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유관순 열사의 그늘에 가려 외면당하는 항일독립투사 김구응 선생 글쓴이 localhi 날짜 2014.10.24 02:09
                     유관순 열사의 그늘에 가려 외면당하는 항일독립투사 김구응 선생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신상구(辛相龜)   
                              1. 유관순 열사, 일본도 가르치는데 한국은 외면
   2014년 10월 21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한선교 의원(용인병)에 따르면 일본 중학교 교과서 전체 7종 중 2종에서, 고등학교 일본 근현대사(일본사A) 교과서 7종 중 4종에서, 일본 통사(일본사B) 교과서 8종 중 2종에서, 그리고 세계 근현대사 9종 중 1종에서 유관순 열사에 대해 기록돼 있다.
  반면 국내 중학교 역사 교과서 9종 중 본문에 유관순 열사 내용이 수록된 교과서는 2종에 불과하며 고교 한국사 교과서 8종 중에는 단 1종에 그친 것으로 확인됐다.
  제국서원(Teikoku Shoin)에서 나온 일본 중학교 역사 교과서 193페이지에는 "서울여자학교에 재학 중에 3·1운동과 접한 유관순은 운동에 참가했지만 '조선독립만세'를 외쳤기 때문에 체포됐다. 옥중에서도 그 의지를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16세에 옥사했다"고 기술돼 있다.
  청수서원(Shimizu Shoin)에서 나온 중학교 역사 교과서 214페이지에는 "릴리프 중앙의 소녀(유관순)는 15세에 참가해서 후에 데모를 조직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붙잡혀서 1920년에 16세의 나이로 옥사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2. 유관순 열사 열웅 만들기에 희생된 항일독립투사들
   더 큰 문제는 유관순 열사를 영웅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유관순 열사를 지도해 1919년 4월 1일 아우내장터 항일독립만세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끈 독립투사들이 외면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유관순 열사와 함께 아우내장터 항일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유중무, 이백하, 조인원, 김구응 선생은 이제까지 조사연구가 잘 안 되고, 추모사업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역사의 뒤안길로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그래도 이백하 선생은 향토사학자인 신상구 박사의 희생적인 조사연구와 언론활동으로 최근 신문과 방송에 여러 차례 소개되어 뒤늦게나마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신상구 박사는 2008년 말에 <포암 이백하 선생의 생와 업적>이란 논문을 발표해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리고 이백하 선생이 기초한 <아우내장터 독립선언서>를 발굴해 YTN TV 방송과 KBS 대전방송국 라티오방송에 방영된 바 있으며, 중앙신문(동아일보, 문화일보, 경향신문, 서울일보)과 지방신문(대전일보, 충청일보, 충청투데이, 중도일보, 충청타임즈, 충북일보, 중앙매일, 대전투데이, 충청신문, 충청매일, 중부매일, 충남시사신문)에 보도된 바 있다. 또한 계간지인『충남예술』과 천안중 교지인 <천웅>에 이백하 선생의 생와와 업적을 소개한 소논문을 게재한 바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 유중무, 조인원, 김구응 선생은 조사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3. 항일독립투사 김구응 선생의 생애와 업적
                                    1) 장명학교와 진명학교 교사로 민족교육 실시
   항일독립투사 김구응(金球應) 선생은 1887년 7월 27일 충청남도 천안군 갈전면 가전리 99번지 백전(栢田) 마을의 안동김씨(安東金氏) 문중에서 부 김상목(金相睦)과 모 최정철(崔貞徹)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운 충무공 김시민(金時敏) 장군의 12세 손이다.
   그는 5세부터 한학을 수학하는 한편 신학문을 익혔다. 20세부터는 교육을 통해 문맹을 퇴치하는 것이 조국 독립의 첩경이라 인식하고 고향 동리에 청신의숙(靑新義塾)을 개설하고 신학문과 구학문을 직접 가르쳤다. 또한 그는 광복회 유창순(庾昌淳), 김상훈(金相訓) 등과  수시로 협의하여 독립의 필요성을 널리 알리고 농촌계몽운동에 전념했다.
   그 후 28세부터는 수신면 장산리 장명학교(長命學校) 교장인 일인 우에다(植田)) 밑에서 훈도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아우내장터 항일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조만형(趙萬衡)과 유관순 열사의 오라버니 유관옥(柳寬玉)을 제자로 가르치면서 항상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31세 때인 1918년부터는 병천면 병천리에서 미국인 구세실 신부가 경영하는 진명학교(進明學校)에서 훈도생활을 하다가 이듬 해인 1919년 4월 1일에 아우내장터 독립운동의 주역이 되었다. 
                            2) 병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주재소 앞에서 총살당함
   3.1독립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자 홍일선(洪鎰善)이 만세운동을 발의하였으며 김교선(金敎善)이 주도하여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29일 한동규(韓東奎)와 이순구(李旬求)에게 그 취지를 설명하고 동의를 얻었으며 한동규는 이백하(李栢夏)에게 함께 참여하도록 권유하여 찬동을 얻었다.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목격한 유관순은 3월 13일 귀향하여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조인원(趙仁元) 그리고 숙부 유중무(柳重武)에게 서울의 상황을 전하자 이들은 4월 1일 병천 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3월 31일 밤 자정에 병천 시장을 중심으로 천안 길목과 수신면 산마루 및 진천 고개마루에 거사를 알리는 봉화횃불을 올렸다. 야간을 이용해 예배당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였고, 천안쪽 길목은 조병호(趙炳鎬)가, 수신면 쪽은 조만형(趙萬衡)이, 충북 진천 쪽은 박봉래(朴鳳來)가 맡아 만세를 권유하기로 하였다.
