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두계 이병도의 두 얼굴 글쓴이 localhi 날짜 2014.02.10 21:38

                                 두계 이병도의 두 얼굴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신상구

                                1. 이병도의 생애와 업적

   두계(斗溪) 이병도(李丙燾, 1896∼1989)는 1896년 경기도 용인의 우봉이씨(牛峰李氏) 가문에서 충청도 수군절도사 봉구(鳳九)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고 서울로 올라와 중동학교(中東學校)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 법률학과에 입학해 3년 과정을 마치고 졸업했다. 이어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진학, 고등예과(高等豫科)를 거쳐 1919년 문학부 사학급사회학과(史學及社會學科)를 졸업했다. 당초 서양사를 전공할 생각이었으나 한국인으로서 한국사 연구의 필요성을 통감해,〈고구려 대수당전쟁(對隋唐戰爭)에 대한 연구〉를 졸업논문으로 제출했다. 그 때 교수인 요시다(吉田東伍)와 쓰다(津田左右吉)의 영향을 받았고, 이케우치(池內宏)로부터는 뒷날까지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

  대학 졸업 후 곧 귀국해 약 7년간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지리·역사 및 영어를 가르쳤다. 이 무렵 문학동인지 ≪폐허(廢墟)≫의 창간에도 동참했다. 뒤이어 조선사편수회 촉탁(1925∼1929),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1933∼1946),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1941∼1943)를 역임했다.

  그 동안 한국사의 연구를 계속해 많은 업적을 쌓았다. 주로 유학사(儒學史)·지리도참(地理圖讖) 및 고대사(古代史)에 치중한 연구를 대부분 ≪사학잡지(史學雜誌)≫를 비롯한 여러 일본 학술지에 발표했다.

  1934년 한국의 언어·문학·역사·민속·미술을 연구하는 한국인 학자들과 함께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창립했다. 그리고 ≪진단학보≫를 간행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이 때 발기인은 이윤재(李允宰)·조윤제(趙潤濟)·손진태(孫晉泰)·이상백(李相佰) 등이었다.

  ≪진단학보≫는 국문으로 된 최초의 본격적인 학술지로, 일제에 대한 학문적·문화적 저항의 뜻을 함축하고 있었다. 그 뒤 1943년 일제의 탄압으로 학회활동을 중단하기까지 14집을 간행했다.

  그래서 한국학 연구의 기틀을 마련하고 학문적 수준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학회창립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편집과 재정을 맡았다. 그리고 〈삼한문제(三韓問題)의 신고찰(新考察)〉을 비롯한 자신의 새로운 논문 거의 모두를 이 잡지에 발표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진단학회를 재건했다. 그리고 임시교원양성소를 설치, 국어와 국사분야 중등교원의 양성에 힘썼다. 1946년 서울대학교가 개교될 때 문리과대학과 사학과의 창설에 일익을 담당했다.

  또한, 교수에 임명되어 정년퇴임하기까지 16년 간 봉직하며 후진양성과 연구에 진력했다. 재직 동안 도서관장·박물관장 및 대학원장(1954∼1961)의 보직을 역임하였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국방부 전사편찬위원장에 피임되어 4년 간 복무했다.

  1952년 서울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1960년 4·19혁명으로 과도내각이 구성될 때 문교부장관에 취임한 바 있다. 또한 그 해에 학술원 회장에 피선되어 1981년까지 중임하면서 학술의 진흥발전에 공헌했다.

  1962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되었고, 그 뒤 한때 성균관대학교 교수로 초빙된 적도 있다. 민족문화추진회의 발족에 참여해 부회장과 이사를 거쳐 1982년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여기서 한국 고전(古典)의 국역과 편찬사업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 밖에 고등고시위원, 서울특별시시사편찬위원회 위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동아문화연구위원회 위원장, 교육헌장심사위원, 국토통일원 자문위원, 국정자문위원으로서 활동했다. 그리고 율곡기념사업회 이사장, 송산학원(松山學園) 이사장, 고려대학교 교우회장에 추대되기도 했다.

