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잊을 수 없는 조선총독부 관리들의 만행 글쓴이 localhi 날짜 2014.08.16 00:43

                     잊을 수 없는 조선총독부 관리들의 만행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신상구(辛相龜)

  2014년 8월 15일은 광복 69주년이 되는 아주 뜻 깊은 날이다. TV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KBS 1 TV가 제69주년 광복절 특선 앙코르 방송으로 8월 15일 오후 15시부터 16시까지 1시간 동안 방영하는 “조선총독부 최후의 25일” 프로그램을 시청하게 되었다. 이 특별방송 프로그램은 재야 민족사학인 나의 관심과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 가치를 지닌 유익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제69주년 광복절 특선 앙코르 방송에 의하면, 조선총독부 관리들은 해방 직후 중요 문서 파괴, 화폐 남발, 문화재 불법 유출, 조선총독부 외곽조직인 세화회(世話會)의 부정부패, 민족주의자들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한반도를 떠나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미군정 관리들은 조선총독부 관리들이 정략적으로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는 것에 속아 민족주의자들을 멀리 하고 조선총독부의 고위 관료들을 미군정청의 고위직에 채용하여 통치함으로써 국토분단을 고착화시키고 일재의 잔재를 청산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어 한국의 정치와 사회와 경제 발전을 저해하였다.

  KBS 1TV의 ‘조선총독부 최후의 25일’ 방송에서 나의 가장 큰 관심과 흥미를 끌은 것은  조선총독부 외곽조직인 세화회(世話會)의 부정부패에 대한 내용이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에 와 있던 일본인들은 1945년 가을부터 철수하기 시작했다. 먼저 조선에서 돌아온 일본인들은 조선에 남은 일본인들의 고생을 덜기 위한 원호 단체로서 조선인양동포세화회(朝鮮引揚同胞世話會)를 만들었다. 1947년 철수가 일단락되자 세화회는 동화회(同和會)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52년엔 중앙일한협회로 다시 바꾸었다.

   그 당시 중앙일한협회의 중심인물은 호즈미 신로쿠로(穗積眞六郞)였다. 시부자와 에이지의 외손자인 그는 도쿄 제국대학 정치과를 나와 1924년에 조선 총독부에 들어갔다. 총독부 식산(殖産)국장을 끝으로 1941년에 퇴임하자 조선 상공회의소 회장을 거쳐 경성전기(京城電氣) 사장에 취임했다. 해방 뒤 그는 경성 일본인 세화회(世話會)의 회장으로 뽑혔다. 세화회는 일본인들의 권익(權益)을 대변하는 사실상의 행정 기구였다. 호즈미는 일본인들과 한국인 사이에 두루 안면이 넓고 인심을 잃지 않은 편이었으므로 이런 일에는 적합한 인물이었다. 

   경성 세화회의 간부들은 서울에 있던 일본 민간인 지도자들이었다. 조선전업사장(久保田豊) 경성대학총장(山家信次) 조선은행부총재(星野喜代治) 등등. 호즈미는 1946년 봄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의 일본 귀환은 서울에서 있었던「댄스 홀 사건」때문이었다. 미군 진주 직전 서울의 일본인들은 미군이 상륙하면 일본 부녀자들이 북한에서 소련군에게 당한 것처럼 무더기로 겁탈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미군들에게 섹스의 배출구를 마련해 주자는 아이디어가 거론됐다.

   이 때 광산으로 돈을 모은 한국인 김계조(일본식 이름 中村一夫)가 돈을 빌어주면 미군들을 위한 댄스홀을 만들겠다고 제의했다. 총독부 국장회의는 이 제의를 받아들여 일본인 민간인들에게 자금을 대주도록 명령했다. 호즈미는 60만 엔을 빌려주었다. 미군진주후에 미군 범죄수사대는 이 댄스홀을 미군을 상대로 한·일본의 첩보 기관으로 보고 조사를 했다. 총독부 경찰국장 니시하라와 재무국장 미즈다, 鑛工국장 시오다는 조사를 받고 풀려났으나 곧 일본으로 추방되었다. 호즈미는 재판에 넘어가 친일세력의 부식(扶植)과 유지를 꾀했다는 죄로 집행유예 2년의 선고를 받았고 일본으로의 퇴거를 명령받았다.

   그리고 해방 직후 일본인들이 고의적으로 조선은행권을 남발하고 물러가는 바람에 조선경제가 물가폭등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는 방송 내용이 나의 흥미와 관심을 많이 끌었다. 특히 나는 1980년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일사전공)에서「한국 인플레이션 연구」로 석사학위를 취득하여 남다른 감회를 느낄 수가 있었다. 나의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논문을 지도해 주셨던 전철환(全哲煥) 교수는 경제철학의 권위자로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조폐공사 사장, 한국은행 총재 등을 역임하고 66세를 일기로 일찍 타계해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적 화폐는 지난 1914년 일제치하 조선은행에서 발행한 100원 권. 이를 시작으로 1945년 해방 전까지 총 18종이 발행돼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중ㆍ일전쟁의 영향으로 만주 및 중국 본토에서도 통용됐다. 당초 조선은행권은 조선총독부 직영공장에서 주로 제조됐으나 일부는 일본 대장성 인쇄국에서 일본은행권과 함께 제조됐다.

   또한 일본인들은 조선의 수많은 문화재와 귀중품을 불법으로 약탈하고 반출하여 비밀 장소에 깊숙이 숨겨놓고 반환을 거부하여 한국인들의 반일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주요 문서를 파괴하고 돌아가는 바람에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정확하게 기록할 수가 없어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올해로 광복 69주년 기념일을 맞이했지만, 아직도 한?일 간에는 독도 영유권 문제 ? 일본군 위안부 문제 ? 역사 왜곡 문제, 문화재 반환 문제, 아베정권의 우경화 문제 등 해결해야 문제가 산적하여 한?일 간에 우호협력관계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 동북아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 국민 모두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만행을 잊지 말고 기억하며 항상 유비무환의 자세로 국가안보를 튼튼히 하여 다시는 외침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고 문헌>

     1. 辛相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 석사학위논문, 1980.2.

     2. 연합뉴스, <국내 화폐 발달사>, 2005.4.18.

     3. “조선총독부, 최후의 인터뷰(1)”.  趙甲濟 닷컴, 2014.8.15.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아우내 단오축제』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등 57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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