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제주 4.3사건 76주년의 역사적 의의와 추념식 현황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시인, 문학평론가, 칼럼니스트, 향토사학자) 대산 신상구
1. 제주 4.3사건의 역사적 의의
제주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1947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서 경찰이 발포하여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이후 남로당이 주도한 총파업, 경찰·서북청년단의 검속·탄압, 남로당의 무장봉기, 계엄령선포 및 중산간 지역 초토화, 6·25전쟁으로 인한 예비검속 및 즉결처분 등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이 다수 희생되었다. 사건은 1954년에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막을 내렸다.
1980년대 이후 4·3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각계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00년 1월에「4·3특별법」(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공포되고, 이에 따라 8월 28일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설치되어 정부차원의 진상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2003년 10월 정부의 진상보고서(『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고, 대통령의 공식 사과 등이 이루어졌다. 이후 4·3평화공원 등이 조성되었다.
진상보고서에 의하면, 4·3사건의 인명 피해는 당시 제주도민 30만명 중 25,000∼30,000명으로 추정되고, 강경진압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9,285동이 소각되었다. 4·3사건진상조사위원회에 신고 접수된 희생자 및 유가족에 대한 심사를 마무리한 결과 2011년 1월 26일 현재 신고된 희생자 14,032명(남로당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는 1,764명)과 희생자에 대한 유족 31,255명이 결정됐다.
제주 4·3사건으로 인해 제주지역 공동체는 파괴되고 엄청난 물적 피해를 입었으며, 무엇보다 깊은 상처로 남아있는 참혹한 인명피해를 가져왔다. 4·3특별법 공포 이후 4·3사건으로 인한 갈등과 반목의 역사를 청산하고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21세기를 출발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제주도는 2005년 1월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되었다.
2. 제주 4·3사건 당시 활약한 군경 의인들 이야기
제주 4·3사건 당시 무고한 주민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선 의인들이 있다. 제주주둔 해병대 정보참모 김두찬 해군 중령은 1950년 8월30일 성산포경찰서에 예비검속자를 총살하고 결과를 보고하라고 공문을 보냈다. 하지만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은 무고한 주민을 죽이는 것이 부당하다고 느꼈다. 해당 공문에 ‘부당함으로 미이행’이라고 쓴 후 명령을 거부했다. 덕분에 강순주 씨를 포함해 200여명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문형순 서장은 성산포서장으로 부임하기 전인 1949년 모슬포 경찰서장으로 근무할 때도 주민 100여명을 훈방했다.
강순주 씨는 “계엄이 선포된 시절 본인의 목숨이 위험할 수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우리의 목숨을 구해주셨다”면서 “문형순 서장님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셨던 애국자로 당시 우리를 풀어주면서 ‘나라에, 사회에 도움이 되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여러분의 할 일이다.
평안남도 출신인 문형순 서장은 1953년 경찰 퇴직 후 제주에서 대한극장 매표원 등으로 일하다가 1966년 향년 70세 나이로 유족 없이 제주도립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시신은 제주시 오등동에 있는 평안도민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경찰청은 2018년 문형순 서장을 올해의 경찰 영웅으로 선정하고 추모 흉상을 제주경찰청에 세웠다. 하지만 국가유공자로는 선정되지 못했다.
그간 네 차례에 걸쳐 문형순 서장에 대한 국가유공자 신청이 접수됐지만 입증자료 부족 등을 이유로 통과하지 못했다. 김익렬 9연대장은 무장대 총책 김달삼과 평화협상을 진행하며 유혈사태를 막고 4·3의 평화적 해결에 나서려고 노력한 군인이다. 하지만 방해 세력에 의해 평화협정은 깨졌고 강경 진압작전을 거부한 김익렬 연대장은 미군정으로부터 해임됐다.
이외에도 1948년 11월1일 함덕리 평사동 모래밭에서 주민 6명을 총살하려는 토벌대에게 ‘신원을 보증할 테니 죽이지 말라’고 만류하다 함께 희생된 한백흥·송정옥 씨가 있다. 경찰이지만 최대한 주민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노력한 장성순·김순철·방상규·강계봉 씨 등도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건 ‘4·3 의인’들이다.
