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해몽 전봉준 장군의 생애와 동학농민혁명 글쓴이 localhi 날짜 2014.11.01 21:54
                                             <동학농민혁명 120주년 기념 칼럼>
                                        해몽 전봉준 장군의 생애와 동학농민혁명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신상구(辛相龜)     
                                               1. 사회개혁의 지도원리 동학
  호남의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한 인물로는 전봉준(全琫準, 1855-1895), 손화중(孫和中, 1861-1895), 김개남(金開南, 1853-1895), 김덕명(金德明, 1845-1895) 등을 들 수 있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철종 6년인 1855년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의 천안전씨(天安全氏) 가문에서 출생했다.
  초명은 명숙(明淑). 호는 해몽(海夢)이다. 몸이 왜소하였기 때문에 흔히 녹두(綠豆)라 불렸고, 뒷날 녹두장군이란 별명이 생겼다. 출생지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있으나, 고부군 궁동면 양교리(宮洞面陽橋里: 지금의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아버지는 고부군 향교의 장의(掌議)를 지낸 전창혁(全彰爀 혹은 全承?)이다. 전창혁은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모진 곤장을 맞고 한 달 만에 죽음을 당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안정된 생업이 없이 약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였고 방술(方術)을 배웠다.
   태인 산외리 동곡(山外里東谷) 마을에 옮겨 자리잡았을 때에는 다섯 명의 가솔을 거느린 가장이었다.
   그는 스스로 선비로 자처하면서 세 마지기(三斗落)의 전답을 경작하는 소농(小農)이었으며, 이 무렵 농사일 외에 동네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는 훈장 일로 생계를 보태기도 하였다.
   고종 27인 1890년 경 35세 전후에 동학은 경천수심(敬天守心)의 도(道)로, 충효를 근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보국안민(輔國安民)하기 위하여 입교했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동학의 제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接主)로 임명되었다.
   그는 동학을 사회 개혁의 지도 원리로 인식하고 농민의 입장에서 동학교도와 농민을 결합시킴으로써 농민운동을 지도해 나갈 수 있었다.
   동힉농민혁명은 역사의 흐름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은 역사적 사건이고 현대에 계승해야 할 정신으로 평가받음에도 전봉준의 생애·운동·어록·최후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2. 전라도 동학농민혁명의 원인과 경과
   동학농민혁명은 부패한 지배층과 탐관오리를 벌하고, 신분제를 타파하고 토지를 균등히 나누는 사회 개혁을 실시하며, 일본 등 외세를 배격하여 백성을 위한 정부를 세우기 위해 일으켰다.
   농민 봉기의 불씨가 된 것은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서 비롯되었다. 조병갑은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의 서질(庶姪: 형제의 조카)로서 여러 주·군을 돌아다니며 가렴주구를 일삼아 농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1892년 고부 군수로 부임한 이래 농민들에게서 여러 가지 명목으로 과중한 세금과 재물을 빼앗는 등 탐학과 비행을 자행하였다.
  한재(旱災)가 들어도 면세해 주지 않고 도리어 국세의 3배나 징수하였고, 부농을 잡아다가 불효·음행·잡기·불목(不睦: 사이가 좋지 않음) 등의 죄명을 씌워 재물을 약탈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만석보(萬石洑)의 개수에 따른 탐학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다.
  1893년 12월 농민들은 동학접주 전봉준을 장두(狀頭: 여러 사람이 서명한 소장의 첫머리에 이름을 적는 사람)로 삼아 관아에 가서 조병갑에게 진정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쫓겨나고 말았다. 이에 그는 동지 20명을 규합하여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하고 거사할 것을 맹약, 드디어 이듬해인 1894년 정월 10일 1,0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하였다. 이것이 고부민란이다. 농민군이 고부 관아를 습격하자 조병갑은 전주로 도망, 고부읍을 점령한 농민군은 무기고를 파괴하여 무장하고 불법으로 빼앗겼던 세곡(稅穀)을 창고에서 꺼내 농민들에게 돌려 주었다.
   이 보고에 접한 정부는 조병갑 등 부패 무능한 관리를 처벌하고 새로 장흥 부사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삼고, 용안 현감 박원명(朴源明)을 고부 군수로 임명하여 사태를 조사, 수습하도록 하였다. 그 때에 자연발생적으로 고부민란에 참여하였던 농민들은 대개 집으로 돌아가고 전봉준의 주력부대는 백산(白山)으로 이동,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가 사태의 모든 책임을 동학교도들에게 돌려 체포와 분탕, 그리고 살해를 일삼는 등 악랄한 행동을 자행하자 이에 격분, 1894년 3월 하순 드디어 인근 각지의 동학접주에게 통문을 보내 보국안민을 위하여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따라 백산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의 수는 1만 명이 넘었으며, 여기에서 그는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되고 손화중·김개남(金開南)을 총관령(總管領)으로 삼아 보좌하게 하였다. 그는 4개 항의 행동강령을 내걸고 창의(倡義)의 뜻을 밝혔으며 또한 격문을 작성, 통문으로 각처에 보내어 농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요청하였다. 이로써, 민란은 전반적인 동학농민전쟁으로 전환되었다.
