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행촌 이암의 생애와 업적 글쓴이 localhi 날짜 2014.04.03 01:57
 

                                 행촌 이암의 생애와 업적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신상구   

   행촌 이암(李?, 1297~1364)은 고려 충렬왕 23년인 1297년에 경남 고성에서 부 이우(李瑀)와 모 함양 박씨 사이에서 고성이씨 9세손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성(固城). 초명은 군해(君?). 자는 고운(古雲), 호는 행촌(杏村)이다.

   고성이씨(철성이씨) 가문은 뛰어난 학자와 관리가 배출된 명문대가이다. 이암의 증조부 이진(李瑨)은 고종 때 문과에 합격하여 숭문원 학사를 역임했다. 조부 이존비(李尊庇)는 역시 과거에 급제하여 문한학사(文翰學士) 및 진현관(進賢官) 대제학(大提學) 등을 역임했다. 이암의 부친 이우(李瑀)는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않았으나 문음제도(門蔭制度)를 통해 경상도 김해, 강원도 회양 부사를 지냈고 철원군(鐵原君)에 봉해졌다. 

   행촌 이암은 어릴 때부터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그는 10세 때에 강화도 마니산 보제사(普濟寺)에 들어가 3년 동안 유가의 경전과 우리 고대사에 대한 기록을 탐독했다. 부모가 그리울 때면 마니산 꼭대기의 참성단에 올라 단군왕검의 역사의식을 가슴에 새기고 고려를 동방의 맑고 깨끗한 나라로 일신하겠다는 맹세를 하였다. 충선왕(忠宣王) 5년인 1313년 17세 때에 권한공(權漢功)과 최성지(崔誠之)를 지공거(知貢擧)로 하여 과거에 급제하였다. 충혜왕(忠惠王)을 호종하여 원나라로 갔으며 충혜왕이 즉위하자 함께 귀국하여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였다. 특히 인사 기구였던 지인방(知印房)에서 활동하며 충혜왕의 측근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충혜왕이 원나라로 소환되고 충숙왕이 즉위하자 상황은 급변하였다. 충혜왕의 폐행으로 지목된 이암은 장을 맞고 유배되었으며 아버지 이우도 이 때 낙향하였다. 충숙왕이 죽고 충혜왕이 복위하자 지신사(知申事)로 복직되었다가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승진하였으며 정당문학(政堂文學)·첨의평리(僉議評理)로 전임되었다. 왕이 무인 한용규(韓用規)를 전교부령(典校副令)으로 삼자 이암은 부당한 인사라고 극력 반대했으나 왕이 그대로 임명했다. 

   충목왕이 즉위하자 찬성사(贊成事)로 승진하였으며 충목왕 3년인 1347년에는 제학(提學) 정사도(鄭思度)와 함께 정방(政房)의 제조(提調)가 되었다. 환관 고용보(高龍普)가 임명 과정이 공정하지 못했다고 왕에게 아뢰어 이암을 밀성(密城 :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으로, 정사도를 광양(光陽 : 지금의 전라남도 광양시)으로 유배보냈다가 얼마 뒤에 사면하였다. 충목왕이 죽자 이암은 충정왕을 호종해 원나라에 갔는데, 충정왕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이암에게 명해 국사를 듣고 처리하게 했다. 귀국한 후 이암을 정방제조(政房提調)로 임명하고 추성수의동덕찬화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功臣)의 호를 하사했으며 또 찬성사로 삼았다가 좌승상(左丞相)으로 임명하였다. 그가 강에서 전함을 검열하고 돌아오는데, 무장을 하고 뒤따르는 기병이 서른 명이 넘었고 또한 기병 둘이 앞에서 인도하니 보는 사람들이 분수에 넘친다고 여겼다.

   공민왕이 등극하고 얼마 되지 않아 이암을 부원군에 봉했으나 사직을 간청하고 청평산(淸平山)으로 들어갔다가 왕의 부름을 받고 돌아와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다. 1361년 홍건적이 침략하자 이암은 서북면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가 되어 군사 2천을 거느리고 전방으로 가서 적군 4만 명을 격퇴시켰다. 박거사(朴居士)라는 자가 비술(秘術)로 적을 쳐부술 수 있다고 장담하며 사람들을 현혹시키기에 이암이 그를 체포해 수도로 압송했다. 얼마 후에 이암이 기력이 쇠해 군무를 행할 수 없다는 이유로 평장사(平章事) 이승경(李承慶)을 보내어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홍건적이 수도에 가까이 다가오자 왕을 호종해 경북 안동으로 피난했으며, 적이 평정되자 호종 일등공신으로 기록되고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으로 봉해졌으며 추성수의동덕찬화익조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翊祚功臣)의 호를 하사받았다.

   이암은 법도를 삼가 준수했고 청렴결백하여 사사로이 재물과 권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집안 살림살이에 신경을 쓰지 않고, 책 읽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이암은 어려서부터 유학 서적뿐만 아니라 동서문화의 원류인 신교사서를 탐독하며 신교(神敎)의 삼신문화에 정통하여 신교사관을 정립했다. 첫 유배지인 강화도 행촌에서 3년을 보낼 때도 우주의 이치와 천문, 풍수, 지리 등에 관한 독서를 많이 했다. 그리고 유배지에서 1335년에 풀려나 천보산(天寶山) 태소암(太素庵)에서 1년간 머물 때 소전거사(素佺居士)로부터 인류 문명의 황금기였던 환단(환국-신시배달국-단군조선) 시대를 기록한 고서적들을 전수받았다.

   이암은 1363년 67세에 사직에서 물러난 후 강화도로 건너가 선행리 흥행촌에 해운당(海雲堂)을 지어 기거하면서 소전거사로부터 전수받은 고서적들을 근거로『단군세기』를 쓰고, 당시 소전과 나눈 이야기를 바탕으로 환단시대의 도학을 논한『태백진훈(太白眞訓)』을 지었다.

   한편 이암은 중국 원(元)나라 때 대사농(大司農)의 맹기(孟祺), 창사문(暢師文), 묘호겸(苗好謙) 등이 편찬한 최초의 관찬 농서인『농상집요(農桑輯要)』를 수입해 고려의 농업 발전에 기여했다. 그리고 이암은 글씨에 뛰어나 동국의 조자앙으로 불렸다.

   공민왕 13년인 1364년에 이암이 68세를 일기로 타계하자 공민왕은 그의 초상을 직접 그리고 행촌(杏村)이란 두 글자를 써서 관원을 통해 보내 제사를 지낼 정도로 안타까워 했다. 그리고 해당 관청에 명하여 예를 갖춰 성남에 장사지내게 하고 시호를 문정(文貞)이라고 하였다. 이암은『고려사』열전에 올랐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로 우왕 원년인 1374년에 충정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이암은 남양 홍씨 홍승서(洪承緖)의 딸과 결혼하여 4남 2녀를, 소실에게서 아들 한명을 두었다. 장남은 종부령(宗簿令)을 지낸 이인(李寅), 2남은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를 지낸 이숭(李崇), 3남은 상장군 이음(李陰), 4남은 밀직부사(密直副使) 이강(李岡)이다. 장녀는 김광병(金光丙)에게, 차녀는 조신(趙愼)에게 시집갔다. 소실의 아들 이목(李牧)은 낭장을 지냈다.

                                      <참고 문헌>

   1. 김용선 편, 「이암(李?) 묘지명(墓誌銘)」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

   2. 한영우,『행촌이암의 생애와 사상』, 일지사, 2002.11.20.

   3. 안경전,『환단고기』, 상생출판사, 2011.11.27.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아우내 단오축제』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55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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