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김광영 보살과 야산 이달의 만남 글쓴이 localhi 날짜 2014.06.19 00:33
                               김광영 보살과 야산 이달의 만남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신상구(辛相龜)

   일제강점기에 논산군 연산면 천호리에는 신통력이 있는 김광영(金光榮, 1883-1969년) 보살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는 평생 불사(佛事)를 하며 유·불·선은 물론 토착신앙까지 넘나드는 폭 넓은 삶을 살았다.

   그녀가 1930년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관음보살이 나타나 "본래 내가 셋이었다"며 "나머지 둘을 찾아 달라!"고 말했다. 김 보살이 땅 속에 묻혀있던 석불 2구를 찾아내 봉안하려 하자 천둥과 벼락이 일고 비와 우박이 쏟아지며 방해했다. 이때 다시 부처가 현몽하여 불가의 보물인 해인(海印)을 먼저 수습하라는 계시를 내렸다. 1933년 전북 완주의 김병소에게 해인을 받아 절 안에 봉안하고, 수습했던 불상 2구를 모시기에 이른다. 불상의 떨어져 나간 머리 부분은 천호산에서 벼락 맞은 돌로 만들어 붙였다. 1938년에는 3존불을 모신 법당을 준공했고 법당의 천장에 해인을 모신 뒤 조국광복을 위해 치성을 드렸다.

  김광영 보살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개태도광사(開泰道光寺)라는 이름으로 가람을 열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개태사 문 입구에는  ‘삼천일지개태사(三天一地開泰寺)’ 라는 글자가 현액되어 있었다. ‘삼천(三天)’이란 천호산과 그중에 가장 높은 천호봉, 그 아래 천호리라는 마을이 있음을 가리킨 것이고, ‘일지(一地)’란 마을의 한 곳에 절이 들어섰음을 의미한 것이다. 그 후 1947년에는 창운각을 세우고 단군을 봉안하여 정부 수립을 기원했다. 1950년 5월 5일에는 우주당을 신축하고 관성제군을 모셔 장차 일어날 6·25 전쟁에 대비했다.

  500여 년의 공백을 극복하고 다시 세워진 개태사는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 삼존석불이 있는 사찰이지만 단군과 관성제군을 봉안하고 중생들이 좋아하는 나반존자도 모셨다. 근세에 태동한 민족종교 혹은 신흥종교의 상당수가 개태사와 인연이 있음을 강조한다. 그래서 개태사는 부처의 넓은 품안에 다양한 믿음과 종교를 끌어안고 중생들을 위무하고 희망을 심어줬다고 볼 수 있다.

  해인은 본디 '부처의 슬기'를 일컫는 것으로 우주만물의 이치를 모두 깨닫는 것을 말한다. 깨달음이라는 게 풍랑이 없는 고요한 바다에 삼라만상이 비친 것과 같다는 비유다. 구한말 설법의 요체를 새긴 도장(해인)이 출현했다. 해인을 얻으면 인간 세상에 나오는 미륵불을 맞이할 수 있고 무슨 일이든 뜻대로 할 수 있다는 말이 떠돌았다. 혼란과 고통에 빠진 억조창생을 구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해인은 흥선 대원군을 거쳐 김병소라는 선비에게 전해졌는데, 그는 해인을 숨겨 대둔산 자락에 은거했다. 기이하게도 개태사의 김광영 보살의 꿈에 보살이 나타나 해인을 모시라고 계시했다. 김 보살은 부처의 예언에 따라 김병소를 찾아가 다짜고짜 해인을 달라고 했다. 김병소는 당초 해인이 불가(해인사)에서 나온 것이고, 개태사가 후천개벽의 중심이 될 거라고 여겨 순순히 이를 내주었다.

   김광영 보살은 해인으로 인해 근세 주역의 대가인 야산(也山) 이달(李達, 1889-1958년)과도 인연을 맺었다. 주역의 대가인 야산은 1889년 9월16일 경북 금릉군 구성면 상원리의 마드리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15세에 도를 닦기 시작하여 19세에 주역에 통달했다. 논산 출신 정역의 대가 일부(一夫)  김항(金恒, 1826-1898)과 더불어 쌍벽을 이뤘다.