  한편, 일본·중국과 구미(歐美) 여러 나라의 학계를 시찰하였다. 특히, 미국역사학회 명예회원, 브라질학술원 명예회원에 피촉되었으며,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술·문화에 끼친 공적으로 1954년 금성무공훈장, 1955년 서울시문화상, 1956년 대한민국학술원상, 1962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977년 인촌문화상, 1979년 5·16민족상을 수상했다.

  1953년 진단학회가 재정비됨에 따라 이사장에 선임되었다. 그리고 1980년 두계학술상을 제정 후학들을 격려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평의원회 의장으로서 전후 50여 년 간 진단학회를 이끌고 키워왔다.

  연구와 저술활동으로서 먼저 ≪조선사대관(朝鮮史大觀)≫(1948)의 출간을 들 수 있다. 국사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는 가운데 저술된 이 책은 뒷날 ≪국사대관≫(1954)으로 증보되었는데, 충실한 내용을 갖춘 본격적인 개설서로서 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뒤에 진단학회가 편찬한 ≪한국사≫의 집필에 참여해 고대편(1959)과 중세편(1961)을 저술한 바 있다. 한편 지리도참에 대한 연구성과는 ≪고려시대의 연구≫(1948)로 정리 간행되어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했다.

  그리고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인 고대사 분야에서는 역사지리(歷史地理)로부터 국가의 기원과 사회제도로까지 연구영역을 확대했다. 그 성과를 모두 집성한 책이 바로 ≪한국고대사연구≫(1976)이다.

  또한, ≪삼국사기≫에 대한 역주작업을 진행해 ≪국역삼국사기≫(1977)를 펴내기도 했다. 일찍이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유학사에 관해서는 여러 논문을 발표하며 개설서의 저작을 준비해 등사본으로 ≪자료한국유학사초고(資料韓國儒學史草稿)≫(1957)로 펴냈다.

  이 책은 만년에 수정증보의 과정을 거쳐 ≪한국유학사략≫(1986)으로 공간했다. 그리고 한문으로 된 이 책의 국문판인 ≪한국유학사≫(1987)를 뒤이어 간행함으로써 그 연구를 마무리지었다.

  그 밖에도 ≪두계잡필≫(1956)을 비롯한 많은 저서가 있고, 평생 발표한 논문은 거의 100여 편에 이른다. 사학자로서 실증적·객관적 방법을 중시하는 실증사학(實證史學)을 뿌리내리게 함으로써 한국근대사학의 성립에 선구적 구실을 했다.

  그는 한국 민족과 문화에 깊은 애정과 함께 학문에 정성을 쏟음으로써 한국사의 체계화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또한, 구순(九旬)이 넘도록 이어진 꾸준한 연구와 엄격한 학풍은 많은 제자를 배출해내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이러한 그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진단학회에서는 두계학술상을 제정해 매년 수여하고 있다.

                 2. 두계 이병도가 한국사학계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 

  두계 이병도의 가장 큰 업적은 실증적·객관적 방법을 중시하는 실증사학(實證史學)을 뿌리내리게 함으로써 한국근대사학의 성립에 선구적 구실을 한 것이다. 그리고  1934년 한국의 언어·문학·역사·민속·미술을 연구하는 한국인 학자들인 이윤재(李允宰)·조윤제(趙潤濟)·손진태(孫晉泰)·이상백(李相佰) 등과 함께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창립하고, 국문으로 된 최초의 본격적인 학술지인 ≪진단학보≫를 14집까지 간행한 것이다. 또한 수제자로 재불사학자인 박병선 (朴炳善, 1928-2011) 박사를 두어 프랑스가 1866년 병인양요(고종 3) 때 약탈해간 도서인 ‘외규장각 의궤’를 반환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박병선 박사는 1972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 도서의 해 기념 도서 전시회’에서 <직지심체요절>이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보다 78년이나 앞서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자라는 사실을 입증함으로써 당시 세계의 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으며 <직지심체요절>이 1377년(고려 우왕 3)에 찍은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으로 국제적 공인을 받게 하고, <직지심체요절>을 2001년 9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는 데에 기여하여 직지의 대모로 불리우고 있다. 

