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늑천 송명흠의 삶과 문학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4.11.07 05:07


                                                                              늑천 송명흠의 삶과 문학


   지난달 대청호오백리길을 산책하면 서 기호학파의 적통을 이은 선비 중의 선비 늑천 송명흠의 대표적인 한시 ‘관 차어’의 배경이 대전시 동구 추동이라 는 것을 알았다. 이를 계기로 그동안 우리 지역 늑천에 대한 답사를 종합하여 그의 삶과 문학세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늑천의 생애와 학문

   송명흠(宋明欽, 1705~1768)의 자는 회가(晦可), 호는 늑천(櫟泉),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동 춘당 송준길의 현손이며, 조대비로 일 컬어지는 신정왕후의 외조부이다. 

  늑천은 1705 년(숙 종 31) 10 월 21일 한양 제생동에서 아버지 묵옹 송요좌와 윤부의 딸 파평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송명흠은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공부하였으나 재주가 뛰어나 20세를 전 후하여 사림 학자들의 촉망을 받았다. 그러나 사화를 피하여 아버지를 따라 옥천으로 낙향하였고 다음 해 아버지 묵옹이 돌아가자 삼년상을 치르고 도곡과 송촌 등지로 이사해 살았다. 

  늑천의 학문적 기초는 동춘당으로 대표되는 가학이었고, 젊은 시절에 동생인 한정당 송문흠과 같이 도암 이재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한 기호학파의 적통을 이어받은 철저한 주자의 문 도였다.  

  학문 뛰어나 사림 촉망 받았으나 사화 피해 아버지 따라 옥천 이주 사도세자 인사문제로 직언했다가 삭탈관직당하고 시골서 유배생활 노론사대신의 한 사람인 영의정 김창집의 손자로 고종사촌이 되는 김성행, 미호 김원행과 자주 교류하였으며, 녹문 임성주와는 이종사촌 형제이면서 학문적 교류를 하는 사이였다. 그리고 자신의 학문을 완성하기 위하여 민우수, 송사능, 김양행, 신소, 이인상, 송명휘, 송환기 등과 교유하며 학문의 깊이를 더해 갔다. 늑천은 사단칠정 논쟁 과 더불어 조선 성리학의 2대 논쟁으로 꼽히는 당시의 호락논쟁에서 스승 도암의 영향으로 낙론학파의 중심이었다. 벼슬은 공릉 참봉, 세자시강원, 서연관, 집의, 동 부승지, 예조 참의 등의 벼슬을 주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다만 1 7 5 5 년 옥과 현감으로 취임하여 대흉년 때 백성 구제에 큰 공적을 쌓았다. 그리고 만년에 왕세자를 교육하는 찬선으로서 경연관을 겸임하였다. 이때 임금에게 논어를 강의하였으 나 시사 문제를 논하다가 영조의 비위에 거슬려 파직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살아있는 권력 영조가 그의 아들 사도세자를 죽이기로 작정하고, 관례에 따라 대신들과 이름난 학자들을 모아 이 문제를 상의할 때, 다른 사람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였으나 늑천은 영조의 면전에서 “폭군으로 만대에 지탄 받는 중국의 걸왕과 주왕도 자식을 죽이는 악행만은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어찌 전하께서 그 선례를 남기려고 하십니까?” 했다. 영조는 이 말을 듣고 격노해서 늑천을 내쫓았다가 그의 충심을 알고 “송가라는 자는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선비 중의 선비로구나” 하였다.  정조 때 복권, 이조판서로 추증돼 그가 사랑했던 옥천 용호리 마을 지금은 겨우 세 가구가 올망졸망 어부들의 삶 그린 詩 ‘관차어’엔 오늘날 대청호 추동 모습 담겨 자 연・사람에 대한 애정 드러나면서 너털웃음을 웃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에도 송명흠은 당시 가장 첨예한 사도세자 관련 인사 문제 등을 직언 하다가 삭탈관직하고 서인으로 내쳐서 시골로 방귀당했으며, 1768년 도곡에서 6 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정조 때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고, 문원의 시호를 받았으며 불천지 위와 사패지지의 영예를 얻었다. 

  늑천 송명흠의 저서로는 ‘늑천집’과 ‘늑천소 말조진’ 등이 있다. 

                                                        ◆ 용강서원, 보만정 검담서원 묘정 비, 그리고 늑천 묘소 

  금산의 용강서원은 1716년에 세워졌으며 송시열, 송준길, 유계. 김원행, 송명흠 등을 배향하고 있다. 용강서원은 김원행과 송명흠이 강학을 이곳에서 열어 이 지역 대표 서원으로 발전하였다. 이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45년 광복된 뒤 지역 유림의 노력으로 현재는 강당만 유지하고 있으며, 서원 앞에는 동악 이안눌이 노래한 적벽강 물줄기가 맑게 흐 르고 있다. 세종시 부강에는 동춘당 송준길이 강학 공간으로 이용하면서 학문을 연구하며 여생을 마치려고 했던 정자 보만정과 동춘당의 후학들이 그의 학문과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검담서원 묘정비가 있다. 보만정은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 폐할 때 없어졌다가 1920년대 초 다시 세웠다. 조선 후기에서 일제강점기로 넘어가는 시기의 건축 형태를 잘 나타내고 있어 건축사적으로 가치가 높지만, 지금은 맹지로 접근성이 떨어지고 보완 개선해야 할 점이 많다. 또 보만정 앞뜰 가운데에 서 있는 검담서원 묘정비는 1766년에 세워진 것으로 검담서원의 건립 내력과 송준길의 일생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어 역사 적으로 가치가 높다. 이 묘정비는 김원행이 글을 짓고, 서예로도 유명했던 늑천 송명흠이 썼다. 그런가 하면 본래 금산에 있던 늑천의 묘소는 1792년에 연기현 갈산리 현 세종시 부강면 갈산1리 원텃말 뒷산 언덕으로 이장하여 이곳에서 묘갈을 세우고 관리해 오고 있다. 

