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중국 사마천(司馬遷)의 인간 승리 글쓴이 localhi 날짜 2014.08.08 17:27
                                                 중국 사마천(司馬遷)의 인간 승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칼럼니스트) 신상구(辛相龜)        
  『사기(史記)』의 저자인 사마천(司馬遷)은 전한 경제 때인 BC 145년경 중국 섬서성(陝西省) 용문(龍門 : 현재 韓城縣)시 하양(夏陽)에서 사마담(司馬談)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주의 사관을 지낸 사마 가문의 후손으로 아버지 사마담은 태사령, 즉 천체를 관측하여 역을 만들고 문헌이나 기록을 관리하는 직에 있었다. 사마담은 사관의 지위가 점차 기술직으로 천시되고 옛 기록이 사라져가는 것에 깊은 비애를 느끼고 사서편찬을 계획하고 있었다.
  사마천이 7세 때 아버지가 천문 역법과 도서를 관장하는 태사령(太史令)이 된 이후 무릉(武陵)에 거주하였다. 사마담은 아들 사마천에게 어린 시절부터 고전 문헌을 구해 읽도록 가르쳤다. 그리하여 사마천은 어릴 적부터 역사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으며, 그의 아버지에 의해 의도적으로 역사가로서의 소양을 키워갔다. 그는 이미 10대에 고문서에 통달했다. 사마천이 약 20세가 되던해 낭중(郎中 : 황제의 시종)이 되어 무제를 수행하여 강남(江南)·산둥(山東)·허난(河南) 등의 지방을 여행하였다.
   BC 111년에는 파촉(巴蜀)에 파견되었고, BC 110년에는 아버지가 사망하였다. 그 후 2년이 지나 무제의 태사령이 되었고 태산 봉선(封禪 : 흙을 쌓아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는 의식) 의식에 수행하여 장성 일대와 하북 ·요서 지방을 여행하였다. 이 여행에서 크게 견문을 넓혔고, 『사기(史記)』를 저술하는 데 필요한 귀중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기원 전 110년 아버지 사마담이 죽으면서 자신이 시작한 『사기(史記)』의 완성을 부탁하였고, 그 유지를 받들어 BC 108년 태사령이 되면서 황실 도서에서 자료 수집을 시작하였다. 그는 당시까지 남아 있던 시, 서, 춘추, 전국책 등과 궁중에 비장되어 있는 각종 서적, 상소문, 국가의 포고문 등을 섭렵하여 사기의 집필을 시작했다. 사마천은 공양학파인 동중서에게 수학하여 일관되게 춘추(春秋)를 역사서의 모범으로 삼았다.
    BC 104년(무제 태초 원년) 천문 역법의 전문가로서 태초력(太初曆)의 제정에 참여한 직후 『사기(史記)』 저술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그러던 중, 예기치 않은 재난이 닥쳐왔다. 흉노에게 패퇴한 명장 이릉을 단죄하는 무제 앞에서 모든 중신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사마천이 홀로 이릉을 변호하고 나선 것이다. 이릉은 5,000의 병사로 10만의 흉노 기병과 대적하여 흉노 1만을 살상하는 등 분투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포로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화가 난 무제는 사마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던 천하의 사마천이 옥에 갇혀 옥리만 보면 공포감에 죄어드는 비참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는 '용감하고 비겁하고 강하고 약한 것은 상황에 따라 좌우된다'는 손자의 말에 깊은 공감을 느끼고 옥중의 경험을 통해 인간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었다. 그 당시 사형을 면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50만 전의 막대한 벌금을 내거나 아니면 생식기를 제거하는 형벌인 궁형을 받는 것이었다. 살아가는 것도 넉넉지 못했던 사마천은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견디며 스스로 궁형을 선택했다 BC 99년 사마천의 나이 48세 되던 해 남자로서 가장 치욕스러운 궁형(宮刑 : 생식기를 제거하는 형벌)을 받았다.
