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한암당 이유립 선생의 왕정복구단 사건의 전말 글쓴이 localhi 날짜 2014.06.14 00:27

                 한암당 이유립 선생의 왕정복구단 사건의 전말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신상구(辛相龜)

  북한 노동당은 해방 직후인 1946년 1월 31일부터 6월 말까지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국유화하고 고용노동자, 토지 없는 농민, 토지 적은 농민에게 무상분배했다. 그리고 노동당에 반대하는 인민들은 색출하여 가혹하게 인권 탄압을 했다. 그러자 북한 노동당의 정책에 불만을 가진 인민들은 고향을 등지고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탈출했다.  

   한안당(寒闇堂) 이유립(李裕?, 1907-1986) 선생도 북한 노동당의 정책에 불만이 많아 1948년 5월 평북 삭주(朔州)에서 서해안을 따라 홀로 월남하여 공주 마곡사 근처의 일갓집에서 잠시 몸을 의탁하고 살았다. 1949년 5월 1948년에 월남해 청주에 안착해 살고 있던 부인 신유경(申裕卿) 일명 신매녀(申梅女)를 조치원에서 만나 대전 중동 회상사 근처에서 이발소를 운영하던 일갓집 셋방으로 거주지를 옮겨 살림을 새로 차리고 살았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의 불법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벌어지자 금산과 계룡산과 안영리에서 피난살이를 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조인으로 한국전쟁이 끝나자 포격으로 반파된 대전 중동의 셋방으로 다시 돌아와 살았다.

   이승만 정부 시절 이유립 선생은 서울을 오가며 숙대 낙선재 귀속운동을 하고, 이씨 왕조를 보존하자는 주장을 펼치는가 하면, 중립화 통일론에 대한 기고를 하는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왕정주의자로 몰려 구금되었고, 중립화 통일론 필화사건으로 검찰에 송치되어 그 후 5년간 법정싸움을 했는데, 결국 무혐의로 처리되어 풀려났다.

   왕정복고단 사건은 당시 경향신문과 평화신문에 보도될 만큼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원래 왕정복고(입헌군주제) 운동은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선 1890년대에 우리나라 지식인 사회에서 논의되던 한 화두이다.

   이유립 선생은 부친 단해(檀海) 이관집(李觀楫)의 유언에 따라 해방된 조국에서 민주화 시대에 역행하는 왕정복고운동을 전개하다가 사회적 비난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대한민국 헌법에 민주주의에 의한 평화통일이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립화통일론을 들고 나와 위법행위를 함으로써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을 의심받기도 했다. 또한 세계화 추세를 민족주의 관점에서 부정적으로 보아 시대착오적 인식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이유립 선생은 해방된 조국이 적국인 일본에 볼모로 잡힌 영친왕 이은(李垠)을 구하지 않는 것은 국가의 체통으로써 수치스럽고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항변하며 왕정복고(입헌군주제) 운동을 전개하다가 당국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던 것이다.

  당시 경향신문과 평화신문 보도에 의하면, 한독당원 이유립(李裕?, 46세)과 청주대 상대학생 이양명(李容夏, 24세)은 1951년 8월 경 재일조련선전부(在日朝聯宣傳部)의 지령을 받아 이승만 자유당 정권을 몰아내고 새로운 정부를 세우기 위해 1951년 9월 초순 정치혁명민족협의회(政治革命民族協議會)라는 비밀조직을 만들고 불구레문화사란 간판을 내걸어 위장했다. 그 다음 그들은 재일본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씨를 국가 수령으로 모시기로 하고, 국호(國號)는 대달(大達) · 국가(國歌)는 신가(神歌) · 년호(年號)는 개벽(開闢) · 국화(國花)는 진달래로 정했다. 그리고 국기(國旗)는 현재 사용하는 국기에서 태극을 담흑색무극(淡黑色無極)으로 바꾸고, 흰빛 바탕을 누른 빛(黃) 바탕으로 바꾸는가 하면, 팔괘(八卦)를 없앤 형태의 국기를 사용하기로 정했다. 그런 다음 그들은 회원을 비밀리에 모집하는 한편 9월 20일에는 이은(李垠)씨에게 보내는 상주서(上奏書)를 작성하여 이용하(李容夏)로 하여금 경남 구포(龜浦)에 거주하는 윤황후(尹皇后)에게 전달하는 등의 허무맹랑한 짓을 하다가 중부서 사찰계원에게 적발되었다. 그리하여 한독당원 이유립(李裕?, 46세)을 중심으로 한 노동당원 노봉우(盧鳳愚, 40세), 청주대 상대 학생 이용하(李容夏, 24세), 통관업자 홍성도(洪性道, 29세), 사주업자인 이석영(李錫暎, 34세), 한독당 대전시책인 박헌철(朴憲喆, 38세) 등 소위 왕정복구당(王政復舊黨) 일당 8명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서울지검에 송치되어 윤운영(尹雲永) 검사의 수사를 받았다.   

