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소설가 김주영 <객주> 초고, 세상 다 줘도 못 바꿔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4.04.02 01:19

     

                           소설가 김주영 <객주> 초고, 세상 다 줘도 못 바꿔 



김주영 소설가가 객주문학관 3층 전시실에서 대하소설 ‘객주’의 육필 원고를 들어 보이고 있다. /신현종 기자© 제공: 조선일보

집에 있는 날은 한 달에 열흘도 채 안 됐다. 극단적으로 작은 글씨는 짐을 줄이기 위한 묘수였다. 소설가 고(故) 이문구는 김주영의 노트를 보고 “이것은 그의 피다. 피 흘리는 김주영의 모세혈관”이라고 평했다. 작가의 치열함, 치밀함의 정수 그 자체라는 것이다. 연재가 끝난 해에 창작과비평사에서 ‘객주’를 9권의 책으로 묶어 냈다. 이후 2013년 마지막 10권을 내면서 연재를 시작한 지 34년 만에 마침표를 찍었다.

2014년 객주문학관이 개관한 이래 김주영은 고향 청송에 내려와 지낸다. 대부분 시간은 문학관 내 집필실 ‘여송헌’과 진보면 모처의 작업실에서 보낸다. 그는 “고향을 떠올리면 아픈 기억밖에 없다”고 했다. 물로 배를 채우는 날이 허다했고, 소풍 날에는 도시락통에 삶은 감자 한 알을 넣어갈 정도로 가난했다. 이날 점심, 인근 식당에서 기자와 갈치조림을 먹으면서도 그는 감자를 골라냈다. “그때 생각이 나서 못 먹습니다.” 하지만 장이 열리던 날을 떠올리면서는 눈을 반짝였다. “내 앞에 펼쳐진 진풍경에 매혹돼 장날마다 학교를 빠졌습니다. 그게 결국 ‘객주’의 시작이었던 셈입니다.”

◇우리말 갈래 노트와 저울추

21일 오후 경북 청송군 객주문학관에서 김주영 소설가의 ‘객주’ 육필원고와 전시물. /신현종 기자© 제공: 조선일보
21일 오후 경북 청송군 객주문학관에서 김주영 소설가의 ‘객주’ 육필원고와 전시물. /신현종 기자© 제공: 조선일보
21일 오후 경북 청송군 객주문학관에서 김주영 소설가의 ‘객주’ 육필원고와 전시물. /신현종 기자© 제공: 조선일보

“이 문학관에 오는 관람객들이 ‘옛날 거 많이 모아놨구나’ 이야기를 해요. 그럴 때 저도 ‘아, 내가 옛날 사람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지요.” 김주영은 이날 문학관에서 또 다른 ‘보물’을 공개했다. 소설 ‘객주’를 쓸 당시 참고하기 위해 그가 직접 정리한 ‘우리말 갈래 노트’들이다. ‘객주’는 그 시대의 말을 제대로 살린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작가 자신도 집필 당시 필요한 단어를 꼼꼼히 정리해 자기만의 우리말 갈래 사전을 만든 것이다.

말[馬]과 관련된 단어만 정리한 노트 한쪽만 봐도 생소한 말이 가득하다. “구마(마구간에 있는 말), 기재마(타기도 하고 짐도 싣는 말), 관전마태(고을에서 관마와 군마를 사육하는 사료로 쓰는 콩), 먹총이(검은 털과 흰 털이 섞여 난 말), 이도수아(청록 또는 홍록으로 땋은 두 가닥의 끈을 말 굴레의 장식으로 드리우는 것)….”

그는 과거 한 출판사로부터 ‘옛말이 너무 어려우니 쉬운 말로 고쳐서 다시 내자’는 제안도 받았지만 끝내 거절했다. “호텔에 가서 쓰든, 외국에 가든 경비를 다 대줄 테니 쉬운 말로 고쳐서 내면 아주 많이 팔릴 거라고…. 한동안 나도 그 유혹에 빠졌는데, 그 단어를 찾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고생했나. 여기에 딱 맞는 말을 찾기 위해 숱한 밤을 새우지 않았나. 못 바꾸겠더라고.”

전국 각지를 떠돌며 모은 재래식 저울추 50여 점도 그의 애장품이다. “상인들한테 돈 주고 사기도 하고, 골동품점에서 사기도 했다”며 “어디서 어떻게 가져왔는지는 이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정말 흥미로운 물건입니다. 물건의 가치가 저울에 의해서 결정되거든요. 저울이 생기면서 규격화가 된 거지요.” 조선 후기 보부상 집단의 출현과 그 상업 활동을 소설로 담아낸 ‘객주’를 써낸 작가에게 보부상들이 써왔던 저울추는 ‘초기 자본주의의 씨앗’과도 같은 매혹적인 물건이라고 했다.

                                                                    <참고문헌>

   1. 황지윤, "노트 20권에 3mm 글씨로 까맣게 채운  소설<객주> 초고, 세상 다 줘도 못 바꿔", 조선일보, 2024.3.26일자. A18면.

시청자 게시판

2,426개(1/122페이지)
시청자 게시판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시청자 게시판> 운영원칙을 알려드립니다. 박한 86052 2018.04.12
2425 진천군, 보재 이상설 선생 서훈등급 상향 추진 사진 신상구 122 2024.11.28
2424 2025년 지식인들의 잡지 '사상계' 재창간 신상구 163 2024.11.28
2423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2024년 12월 7일 재개관 사진 신상구 135 2024.11.27
2422 여든 넘어 글 배운 칠곡 할매의 詩, 교과서 실린다 신상구 119 2024.11.27
2421 청주고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 마무리 신상구 82 2024.11.27
2420 금행일기와 휵양가 신상구 99 2024.11.26
2419 WTO 체제, 강제력 잃은 명목상 경제질서로 전락할 수도 신상구 82 2024.11.26
2418 교육부 가칭 해외 한국어 교육 지원 센터 설립 추진 신상구 80 2024.11.26
2417 64년만에 완성한 민주주의 역사 보물창고, 3.8민주의거 기념관 신상구 78 2024.11.25
2416 정답 지상주의에서 벗어나는 교육 신상구 80 2024.11.25
2415 1만엔 새 지폐 주인공, 시부사와 에이이치 淸富의 삶 대해부(2) 사진 신상구 94 2024.11.25
2414 1만엔 새 지폐 주인공, 시부사와 에이이치 淸富의 삶 대해부(1) 사진 신상구 91 2024.11.25
2413 세상 종말이 와도 사랑을 되살려내는 시의 힘 신상구 79 2024.11.24
2412 서울 광화문광장 100년사 사진 신상구 89 2024.11.24
2411 노벨상 위해선 느슨한 시스템 필요 사진 신상구 96 2024.11.23
2410 국내 서양근대사 연구 개척자, 나종일 서울대 명예교수 별세 신상구 89 2024.11.23
2409 한국교회, ‘선교 140주년’ 기념 사진 신상구 105 2024.11.23
2408 대한민국 학교 교육과정 사진 신상구 90 2024.11.22
2407 나치 전범재판 사진 신상구 117 2024.11.21
2406 정책 전환의 성공과 실패 신상구 93 2024.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