 염원이 변치 않았음을 보이고자 한 것이었다. 그 무렵 정인보는 국내에서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여러 차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1922년 4월부터 정인보는 연희전문학교의 초빙을 받아 조선문학론과 한문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1926년에 순종이 죽었을 때는 유릉지문(裕陵誌文) 찬술의 일을 맡아보았다. 그리고 1927년에는 중앙불교전문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 등에서 국학 및 동양사를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 얼을 환기시키는 한편 <동아일보>, <시대일보>의 논설위원으로서 날카로운 필봉을 휘두르며 민족사관 정립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일본인들의 왜곡된 학설에 철저히 반론을 제기함은 물론 우리 고대사의 심층연구를 위해 안재홍(安在鴻), 신채호(申采浩), 문일평(文一平), 손진태(孫晋泰) 등과도 힘을 합쳤다.

   1931년 이후에는 동아일보에《조선고전해설》(1931), 《양명학연론(陽明學縯論)》(1933), 《오천년간 조선의 얼》(1935) 등을 연재하여 한국사에 대한 관심과 자긍심을 환기시키고 주체적인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1935년에는 정약용 서거 100주년을 계기로 안재홍(安在鴻) 등과 함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교열 ·간행하는 등 조선학운동을 주도하였고, 조선 후기 실학연구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1936년에는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어 한문학·국사학·국문학 등 국학 전반에 걸친 강좌를 담당하였다.

  1940년 10월에는 중앙중학교의 노국환(盧國煥), 조성훈(趙成勳), 황종갑(黃鍾甲), 이기을(李氣乙), 유영하(柳永夏) 등이 중심이 되어 소위 ‘5인 독서회’가 조직되었다. ‘5인 독서회’에서는 정인보(鄭寅普), 김성수(金性洙), 송진우(宋鎭禹) 등으로부터 역사연구를 명분으로 국제정세와 조국독립에 관한 강의를 듣는 등 독서회 운동을 진행하였는데, 활동이 한창 진행되던 당시 황종갑의 편지가 일제의 검열에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 정인보(鄭寅普) 선생도 적지 않은 고초를 당했다.

  1941년에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제는 내선일체(內鮮一體)정책에 따라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국학에 대한 탄압을 거세게 하는가 하면, 조선어강좌를 폐지했다. 그러자 정인보 선생은 견딜 수 없는 모욕감 속에서 “얼은 암흑 속에 사라지는가. 이제 어디에서 우리의 얼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가증하다”고 말하며 더 이상 교편을 잡을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38년에 연희전문을 사임하고 국학 연구에 전념했다. 그 무렵 수많은 학자ㆍ언론인ㆍ작가 등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훼절하고, 위당 정인보에게도 위협과 회유의 손길이 닿자 홀연히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에 은거했다. 그러다가 1943년에는 가솔을 이끌고 전라북도 익산군 황화면 중기리 산중으로 거주지를 옮겨 은둔 생활을 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그는 곧 서울로 상경하여 임시정부 요인들의 환국을 앞두고 <봉영사>와 <순국선열 추념사>, <광복열사의 영령 앞에> 등을 지어 순국선열과 생존 독립지사들의 노고를 기렸다. 하나 같이 겨레의 ‘얼’ 이 깃든 명문이다. 그리고 일제의 포악한 민족말살정책으로 침체되었던 국학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교육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그는 민족사를 모르는 국민에게 바른 국사를 알리고자 1946년 9월『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를 간행하였다.

  위당 정인보 선생은 단재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학의 전통을 이어 조선사를 연구했으나   독립투쟁의 방도로서 민족사 연구를 지향하던 신채호의 민족사학과 달리, 엄밀한 사료적 추적에 의한 사실 인식과 그에 대한 민족사적 의미의 부각을 의도하는 신민족주의 사학의 입장에서 조선사를 연구했다.

  그는 해방 후에 남조선 민주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으나 곧 탈퇴했다. 그리고 새나라의 건설은 민족의 ‘얼’ 이 깃든 대학이 있어야 한다고 인식하고 동지들과 국학대학을 설립하고 1947년에 초대 학장에 취임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수립 후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李承晩)의 간곡한 청으로 초대 감찰위원장이 되었다. 그런데 이듬해인 1949년 4월에 장관 임영신(任永信)이 관련된 독직사건의 처리를 두고 이승만 대통령과 마찰을 빚자 사직하고 다시 국학대학장에 돌아온 선생은 더욱 우리 얼을 밝혀내는 데 정진했다. 국학대학장을 그만 둔 뒤에는 서울 회현동에서 역사연구와 집필생활에 몰두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의 불법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위당 정인보 선생은 1950년 7월 31일 서울을 점령한 북한공산군에 의해 강제로 납북되어 개성으로 가던 중 낙오되었다. 다행히도 아사직전에 구출되었으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해 1950년 10월 24일 58세를 일기로 병사해 현재 평양 애국열사능에 안장돼 있다.

  위당은 타고난 성품이 올곧고 매서워서 허위와 가식을 싫어하였다. 민족사학정신을 이어받은 단재 신채호가 여순감옥에서 옥사한 소식을 듣고 추도하는 글을 짓고, 육당 최남선이 만주괴뢰국의 건국대학 교수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집 대문 앞에 냉수를 떠놓고 곡(哭) 하였다. 그리고 시문과 사장(詞章)의 대가로 광복 후 전조선문필가협회의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고, 서예에 있어서도 일가를 이루었으며, 인각(印刻)에도 능하였다. 또한 한민족의 얼과 실심을 강조한 양명학 연구의 대가였으며, ‘국학(國學)’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고 한민족이 주체가 되는 역사체계 수립에 노력한 민족사학자였다.

  결론적으로 말해 위당 정인보 선생은 일평생 독립운동가ㆍ역사학자ㆍ언론인ㆍ시조작가ㆍ교수ㆍ산문작가ㆍ교육자ㆍ우리나라 최후의 양명학자 등으로 활동하면서 큰 업적을 남겼다. 특히 그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4대 국경절의 노랫말이 모두 그의 손으로 지어질 만큼 위당 정인보는 학문ㆍ애국정신ㆍ역사인식ㆍ지절ㆍ문장력 등에서 겨루는 자가 없을 만큼 독보적이었다.

  저서로는『조선고전해설』(1931),『양명학연론』(1933),『훈민정음해』(1938),『조선사연구』(서울신문사,1946),『담원국학산고(?園國學散藁)』(1955),『담원문록(?園文錄)』(1967),『양명학연론(陽明學硏論)』(1972)  등이 있고, 1983년에『담원 정인보 전집』이 발간되었다. 1990년 건국훈장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1. 이종훈,「정인보」,『역사인물』, 일신각, 1979.

   2. 이동영, <정인보의 생애와 문학적 업적>, 『도남학보』 17집, 1998.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아우내 단오축제』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54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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