   1894년 4월 4일 그가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부안을 점령하고, 전주를 향하여 진격중 황토현(黃土峴)에서 영군(營軍)을 대파하고, 이어서 정읍·흥덕·고창을 석권하고 파죽지세로 무장에 진입, 이곳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여기에서 전봉준은 창의문을 발표하여 동학농민이 봉기하게 된 뜻을 재천명하였고, 4월 12일에서 4월 17일 사이에는 영광·함평·무안 일대에 진격하고, 4월 24일에는 드디어 장성을 출발, 4월 27일에는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한편, 이보다 앞서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은 정부에 외병차입(外兵借入)을 요청하였고, 결국 정부의 원병요청으로 청국군이 충청남도 아산만에 상륙하고 일본군도 톈진조약을 빙자하여 제물포(지금의 인천)에 들어왔다. 국가 운명이 위태로워지자 홍계훈의 선무(宣撫:흥분된 민심을 어루만져 가라앉힘)에 일단 응하기로 하고,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내놓았는데 이를 홍계훈이 받아들임으로써 양자 사이에는 5월 7일 이른바 전주화약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전라도 각 지방에는 집강소(執綱所)를 두어 폐정의 개혁을 위한 행정관청의 구실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청일전쟁(淸日戰爭, 1894.6-1895.4)이 일어나 사태는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마침내 9월 중순을 전후하여 동학농민군은 항일구국의 기치 아래 다시 봉기하였다. 여기에 전봉준 휘하의 10만여 명의 남접농민군과 최시형을 받들고 있던 손병희(孫秉熙)휘하의 10만 명의 북접농민군이 합세하여 논산에 집결하였다. 자신의 주력부대 1만여 명(전라도 농민군 4,000명, 충청도 농민군 6,000명)을 이끌고 공주를 공격하였으나 몇 차례의 전투를 거쳐 11월 초 우금치(牛金峙)싸움에서 대패하였고, 나머지 농민군도 금구(金溝)싸움을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정부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그 뒤 전라도 순천 및 황해·강원도에서 일부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으나 모두 진압되자 후퇴하여 금구·원평(院坪)을 거쳐 정읍에 피신하였다가 순창에서 지난날의 부하였던 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1894년 12월 28일(음력 12월 2일) 체포되었다. 그는 일본군에게 넘겨져 서울로 압송되고, 1895년 4월 23일(음력 3월 29일)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고종 33년인 1895년 4월 24일(음력 3월 30일) 새벽 2시에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3. 전봉준 장군의 자주와 평등 사상은 지금도 유효한 가치
   구한말 황실과 지배계층의 무능으로 인해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고, 해방 이후에도 전쟁과 분단, 권위주의적 독재로 이어지는 바람에 동학농민혁명은 ‘동학란’으로 폄하되었다.
  전봉준 장군은 구한말 세도정치와 민씨 일파의 학정, 향토 뿌리 조직까지 스며든 수탈과 부정부패, 원칙과 인륜이 무너지고 천박한 약육강식만이 남은 사회에서 마지막 남은 쌀 한 톨까지 빼앗기고 빚에 허덕여 어린 딸마저 유린당하는 민중의 피눈물 어린 삶을 목도하며 “이대로는 안 된다”는 사회개혁 사상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유학을 공부한 그는 자신의 민중 해방 정신에 동학 사상을 접목하며, 새로운 세상을 주창하기 위해 농민을 규합하여 무장 봉기을 일으켰던 것이다.
   전봉준 장군은 전라도와 충청도를 돌아다니며 세를 모으고 민심을 얻었다. 그가 가는 길마다 전국의 농민들이 모여들었다. 만인평등의 구호인 러시아의 ‘동무’는 레닌시대에 제창되었으나 전봉준과 동학농민들이 쓴 ‘접주’라는 호칭은 이보다 몇 십 년 앞섰다.
   순천에서 밀정꾼들에게 붙잡혀 일본군에 의해 서울로 압송된 후에도 전봉준은 정신과 기개를 잃지 않았고 어떠한 고문과 신문에도 굴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당당히 죽어갔다.  
   그의 사회개혁 정신은 ‘파랑새’ 등 구전가요로 계속 이어졌고, 현대 노동자 운동이나 학생 시위에서도 전봉준은 저항과 새로운 세계의 상징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녹두장군 전봉준의 자주와 평등 사상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1. 김덕룡 외,『녹두장군 전봉준』, 동학출판사, 1973.
   2. 김의환,『전봉준전기』, 정음사, 1974.
   3. 신복룡,『전봉준의 생애와 사상』, 양영각, 1982.
   4. 이이화,『전봉준 혁명의 기록(동학농민전쟁 120년, 녹두꽃 피다)』, 생각정원  2014.10.27.
   5. 이재성, “전봉준의 자주와 평등 가치는 오늘도 유효”, 한겨레신문, 2014.10.31일자. 21면.
   6. “전봉준(全琫準)”,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 Naver 지식백과, 2014.
11.1.        
   7. 김병일, “녹두장군 전봉준 꺽이지 않은 동학혁명정신”, 경향신문, 2014.11.1일자. 20면.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아우내 단오축제』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58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충남도지사상, 전국문화원연합회장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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