                                                                            ◆ 옥천 용호리 ‘용호산수기’

  늑천 송명흠이 옥천에 낙향해 살면서 옥천의 용호촌과 그 주변 산수를 유람하고 1722년에 지은 것이 ‘용호산수기’이다. 이 유람기에는 “사람들은 모두 옥천이 좋다고 한다”부터 시작하여 용호가 산들에 둘러싸여 있기는 하지만 그곳 산들이 모두 우뚝하고 수려하며 일부 봉우리는 특히 아름다워서 바라보면 날개를 편듯 높이 솟아 있음에 감탄하고 있다. 또 늑천은 “용호는 좋은 터의 공통된 아름다움이 있어서 용호에다 괜히 덧붙여 기록하기에는 마 땅치 않다.”라고 할 정도로 용호의 풍광과 삶에 만족하고 있다. 이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그 당시에는 민가 50여호가 용호촌을 이루었고 한다. ‘용호산수기’는 “상류에는 물이 얕고 물살이 빨라 여울이 된 곳이 있는데 그 여울의 원류는 넘실대는 용추이고, 사람들은 그 안에 용이 서려 있어서 기우제를 지내면 응험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한다. 용호의 이름은 이 때문에 얻은 것이고 촌락 역시 이 이름을 얻었다”라고 용호의 유래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늑천은 많은 사람뿐만 아니라 이곳에 사는 사람들도 진정한 용호의 좋음을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이곳이 “지금 오히려 천 길이나 되는 노송이 홀로 우뚝 서서 풍상에도 그 절개를 바꾸지 않으니 내가 장차 이를 어루만지며 이리저리 오가면서 영원토록 용호가 좋다고 여기리라.”라며 혼자 무릉도원과 같은 좋음을 다 누리고 싶다는 마음을 드러냈다. 늑천이 이렇게 사랑했던 옥천의 용호리 가는 길은 아직도 비포장이 많은 임도로 굽이굽이 험준한 산을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용호 8경’이 말해주듯 산과 강이 어우러진 멋진 경관은 보는 사람들에게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렇지만 이런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그 옛날 50여 호의 마을은 10여 호의 집만 남아있고, 지금은 겨우 3가구만이 살면서 용호마을 명맥을 잇고 있다. 

                                                                          ◆ 대청호 추동 ‘관차어(觀叉魚)’ 

  늑천 송명흠은 김호연재가 아끼던 시댁 조카 중 한 사람으로 지금의 대전시 대덕구 송촌동으로 내려와 생활 할 때에, 1742년(영조 18년) 추곡(현 대 전시 동구 추동)에서 잠시 거처한 적이 있다. 그때 그 근방 강가에서 작살로 물고기를 잡는 정경을 목도하고 ‘관차어’라는 시를 지었다. ‘ 관차어’에 나오는 어부는 도락을 즐기는 ‘어부가계'의 어부와는 상반된 모습이다. 탐관오리들의 공납 강요로 살을 에는 추운 겨울에도 튼 손으로, 작살로 고기를 잡는 생존을 위한 절박함  사실적으로 드러냈다. “ 물고기 잡아다 바치라 한 달에도 너덧 차례/ 한번 바치는데 적기나 한 가요. 걸핏하면 스물 서른/ 정해진 마 릿수 채우지 못하면 장터에 나가 사다 바치고/혹시 잡다가 남으면 팔아서 양식에 보태지요./ 날이면 날마다 강에 나와서 손이 다 트지만/ 우리네 쓸쓸한 밥상에는 고기 꼬리 오르는 법 없답 니다.”- 송명흠, ‘관차어’ 일부, 임형택 번역 그러면서도 늑천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어부들이여, 그대 사정은 알겠으나 치어는 잡지마시라”라고 부탁한다. “물고기 생명을 돌아보자면 당신들 굶주림이 걱정이요/ 당신들 생계를 도모하자면 물고기 신세 애처롭 도다”라고 인간의 생존과 자연보호 사이에 놓인 모순점을 발견하지만 궁극에는 인간의 생존을 좀 더 중시한다. 그래서 시인은 슬기를 발휘하여 인간에게는 치어 남획 삼가를 경계하고 물 속 물고기들에게는 출입을 신중히 하라고 당부한다. 서민들의 삶을 피폐하게 하던 탐관 오리들이 많아 서민 어부들이 눈물 흘렸던 추동에 지금은 자연 수변공원과 습지공원을 조성하였다. 이제는 고기를 잡는 어부도 없지만, 이곳은 대청호 둘레길 아름다운 곳 5대 백미 중 하나로 평화롭고 멋진 곳으로 변모했다. 이 추동에 늑천 송명흠이 살아서 다시 온다면 뭐라고 할까? 

                                                                                       <참고문헌>

   1. 방경태, "한결같은 충심 노래하듯...세월 지났어도 여전한 풍경", 금강일보, 2024.11.5일자.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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