  야산은 당시 논산시 수곡리 대둔산 자락 석정암에 은거한 채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때 김광영 보살이 야산을 찾아간 것이다. 그녀는 야산에게 "우리 절에 해인이라는 도장이 있는데 거기에 새겨진 글을 해독하는 이가 없으니 와서 보고 뜻을 좀 풀이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야산이 김광영 보살의 부탁을 받고 개태사에 가서 해인을 살펴본 즉 다음과 같이 16자가 새겨져 있었다.

                         聖夢化領(성몽화령)

                         성인의 꿈에 가장 긴요하게 변화하여

                         賢인梵光(현인범광)

                         어진 기운 가득 쌓여 불도의 창성함과

                         敎道天師(교도천사)

                         하늘의 도를 가르치는 스승과 같이

                         玖妙亦暎(구묘역영)

                         옥돌의 신묘한 이치의 조화가 또 다시 빛나도다.

   야산은 해인을 매개로 김 보살과 인연을 맺었고 이는 개태사의 단군 봉안으로 연결되었다. 개태사 단군전인 창운각(創運閣)은 1947년 야산의 시주로 세워졌다. '창운각(創運閣)'에서 창운은 '후천의 운을 개창한다'는 뜻이다.

  주역의 대가인 야산은 1947년은 선천(先天)이 끝나는 해이고 48년은 후천(後天)이 시작되는 해로 보았다. 주역에서는 비괘(否卦:??)를 선천의 모습으로, 태괘(泰卦:??)를 후천의 모습으로 비교 설명하고 있다.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으면 상하가 소통이 안돼서 비색하다는 비괘(否卦)의 뜻이요, 반대로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아래에 있으면 상하가 소통이 돼서 교통왕래한다는 태괘(泰卦)의 뜻이 된다. 군주는 하늘이요 백성은 땅으로 비유할 수 있으니, 군주제는 선천인 비괘(否卦)의 상이고, 민주제는 후천인 태괘(泰卦)의 상이라 하겠다. 단기 4281[서기1948]년은 대한민국이 세워진 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로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임을 천명하고 있다. 그래서 1947년 이전의 역사를 선천, 1948년 이후를 후천으로 정하는 것이다.

  대둔산과 계룡산의 중간에 위치한 개태사를 선천과 후천을 이어주는 곳으로 여겨 단군을 봉안했다. 대둔산을 거점해서 학업연마의 도량으로 삼았던 야산선생은 선천의 마지막 날에 산문을 폐하고 후천을 연다는 개태사에 가서 국조를 받들었다. 그리고 후천의 정기서린 계룡산 국사봉에서 거처하며 후천 사업을 도모했다. 대둔산과 계룡산을 이어주는 곳 연산에, 선천과 후천을 이어주는 곳 개태사에 국조 단군을 봉안한 것은 다름이 아니다. 단군시대가 다시 도래했음을 알리고, 국운의 융성함을 기원하기 위해서였다.

   본래 창운각은 절 입구에 들어서면서 오층석탑 뒤편, 극락대보전 우측에 위치하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8도임을 염두에 두고 8칸으로 건립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비록 소박하지만 당당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방 한 칸 외진 곳에 국조를 조화경인 천부경과 함께 모셨다. 그래서 오늘날의 창운각을 바라보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주인의 모습이 아니라 꼭 손님을 모신 것 같다. 게다가 개태사가 불교 도량이다 보니, 신도들이 국조 단군상보다 불상을 중시하고, 관리 보수도 국조 단군상을 봉안한 창운각보다 대웅전 위주로 하여, 지금 창운각은 허름한 고가를 연상하게 한다. 그리하여 개태사 단군전을 참배할 때마다 국조 단군을 대하는 우리 시대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참고 문헌>

  1. 이응국, “연산 개태사 단군봉안", 대전광역시청, <잇츠대전> 2013년 11월호,  pp.42~43.

  2. 김재근, "1930년대 멸실됐던 불상 찾아내 도량 중창", 대전일보, 2014.6.18일자. 14면.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아우내 단오축제』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등 57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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