                3. 두계 이병도가 한국사학계에 끼친 부정적인 영향

   이병도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가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반도중심의 식민사학을 정립하는 데에 기여해 민족사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고 있고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되었다.  

   그런데 해방 이후 이병도의 제자들이 한국사학계를 주도하는 바람에 이병도 식민사관의 뿌리가 <식민사가>들의 깊은 영향 하에 성장해 왔다는 사실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한다.

  두계 이병도는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사학(史學)의 길로 진로를 정한 뒤 일본 와세대 대학에 입학한다. 그러나 일본사의 권위자였던 요시다(吉田東伍) 박사의《일한고사단(日韓古史斷)》 책을 접하고 강의를 들은 뒤 국사를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바뀐다. 학사 1학년 때부터 가르침을 받은 <요시다> 박사는 일본 사학계에서 알려져 있는 석학이었으며 한국고대사 연구에도 영향력이 있는 학자로서 <이병도>를 비롯한 한국 유학생들에게 영향력이 컸고 그만큼 교분도 넓었다. 

  이병도 스스로 해방 이후 6~70년대 잡지 글에서까지 자신의 생애에 '가장 영향력을 많이 준 사람'으로 꼽고 있는 일인 식민사학자 요시다 박사는 일본이 한일합방 이전부터 식민사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고대사 연구에 선도적인 역할을 한 그는 이병도의 역사관 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병도는 요시다 이후 취임한 쓰다(津田左右吉) 박사 밑에서 강의를 받으면서 국사 연구의 뜻을 굳히게 된다.

  이병도가 국사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27년경 조선총독부 중추원 산하에 조직된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서 식민사가 이마니시(今西龍)의 수사관보라는 직함을 맡게 되면서부터였다. 와세다 일본 유학 시절 사학교수였던 이케우치(池內宏) 박사가 이병도를 추천하여 몇 해 동안 촉탁으로 근무하게 된 것이다. 일제하 한국사 연구에 종사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른바 대일본 제국의 이념에 투철한 황국사관의 학자였다. 이러한 학자들은 조선총독부의 지원 하에 경성제국대학이라든가 조선총독부 중추원 및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나 만철(滿鐵:남만주철도의 약칭)의 지원 아래 막대한 예산으로 식민지화를 위한 조사 사업을 진행하던 만철조사부에서 연구하고 있었다.

  이름난 교수들은 어느 직장에 있거나 간에 앞에 열거한 연구기관의 고문 또는 촉탁으로 임명되는 것이 관례였다. 그들은 일본사학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제국대학 중심의 관학파들이었다. 식민사관에 깊이 공감하던 이병도가 조선사편수회의 촉탁으로 임명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조선사편수회'에서 그가 인연을 갖게 된 사람은 일본의 사학자인 이마니시 박사와 아나바(稻葉) 박사 그리고 편수회 고문으로 있었던 구로이타(黑板勝美) 박사 등이었는데 이병도는 그들과 직접 접촉하면서 국사 연구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참가인물의 특성은 조선사의 편찬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구로이타(黑板勝美)* 이나바(稻葉岩吉)*이마니시(今西龍)의 한국사 인식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다. 편수회 참가자들을 유형별로 살펴보면 총독부 관리, 총독부 직원 및 촉탁으로 근무하였던 한국인, 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신진 사학자들이었다.

  <이병도>는 초기에 촉탁으로 근무하다가 이마니시의 수사관보로 승격한 것으로 보아 그의 지위와 영향력, 편수회에서의 기여도를 충분히 짐작케 해주고 있다. 이마니시의 수사관보 역할을 하면서 그의 연구 과정에 결합하여 초기 역사를 몽땅 잘라버린 《조선사》 제1,2편(통일신라시대), 3편(고려시대) 편집 등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일제의 식민사관 수립 사업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된다. 결국 《조선사》 편찬의 목적은 민족주의에 입각하여 《한국통사》를 발간한 <박은식>의 역사 서적이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자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차단하고 조선 지배를 원활히 하기 위해 '문명인'에 걸 맞는 문화적 지배를 통해 장기적인 식민화를 이루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1. 네이버 두산백과

   2. 네이버 위키백과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아우내 단오축제』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55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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