   4월 1일이 되자 각지에 통하는 도로를 책임분담하고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홍일선과 김교선 등은 병천시장에 나가 만세시위의 참여를 권유하였다. 그리고 헌병주재소로 통하는 전화선을 절단하고 시위집회를 거행하였다. 오후 1시경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우고 포함 이백하 선생이 기초한 구국동지회 명의의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3천여명의 시위군중이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니, 아우내 장터는 만세소리로 가득찼다. 시위군중이 계속 독립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들고 일본 헌병주재소로 접근 하자, 시위군중의 기세에 놀란 일본 군경들이 주재소에서 기총을 난사하고, 또 천안에서 불러들인 헌병과 수비대까지 가세되어 무자비하게 총검을 휘둘러대며, 계속 발포하여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柳重權)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70-100명 이상이 부상하는 일대 참사가 일어났다.
   32세의 김구응 선생은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운영하던 진명학교 교사로서 지역 유지들과 젊은 청년, 학생들과 함께 참여해 유관순 열사와 함께 시위 군중의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목이 터저라 외치며 일본 헌병에게 적극적으로 항의하다가 일본 헌병이 쏜 흉탄에 맞아 순국했다. 그런데 일본 헌병들은 야만무도하게도 총을 맞고 쓰러진 김구응 열사의 두개골을 총 개머리판과 총검으로 박살냈다.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듣고 달려온 김구응 열사의 어머니 최정철(崔貞徹, 1853-1919세)이 아들의 시체를 안고 통곡하였다. 그러자 헌병은 그 늙은 어머니마저도 창과 칼로 찔러 죽이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3) 시신이 향리의 이목동산에 안장된 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짐  
   아우내장터 사람들은 장터 마당에 처참하게 버려진 김구응(金球應)-최정철(崔貞徹) 모자의 시체를 왜군 몰래 훔쳐내 눈에 안띄는 가전리 이목동산 응달계곡에 묻었다. 일제의 잔혹한 탄압에 쫒겨 김구응 열사 부인과 두 아들까지 행방불명됐고 집과 재산, 서적, 유품 등은 모두 불타 없어졌다.
   기미년 3.1만세운동 당시 16세 소녀 유관순이 병천에 내려와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것도, 3.1운동이 지역에 확산된 것도 아우내장터의 진명학교에서 민족교육을 통해 민족혼을 심어온 김구응 선생의 살신보국정신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일제 관헌은 그 사실을 알고 만세군중을 선두지휘하는 김구응 선생을 시위현장에서 사살했다.      
   김구응 선생은 아우내장터 항일독립만세시위 현장에서 최초의 희생자가 됐고 가장 핵심적인 주동인물로 활약했지만 활동지역이 시골이었기 때문에 이화학당 선후배 지식인들과 문교부 편수관으로 재직하고 있던 조카 유제한(柳濟漢 : 1988년 당시 대전시 중구 태평동 거주)을 배경에 둔 유관순 열사처럼 기록을 많이 남기지 못해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다.
   김구응 의사는 권숙자(權淑子) 여사와 결혼해 슬하에 3남(金泰魯, 金泰東, 金泰夏)을 두었다.
   봉분마저 납작하게 주저앉아버린 초라한 묘역엔 애국충절을 기리는 돌비석하나 없었고, 그를 조사연구하는 학자도 없었으며, 그의 넋을 달래려는 후손이나 관계 기관도 없어, 해마다 3.1절이 돌아오면 구천을 떠도는 고혼(孤魂)이 더욱 서글펐었다.
                                        4) 1991년에 건국훈장애족장 추서    
   아우내장터 4.1독립만세운동의 주역이신 김구응 선생의 공적이 유관순 열사의 그늘에 묻혀 조명돠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1989년 10월 12일 의사 김구응 선생과 자당 최정철 여사 두분의 영혼을 위로하며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날 숭고한 애국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순국선열 김구응선생 숭모회를 발기했다. 김구응선생 숭모회에서는 김구응 선생을 재조명하고, 해마다 추모제전을 거행하고 있다. 그리고 1989년 12월에는 국가보훈처 천안지청, 천원군, 순국선열 김구응 의사 숭모회(회장 김재홍)가 김구응 의사와 최정철 여사의 묘비를 세우고 제막했다. 묘비문은 김재홍(金在鴻)이 근찬하고, 이종호(李鍾鎬)가 근서했다. 그리고 한국정부가 김구응 선생이 건국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해 1977년에는 대통령표창을, 1991년에는 건국훈장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1. 閔丙達?李元杓 편저,『천안독립운동사』, 도서출판 한국문화, 1995.8.28. pp.188-205.
   2. 辛相龜, “항일독립운동가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문화원연합회,『제23회 전국 향토문화공모전 수상집』, 계문사, 2008.11.25. pp.345-403.
   3. 柳仁錫, “천원 아우내장터 김구응 열사”, 경향신문, 1988.3.1일자. 11면.
   4. 정을경, “ 김구응”, 디지털천안문화대전, 2013.
   5. 김석모, “유관순 열사, 일본도 가르치는데 한국은 외면”, 대전일보, 2014.10.22일자. 1면.
   6.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위키백과, 2014.10.22.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아우내 단오축제』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58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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