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결단 미룬 채 변죽만, 효종·송시열의 북벌론 공조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4.05.19 10:57

             결단 미룬 채 변죽만, 효종·송시열의 북벌론 공조


                                 효종의 영릉과 송시열의 강한사

김정탁 노장사상가

김정탁 노장사상가

여주에 가면 세종의 영릉(英陵)과 효종의 영릉(寧陵)이 함께 있어 합쳐 부르면 영녕능인데 대개 영릉이라고만 알려져 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세종의 영릉만 들리고 효종의 영릉을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효종은 재임 내내 북벌을 기치로 내세웠기에 세종에는 미치지 못해도 조선의 왕 중에선 존재감이 있는 편이다. 벌(伐)은 천자가 난적을 토벌하는 행위인데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해 청나라 오랑캐를 치려 했으니 대단한 도전이 아닌가.

이런 대단한 도전인데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당시 조선은 청을 칠만한 국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해서다. 북벌을 위해 준비한 병력이 고작 1만여 명인데 이 병력으로 청을 치는 건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당시 청은 국력이 욱일승천할 때라 북벌이 실제로 이루어졌으면 조선이란 나라를 제대로 보존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강희제-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지는 청의 150년 전성기가 효종 10년 때쯤부터 시작돼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한 청나라 영토확장의 희생물이 될 수 있어서다.

청 정벌, 달걀로 바위치기인데도
효종 “북벌” 기치, 송시열 불지펴

병자호란 참패 후 민심 무마책
구체적 실행안 없이 독대 논의도

송시열, 효종 정통성 문제삼기도
정조는 송시열 기리는 사당 건립

경기도 여주에 있는 효종의 영릉 전경. 인선왕후의 능을 효종의 능 아래에 조성해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이라는 독특한 형식을 이루고 있다. [사진 김정탁]

경기도 여주에 있는 효종의 영릉 전경. 인선왕후의 능을 효종의 능 아래에 조성해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이라는 독특한 형식을 이루고 있다. [사진 김정탁]

그런데도 북벌론이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으니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게 아닐까?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굴욕적으로 항복한 후 조선의 민심이 크게 흔들렸다. 20만~50만명에 달하는 백성이 포로로 끌려갔으니 당연한 귀결이다. 이런 민심을 진정시키고 병자호란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면하기 위해선 돌파구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북벌론이라 본다. 그렇다면 북벌론은 이반된 민심을 되돌리기 위해 동원된 선전 기제가 아닐까. 정치 세력 산당(山黨)의 영수 송시열도 이런 북벌론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주자 신봉자 송시열, 효종의 대군 시절 스승

1785년(정조 9년) 왕명에 의해 송시열(宋時烈)을 제향하기 위해 여주의 남한강변에 세웠다. 그해에 사액되었는데 이때는 송시열에 대한 존칭인 대로(大老)의 명칭을 붙여 ‘대로사’로 했다가 나중에 ‘강한사(江漢祠)’로 바뀌었다.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785년(정조 9년) 왕명에 의해 송시열(宋時烈)을 제향하기 위해 여주의 남한강변에 세웠다. 그해에 사액되었는데 이때는 송시열에 대한 존칭인 대로(大老)의 명칭을 붙여 ‘대로사’로 했다가 나중에 ‘강한사(江漢祠)’로 바뀌었다.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송시열은 효종의 봉림대군 시절 스승이었다. 당시 봉림대군이 왕이 되리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소현세자가 의문 속에 죽자 졸지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자 송시열은 신임 왕에게 기축봉사를 올려 “나라를 다스리는데 한 번 정하면 바꾸지 않아야 할 계책이 있는데 정치를 바르게 해 오랑캐를 물리치는 일입니다. 오랑캐 금나라는 우리와 한 하늘 아래서 살 수 없는 원수입니다”라고 말해 북벌론에 불을 지폈다. 봉사라는 상소 형식도 그렇고, 정치를 바르게 닦아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주장도 주희(朱熹)의 말에서 따왔으니 그는 철저한 주자 신봉자였다.

  송시열이 이런 식으로 북벌론에 불을 지폈어도 실제로 청을 정벌하겠다는 건 그의 속내가 아니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의 은혜를 잊어선 안 된다는 다분히 명분에 입각한 북벌론이었다. 또 청이 중원을 지배하는 현실을 바꾸진 못해도 중화 문명을 유일하게 계승한 조선의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는 의지에 따른 북벌론이었다. 이런 북벌론만이 광해군의 명·청 등거리외교에 반대해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 이데올로그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이렇게 북벌론을 내세우면서도 당장 실행에 옮기지 않는 이유로 송시열은 민생 안정을 들었다. 청과 전쟁을 벌이면 민생이 도탄에 빠지므로 북벌을 피해야 한다는 주장인데 진정성은 없어 보인다. 당시 대동법은 민생 안정을 위해 시급히 시행돼야 했음에도 산당 대부분이 반대해서다. 산당이 민생 안정을 정말로 바랐다면 대동법 시행에 누구보다 앞장서야 했음에도 이를 반대했으니 민생 안정이란 이유는 설득력이 떨어지는 게 아닌가.

  송시열은 정유봉사를 통해 결국 자신의 본심을 드러냈다. 정유봉사의 핵심은 북벌보다 양민에 힘쓰고, 사대부를 우대하는 왕도를 기르라는 거다. 또 북벌을 위해 군주로서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리는 수신형가(修身刑家)에 매진하라는 거다. 수신형가 다음에는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가 따라 나와 청을 치는 방안이 제시돼야 함에도 이에 대해선 언급이 없었다. 그러니 북벌은 사실상 그에게서 물 건너갔다. 수신형가 하나만으로 북벌의 책임을 다하겠다는 비난이 그 후 그에게 쏟아진 건 당연한 귀결이다.

