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석만 서울대 심리학과 명예교수
경조사비엔 과거 빚 갚는 것과
미래의 이익 위한 투자 의미도
인간관계는 끊임없이 변하며
그 본질은 ‘기브 앤드 테이크’
줄 때는 훗날의 보상 기대 말고
많이 주고 베푸는 게 행복한 삶
지난달에는 경조사에 참석할 일이 몰렸다. 지인의 자녀 결혼식에 세 번 참석하고, 인연이 깊었던 두 분의 장례식에 조문해야 했다. 결혼식은 축하할 일이고 장례식은 위로할 일이라 빈손으로 갈 수 없어 경조사비를 챙겨야 했다. 혼주나 망자와의 관계를 생각하며 경조사비 봉투에 얼마를 넣어야 할지 망설였다. 경조사비 액수를 결정하는 데는 혼주든 망자든 그들과 맺은 인간관계의 계산서가 반영된다.
사소한 것일 수 있는 경조사비 액수가 때로는 인간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기대에 비해 적은 경조사비를 전한 사람에게 실망하거나 심지어 배신감을 느껴 관계를 멀리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영향력 있는 중요한 사람의 경조사에는 반드시 참석하여 확실하게 눈도장을 찍고 봉투에 섭섭해 하지 않을 액수의 경조사비를 넣어야 한다. 경조사비에는 과거에 진 빚을 갚는 의미도 있지만, 미래의 이익을 위한 투자의 의도도 담겨 있다.
인간관계는 사랑과 우정을 나누는 행복의 원천인 동시에 갈등과 불화의 근원이기도 하다. 인간관계는 가만히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변한다. 오랜 친구에게 실망하여 멀어지기도 하고, 새로운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며 친해지기도 한다. 인간관계의 변화 과정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심리학 이론 중 하나가 사회교환이론(social exchange theory)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관계의 본질은 교환이다. ‘기브 앤드 테이크(Give & Take)’, 즉 여러 가지 자원을 주고받는 거래(去來)인 것이다.
가는 것보다 오는 것이 많으면 관계가 만족스럽지만, 가는 만큼 오지 않으면 실망한다. 인간관계의 계산서가 흑자일 때는 만족하지만, 적자일 때는 불만을 느끼는 것이다. 인간관계에는 ‘기대’와 같은 여러 가지 요인이 관여하기 때문에 더욱 복잡해진다. 가는 것보다 오는 것이 많더라도,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실망한다. 고가의 선물을 기대했던 사람은 평범한 선물을 받으면 실망한다. “애걔걔, 요게 뭐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또한, 현재의 관계에 만족하더라도, 더 큰 만족이 예상되는 사람이 나타나면 새로운 관계로 옮겨간다. 친구 관계도, 연인 관계도 그러하다. 더 멋있고 더 친절하고 돈도 더 잘 쓰는 사람이 접근하면, 관심과 호감이 그에게로 옮겨간다. 유명인들의 부부관계가 불안정한 이유 중 하나는 주변에 매력적인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늘 접하는 배우자의 매력은 둔감화로 인해 감소하는 반면, 전혀 색다른 매력을 지닌 이성을 만나면 가슴이 뛰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인간관계에서 주고받는 것을 계산한다. 인간관계의 갈등이 생기는 주된 이유는 서로의 계산서가 달라서이다.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준 것은 꼬박꼬박 기억하지만, 자신이 받은 것은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인간관계에서는 재물뿐만 아니라 애정, 돌봄, 정보, 사회적 지위와 같은 매우 다양한 자원이 교환된다. 부부관계에서 남편은 돈을 벌어다 주고, 아내는 애정과 돌봄을 제공한다. 이성 관계에서는 외모나 ******도 교환되는 자원에 속한다.
인간관계 계산서가 각기 다른 것은 돈을 제외한 다른 자원의 크기를 산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교환되는 자원의 중요성은 사람마다 다르다. 애정 결핍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돈보다 상대방의 따뜻한 말과 애정 표현이 더 소중하다. 반면에, 돈을 중시하는 사람은 애정 표현을 별 가치가 없는 것으로 평가절하한다. 어떤 관계든 서로의 계산서가 다르면 갈등이 발생한다. 우리는 평소에 인간관계 계산서를 솔직하게 공개하지 않는다. 그러나 갈등이 발생해 다툼이 생기면 비로소 계산서를 공개하게 된다. 부부 상담 장면에서, 남편과 아내는 모두 자신이 적자 인생을 참고 살았다며 불만을 토로하는 경우가 흔하다. “나는 이렇게 헌신했는데, 당신은 나에게 해준 게 뭐가 있냐”고.
노년기는 평생 맺어온 인간관계의 장부를 정리하는 시기다. 여러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주고받은 것을 결산하게 된다. 인간관계 결산서가 적자라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에 대한 섭섭함이 늘어난다. 과거에 많이 도와주었건만 연락도 없이 배은망덕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자신이 베푼 호의만 기억하고 받은 은혜를 망각하면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그러나 빈손으로 와서 이 나이까지 살 수 있도록 많은 사람으로부터 받은 도움과 은덕에 주목하면 조금은 마음이 넉넉해진다.
불교 금강경에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는 말이 있다. 준다는 생각 없이 베풀라는 뜻이다. 인간관계 장부에 기록하지 말고 주라는 것이다. 성경에도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구절이 있다. 줄 때는 훗날의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그냥 주는 것이 좋다.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 그러하다. 받을 것을 기대하고 주면 반드시 뒤탈이 생기기 때문이다. 자녀의 효도를 기대하고 재산을 물려주면 갈등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많은 사람의 칭송을 기대하며 기부금을 내면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 많이 받아서 갚아야 할 빚을 남기는 것보다 많이 주고 베푸는 것이 더 나은 인생이지 않을까? 모든 것을 남겨두고 빈손으로 떠나야 할 날이 다가오는 노년기에는 더욱 그러하지 않을까?
<참고문헌>
1. 권석만, "노년에 생각하는 삶의 계산서", 문화일보, 2024.11.1일자. 2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