  사마천은 옥중에서도 저술을 계속하였으며 BC 95년 황제의 신임을 회복하여 환관의 최고직인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중서령은 황제의 곁에서 문서를 다루는 직책이었다. 하지만 그는 환관(宦官)신분으로 일부 사대부들의 멸시를 받았으며 운신의 폭도 자유롭지 못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사마천은 마침내 『사기(史記)』를 기원전 91년경에 완성하였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본기(本紀), 표(表), 서(書), 세가(世家), 열전(列傳)의 5부로 구성되어 있다. 총 130권 중 열전이 70권을 차지하여 높은 비중을 보이고 있다. 기전체란 본기와 열전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사마천에 의해서 새로이 창안된 이 새로운 역사 서술 체제, 즉 기전체는 이후 중국 정사 서술의 모범이 되었다.
   본기(本紀)는 황제 이후 역대 제왕의 일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것이고, 세가(世家)는 제후나 그에 준하는 인물들의 전기이며, 열전(列傳)은 그 외의 주목할 만한 인간 군상에 대한 전기나 주변 민족들의 역사를 담았다. 표(表)는 유동하는 역사적 사실을 상호 연관시켜 일람하기 위한 바둑판식의 연표이며, 서(書)는 정치사에서 다루지 못한 사회 문화의 기초가 되는 역법, 천문, 법, 예법, 경제, 치수 등에 대한 제도사다. 또한 각 편의 말미에 '태사공왈'로 시작하는 사마천 자신의 주관적인 짧은 평론이 본문과 구별되어 실려 있다.
   『사기(史記)』의 규모는 본기(本紀) 12권, 연표(年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 모두 130권 52만 6천 5백자에 이른다. 사마천은 『사기(史記)』가 완성된 2년 후인 BC 89년에 사망하였다. 사마천은 자신이 저서를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불렀지만 후한시대에 들어와 『사기(史記)』라고 불리게 되었다.
   『사기(史記)』의 사료로서의 가치는 1,000년 전의 은대 계보가 갑골문자와 정확히 일치함으로써 입증되었다. 무엇보다도 『사기(史記)』가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며 각국어로 번역되어 널리 애독되고 있는 까닭은 유려하고 생동감 있는 문장 속에 왕에서 서민까지, 성자에서 악인까지, 역사의 주연에서 조연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인물들을 편견 없이 등장시켜 무수한 인간 군상의 인생역정을 깊이 있게 기전체(본기+열전)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마천은 투옥당한 패장을 양심과 정의에 따라 변호하다가 남근을 잘리는 치욕적인 궁형(宮刑)을 받고도 10년 동안 전심전력하여 중국의 대표적인 방대한 역사책인 『사기(史記)』를 써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규명해낸 멋진 사나이다.
   중국의 먼 과거로부터 무제 시대에 이르는 3000년의 방대한 역사를 52만6,500자로 압축해 정리한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역사서인 동시에 인간학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주변국까지 아우르는 중국 최초의 통사 사기로 참담하게 닥친 인간관계의 비극을 극복한 빛나는 정신의 승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 글자 한 글자를 피로 새긴 인류 최대의 지혜서라고 할 수 있다.
   사마천은 남성의 상징이며 자기 신체의 기둥인 성기를 잘리고서도 좌절하지 않고 『사기(史記)』를 저술해 역사 속에 진정한 기둥을 세운 멋진 사나이다.
   그리하여 인류는 사마천을 중국의 대표적인 역사학자로, 중국 역사학의 아버지로 기억하고 추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참고문헌>
    1. 사마천, 중국 역사의 아버지 - 최초의 통사 《사기》 완성(기원전 91년)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2012.3.23.
    2. “사마천”, naver 두산백과, 2014.8.8.
    3.  문정희, “난마 같은 삶에 명쾌한 답”, 경향신문, 2014.8.8.일자. 1면.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아우내 단오축제』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54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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