   수사 결과 이들은 대부분 충청도 인물들로 왕정복구라는 고리타분한 슬로건을 내걸고 정부정복을 꿈꾸던 공산로선을 지향하는 조직체로 밝혀졌다. 그리고 그들이 내세운 행동강령을 보면, 외세 배격 · 남북 민족사상 통일 · 국토통일 등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지도자로 영친왕 이은씨를 내세우는 근본 원인은 현 이승만 정권이 민중의 신롸를 받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국제적 위신도 없어 신시천왕(神市天皇) 조국(肇國)의 유구한 인격자로 영친왕 이은씨를 봉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일본을 국제적 매개체로 해서 열강제국에 이를 납득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튼 1952년 7월 12일 경향신문에 보도되어 우리 사회에 많은 반향을 일으켰던 이유립 선생이 주도한 왕정복구당(王政復舊黨) 사건은 5년여의 긴 싸움 끝에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런데 그 후로도 몇 번의 송사를 1960년대 말까지 겪고, 정보 당국의 감시를 받게 되자, 더 이상 명분만으로는 정치 행위가 불가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정치행위로 인해 동지들이 희생당하는 상황을 피할 수 없어 남은 여생을 국사 바로 찾기에만 진력했다. 그 결과 이유립 선생은 고구려 패망 이후 1300여 년의 장구한 시간 동안 우리 한민족이 온갖 수난을 당하는 과정에서 상실된 민족의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을 회복하는 데에 다시 독립운동을 하듯 남은 여생을 바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한배달 민족사 연구와 교육에 매진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실제로 한암당 (寒闇堂) 이유립(李裕?) 선생은 2대에 걸쳐 항일독립운동을 하고, 일평생 민족사 연구에 정진하여『대배달민족사』5권을 발간하는가 하면, 전국에 5,000여 명의 제자들을 양성하고, 정통국사 광복운동을 전개하여 일제와 중국과 우리 스스로에 의해 왜곡된 우리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1987년에『대배달민족사(大倍達民族史)』5권을 발간하여『태백진훈』과『단군세기』저자인 이암(李?, 1297∼1364),『태백일사』저자인 이맥(李陌, 1455~1528), 이맥의 손자 이방(李滂), 단학회를 창립한 이기(李沂, 1848-1909),『환단고기』의 저자인 계연수(桂延壽, 1863-1920),『조선상고사』의 저자인 신채호(申采浩),『조선사연구』의 저자인 정인보(鄭寅普)로 이어져 온 한국선도의 맥을 잇고, 1983년에『환단고기』배달의숙본을 처음으로 공개해 역사학계를 놀라게 했는가 하면, 방송 출연과 신문 보도 및 강연을 통해『환단고기』를 일반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고 보급하는 데에 크게 공헌했다.

   그리고 강화도 마니산에 커발한 개천각을 세워 성역화하고 매년 2회 이상 제천행사를 하여 나라와 겨레 사랑의 전통을 수립했다.

   또한 그는『세계문명동원론』에서 세계문명이 서양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고 환국의 12분국 중의 하나인 슈메르국(須密爾國)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밝혀 한민족 모두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런가 하면 그는 우리 한민족의 고유한 사상과 얼인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로 요약되는 천부주의(天符主義) 인대천사상(人代天思想)은 환국의 밝사상에서 유래되었음을 밝혔다. 밝사상은 글자 그대로 광명(光明)의 철학 또는 선(善)의 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광명의 세계는 절대적이고 통일적인 이상세계 즉 대원일세계(大圓一世界)로 ‘커발한(居發桓)’이란 용어로 상징화되고 있다.

                                    <참고문헌>

  1. 김준보,『토지개혁론요강』, 삼일사, 1948.

  2. 이대근,「북한의 토지개혁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3. 양종현,『백년의 여정』, 상생출판사, 2009.11.18.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아우내 단오축제』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등 57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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