4.19혁명과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민주화가 되기 이전에 4.3사건 피해자들은 ‘빨갱이 가족’으로 낙인 찍혀 간첩사건이 터질 때마다 경찰서로 불려가 모진 고문을 받아 인권 탄압을 받았고, 연좌제에 묶여 취업이 막혀 일평생 가난에 허덕이며 살아야 했다.
그런데 강순주 씨와 독립유공자 한백흥 지사의 후손들은 의인들의 뜻을 받들고, 4·3이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확산시키는 디딤돌이 되기를 바라며 자신들이 받은 국가보상금을 4·3 유족회에 기부했다. 이들 외에도 4·3의 완전한 해결과 미래세대를 위해 국가보상금을 유족회와 마을 등에 쾌척하는 기부 릴레이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3. 제주 4.3사건 76주년 추념식
제주특별자치도는 제주 4.3사건 76주년을 맞이하여 4월 3일 오전 10시 제주4·3평화공원에서 ‘불어라 4·3의 봄바람, 날아라 평화의 씨'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한덕수 국무총리,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 국민의미래 인요한 선거대책위원장,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더불어민주연합 윤영덕·백승아 공동대표, 녹색정의당은 김준우 상임선대위원장, 새로운미래 오영환 총괄선대위원장, 개혁신당 천하람 총괄선대위원장,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 제주․경기․인천·대구·광주·울산 등 13개 시도 교육감, 제주4·3희생자유족회 임계령 회장 등 1만5,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에 추념식을 엄숙하게 개최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이 4.3추념식에 일제히 불참한 것은 4.3사건 자체의 모순적인 성격 때문이다. 4.3사건은 1948년 남한 내 5.10 단독선거를 막기 위한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의 무장봉기로 최초 촉발된 후, 군경의 강경진압으로 다수의 제주도민이 사망한 사건이다. 4.3사건 주동자인 제주지역 남로당 총책 김달삼은 사건 직후 월북해 현재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묘역이 조성돼 있다. 군경의 강경진압으로 다수의 사망자가 나왔다고는 하지만, 정부 입장에서는 이를 추념하기가 조금 껄끄러울 수 밖에 없다. 이후 4.3사건은 여순(여수ㆍ순천)군사반란사건으로 이어졌다. 이에 국가원수로는 지난 2006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최초로 4.3 추념식에 참석했다. 이후 이명박ㆍ박근혜 정부때는 줄곧 대통령이 불참했다가, 문재인 전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 신분으로 세 차례나 4.3추념식을 찾은 바 있다.
한덕수 총리는 추념사를 통해 “4.3사건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유가족의 아픔을 위로하는 것은 국가의 기본적인 책무”라며 “정부는 4.3사건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해 화합과 통합의 미래로 나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한 총리는 “올해 초에는 4.3특별법을 개정해 사실과 다르게 왜곡된 가족관계를 바로잡을 수 있는 법적토대를 마련했다”며 “2025년까지 추가 진상조사를 빈틈없이 마무리해 미진했던 부분도 한층 더 보완해 나가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조상범 제주도 특별자치행정국장은 “냉전과 분단의 정세 속에 빚어진 국가폭력으로 인한 집단 희생의 아픔을 딛고 ‘진실·화해·상생’을 이뤄낸 제주 4·3의 가치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해 2025년 유네스코 본부에 ‘제주 4·3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를 신청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제주시는 추념식장에 도민 2,200여명이 방문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행사장으로의 이동 편의를 위해 제주4·3희생자유족회(회장 임계령)와 함께 차량을 지원하고 별도로 시민을 위한 차량도 운행했다. 특히 제주4·3 역사를 왜곡하는 현수막에 대한 대응체계를 갖추고 안전한 추념식 봉행을 위해 행정의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제주4·3 희생자들을 추념하고 화해와 상생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도록 조기 게양에 적극 동참을 당부했다.
<필자 신상구 국학박사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 제2호 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 서울특별시 종로구 재동지점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2019),『한민족의 원대한 꿈 노벨상 수상 전략』(2024) 등 6권.
.주요 논문 :「한국의 대표적인 서정시인 윤동주와 생애와 작품세계」(2019.3),「박용래 시인의 생애와 업적과 작품세계」(2024) 등 129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시부문 신인작품상, <한비문학> ․ <오늘의문학> 문학평론부문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대전 <시도(詩圖)> 동인,『천안교육사』 집필위원,『태안군지』집필위원,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동양일보포럼 연구위원, 평화대사, 천손민족중앙회본부 연수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