  그렇다면 효종의 북벌론은 송시열의 북벌론과 과연 달랐을까? 글쎄다. 효종은 정통성 콤플렉스를 지닌 채 왕위에 올랐다. 소현세자가 청과 가깝다고 해 아버지 인조로부터 외면당하자 효종이 소현세자와 그 아들을 제치고 왕이 돼서다. 그러니 왕위 계승 상의 이런 한계를 극복하려면 효종에게 북벌이 가장 좋은 답이었다. 송시열의 산당도 자신들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 북벌을 전면에 내세웠다. 본거지 속리산 화양동에 만절필동(萬折必東)을 새기고, 명나라 제도와 풍습을 따라야 함을 강조한 집단이 산당이 아닌가. 그래서 효종도 북벌론으로 이들을 쉽게 유인할 수 있었다.

                                   효종 후궁 한 명만 두고 북벌 노심초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송시열 초상. 18~19세기 제작된 비단 채색화로 국보로 지정돼 있다. 89.7x67.6㎝.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송시열 초상. 18~19세기 제작된 비단 채색화로 국보로 지정돼 있다. 89.7x67.6㎝.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그런데 북벌을 현실에 옮기는 일이 간단치가 않다. 무엇보다 군사력을 키워야 하는데 당시 군정의 폐단이 커서 군사력 강화에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청은 조선의 움직임을 손금 보듯 들여다봐 군사력을 무턱대고 늘릴 수 없었다. 효종이 인선왕후 이외에 한 명의 후궁만을 둔 채 북벌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보여줘도 사람들은 제스처라 여겼다. 그렇다면 효종의 북벌론도 명분에 밀려서 꺼낸 정치적 구호가 아니겠는가.

  한편 송시열의 산당은 북벌론에선 효종과 호흡이 맞았어도 효종의 왕위 계승 상에 문제가 있음을 내심 지적하고 싶었다. 소현세자가 죽었어도 그의 아들들이 버젓이 살아 있어 봉림대군이 조카들을 제치고 왕위에 오르는 건 예법상 있을 수 없어서다. 특히 산당은 주자의 예법을 철저히 따랐기에 국가든 가정이든 장자·장손 세습을 우선으로 한다. 그 후에 벌어진 예송논쟁에서 송시열이 체이부정(體而不正), 즉 효종이 왕이어도 ‘둘째’ 아들로 후사를 계승했음을 굳이 지적한 것도 이 때문이다.

  효종은 재위 10년째 되는 해에 송시열과 독대했다. 이때 효종은 “청나라 정세가 심상치 않다. 정예 포병 10만을 길러서 거사하면 청 지배하의 한인(漢人)들이 호응할 것”이라고 전제한 뒤 앞으로 10년 동안의 준비 방안을 물었다. 이에 대해 송시열은 “수신이 요체이니 이를 토대로 국가 기강을 확립하고, 사대부 의지를 결집하면 민생이 안정되고 국부가 달성돼 군대가 양성될 것”이라는 하나마나 한 소리만 늘어났다. 독대는 이런 식으로 서로의 북벌 의지만 확인한 채 끝났는데 독대 후 얼마 되지 않아 효종이 사망하는 바람에 송시열은 북벌의 책임에서 홀가분해졌다.

                                     송시열, 효종 사후 독대 내용 공개

  한참 후이지만 독대 내용이 송시열에 의해 공개된 게 미심쩍다. 실속 없는 대책만 늘어놓아 송시열에게 득이 되지 않을 텐데 이를 공개해서다. 혹시 송시열은 북벌을 위해 애쓰는 효종의 모습을 부각해 정말로 북벌을 준비하는 군주로 꾸미려고 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명분상 내건 북벌론을 실제의 북벌론으로 바꾸기 위해 공모한 셈이다. 공자는 『논어』의 ‘자로’ 편에서 “군자는 명분을 바로 잡으면 반드시 말할 수 있고, 말하면 반드시 행할 수 있으므로 자신의 말에 구차스럽지 않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언행은 구차스럽지 않은가.

  효종의 영릉과 가까운 남한강 변에는 송시열을 추모하는 대로사(大老祠)가 있다. 지금은 강한사(江漢祠)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흥선대원군을 대로라 불러서 더 쓸 수 없어서다. 대로사가 여기에 세워진 건 정조가 영릉에 행차했다가 송시열이 여주에 머물 때마다 영릉을 바라보며 통곡하고, 후진들에게 북벌의 대의를 설파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사당 건립을 지시해서다. 그런데 영릉을 바라보며 행한 송시열의 충절이 과연 진심이었을까? 진심이었다면 효종을 향해 체이부정을 꺼내 든 건 또 어째서인가?

  정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땅의 정치인들도 예나 지금이나 고차원적 술수를 발휘하긴 매한가지다. 그래서 누가 옳은지 그른지 쉽게 판단할 수 없는데 사람들은 겉에 드러난 언행만으로 이들을 평가해 잘 속아 넘어간다. 지탄받아야 할 사람이 괜찮은 인물로, 괜찮은 사람이 지탄받는 사람으로 둔갑하는 것도 이러해서다. 영릉과 강한사 옆을 흐르는 남한강은 이 점을 잘 알 텐데 오늘도 말없이 흐른다.                                                              <참고문헌>                                                         1. 김정탁, "결단 미룬 채 변죽만, 효종·송시열의 북벌론 공조", 중앙일보, 2024.5.17일자.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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