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김창룡, 6.25전쟁에서 대한민국 지켰다
“이승만이 국방과 국법질서의 머리였다면, 김창룡은 손발 이었다. 반공의 선봉장, 타공(打共)의 영웅, 멸공의 일인자, 부정부패 척결의 선봉장인 김창룡 장군의 뇌리에는 군과 자유 대한민국, 그리고 국가를 이끌어 가는 이승만 대통령만이 존재했다. 1948년 10월 10일의 여순사건 직후부터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 사업이 없었다면, 6·25전쟁에서 자유대한민국은 지구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13일 오후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이승만포럼’에서 이대인 한국정보문화연구원장이 토로한 발표 내용이다.
이대인 한국정보문화연구원장은 이 날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발표한 ‘이승만과 김창룡’을 주제로 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하고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국방을 국가정책의 제1순위라는 신념으로 일관한 인물"이라며 이 박사를 “서독의 아데나워 수상, 일본의 기시 수상과 함께 지난 세기 세계사를 움직였던 3인의 한 사람”이라고 지칭했다.
그는 또, “리더십 전문가인 웨런 버니스가 지적하였듯이, 역사상 성공한 지도자들은 최악의 절망감을 겪은 뒤 삶에 대한 신념을 새롭게 하고, 꼭 필요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일에 모든 인생을 건다”며 이승만과 김창룡이 그러한 경우라고 주장했다.
특히, 이 원장은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할 수 있도록 손발이 되어준 사람이 ‘대한민국특무대장 김창룡’이라며 그의 사상과 업적을 조명했다.
이 원장은 김창룡에 대해 “6·25전쟁 기간과 휴전 후에 이승만 정권을 넘보던 군내부의 세 차례 쿠데타 시도를 막고 두 차례의 대통령 암살 기도를 차단했다”며 김창룡의 공적을 “2차대전 후 건국된 다수의 신생국들이 군부 쿠데타와 부정부패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사실에 비추어 보면 더욱 더 가치가 있어 보인다”고 표명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는 김창룡 장군에 대해 ‘자신의 영달을 꾀하는 폭군, 이승만 독재의 사병, 정치의 시녀, 친일파, 김구 선생 암살의 배후 인물’로 왜곡되고 있다며 안타까워 하면서 사실이 아님을 강조했다.
이 원장은 김창룡 장군의 출생과 관동군 특무대 발탁 후 활약 상, 2차례의 사형수 신세, 탈출 월남, 군 입대와 숙군과정 등을 소개 하면서 “그가 벌인 활약 중 6·25직전까지 이루어진 남한내의 숙군작업은 군사 전문가들도 그로 인해 6.25전쟁 중 UN군 투입이 가능했다고 평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김창룡 장군은 6·25전쟁 발생부터 1956년 1월 30일, 저격을 받아 사망하기까지 "이승만 대통령 저격범 유시태 사건 처리, 군부의 세 차례 쿠데타 시도·부정부패 척결, 부산 정치파동과 군부 쿠데타 모의 수습 등으로 당시 대한민국 체제 전복 예방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며 김창룡 장군의 일생이 국민들에게 왜곡되지 않고 올바르게 전달 되어 그의 넋이 참된 가치로 위로 되기를 염원했다.(Konas)
<참고문헌>
1. 이영찬, "이승만과 김창룡, 6.25전쟁에서 대한민국 지켰다", Konas, 2011.7.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