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친일문학과 민족문학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1.08.25 04:24

                      

                           [國恥百年] (21)친일문학과 민족문학

                                       대구시인 이상화 지사적 삶 실천…민족문학 큰 별로

   일제 강점기 우리 문학인들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하면서까지 일제에 동화한 문학인과 올곧게 저항하며 민족 문학을 지킨 이들이 있었다. 대구 출신의 이상화(사진)는 민족 문학의 큰 별이었고, 지금도 한국 문학사에서 영원히 빛나고 있다.일제 강점기 우리 문학인들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하면서까지 일제에 동화한 문학인과 올곧게 저항하며 민족 문학을 지킨 이들이 있었다. 대구 출신의 이상화(사진)는 민족 문학의 큰 별이었고, 지금도 한국 문학사에서 영원히 빛나고 있다.
1939년 12월 12일 경성일보에 실린 춘원 이광수의 창씨개명 결의 보도.1939년 12월 12일 경성일보에 실린 춘원 이광수의 창씨개명 결의 보도.
광복 후인 1946년 3월 좌익계 조선문학가동맹에 맞서 민족진영 측이 서울 종로 YMCA에서 연 전조선문필가협회 결성대회.광복 후인 1946년 3월 좌익계 조선문학가동맹에 맞서 민족진영 측이 서울 종로 YMCA에서 연 전조선문필가협회 결성대회.

   산길을 가다 보면 갈래 길과 맞닥뜨릴 때가 있다. 그럴 경우 어느 길이 바른 길인지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주저와 망설임 속에 몹시 당황하게 된다. 잘못된 길에 접어들게 되면 예상치 못한 낭떠러지를 만나 큰 낭패를 본다.

   인생의 길도 이러한 원리를 머금은 것인가?

   1930년대 중반, 식민지조선 문학인들의 삶에는 갈래 길 앞에서의 결연한 선택이 요구됐다. 그 길에는 암운이 감돌고 있었다.

   광적 전쟁 준비에 치닫던 일제의 통치이념에 순응하고 협조하면서 남보다 한걸음 먼저 친일을 나타낸 한 무리 문학인들이야말로 먹구름이라 할 수 있겠다. 그들은 일제가 민족 말살 정책의 하나로 기획한 창씨개명 작업에 솔선해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었다. 각종 친일단체와 조직에도 능동적으로 가담해 활약했다. 급조된 광신적 굿판의 명칭은 이른바 '조선문예회'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황군위문작가단' '국민총력조선연맹'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 '조선문인보국회' '대의당' '대화동맹' 등.

   이 단체를 통해 친일 활동의 범위를 광범하게 펼친 문학인들은 김동인(東文仁), 김문집(大江龍之介), 김용제(金村龍濟), 김종한(月田茂), 김팔봉(金村八峯), 박영희(芳村香道), 백철(白矢世哲), 이광수(香山光郞), 서정주(達城靜雄), 이석훈(牧洋), 정인섭(東原寅燮), 주요한(松村紘一), 최재서(石田耕造), 곽종원(岩曲鍾元), 조연현(德田演鉉) 등이다. 그런데 이름 옆 괄호 속의 한자는 무엇인가? 바로 창씨개명 정책에 부응해 바꾼 일본식 이름이다. 한국인이었던 그들은 일본인으로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두 얼굴의 사나이'라 부를 수 있으리라.

   창씨개명은 하지 않았지만 두드러진 친일 활동을 펼쳤던 문인들은 김소운, 김안서, 노천명, 모윤숙, 유진오, 이무영, 이효석, 정비석, 정인택, 채만식, 최남선, 최정희 등이다. 당시 문단의 대표 인사들이 줄줄이 친일 대열에 앞장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 가운데 비평가 김문집은 대구 출신(대구고보 졸업생)이다.

   1940년 전후로 펼쳤던 10년 동안의 친일 문학은 거의가 자발적 주체적 선택이었다. 이 대열에 참가한 자들은 일본의 제국주의 파시즘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일본의 정책에 협력하는 투항적 삶의 자세를 취했다. 친일 문학인으로서의 내적 논리를 갖추고 능동적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들이 친일의 길을 선택한 배경에는 출세에 대한 개인적 욕구, 기회주의, 국제정세 변화 및 예측에 대한 지식과 정보의 부족, 역사의식 부재 등이 은연중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시인 서정주의 경우 일제의 식민통치가 영원할 것이란 확신을 가졌다며 자신의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소설가 이효석은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 검열계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붉은 잉크로 동료 문학인들의 원고에 담겨 있는 불온성(?)을 엄격하게 검열하고 단속했다.

   춘원 이광수는 일본인처럼 빡빡 깎은 머리에 국민복 차림으로 비평가 김팔봉과 함께 만주의 신찡(新京)에서 열렸던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석했다. 그때 호텔 방에서 은밀하게 나눴던 두 사람의 대화는 소름을 끼치게 한다.

   "선생님,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과연 해방될 수 있을까요?"(팔봉) "대단히 위험한 상상을 하고 있군요. 나는 그런 궁색한 기대보다 먼저 우리 자신이 어떻게 하면 솔선해 진정한 일본인이 될 수 있는가를 먼저 궁리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고 봅니다. 내 몸의 피와 살, 터럭, 생각까지도 모두 일본 것으로 바꾸어야 하지요. 그래야만 조선 사람도 일본의 감시에서 벗어나고 마침내 일본의 총리대신까지 조선사람 출신이 맡게 될지 누가 알겠소?"(춘원). 하지만 광복 이후 친일 문학인들은 그 어떤 참회나 반성을 담은 단 한 줄의 글도 발표하지 않았다. 어설픈 자기변명을 남루하게 늘어놓은 경우만 더러 있었다.

   그로부터 65년 세월이 흘렀다. 친일 문학은 현재 소멸되고 없는 과거완료형인가? 분명하게 '아니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친일 문학의 망령은 지금 형식과 겉옷을 바꾼 모습으로 우리 앞에 시퍼렇게 살아 있다.

   현대판 친일 문학은 과연 어떤 꼴인가? 끊임없는 대립과 갈등, 분파주의, 분단 모순, 상업주의, 반인간주의의 탈을 쓰고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다. 기질 자체가 반민족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 친일 문학의 속성은 언제든지 파시즘과 제국주의 논리를 비수처럼 안으로 감추고 불시에 우리를 공격하며 전복시키려 든다. 우리는 현재 그러한 공격에 쉽게 쓰러질 수 있을 정도로 방비가 허술하다.

   이러한 친일 문학의 위선과 이중성을 극복한 지점에 민족 문학이 자리하고 있다. 민족 문학은 식민지 조선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그 싹이 트고 정신도 배양됐다.

   김태준과 이원조가 민족 문학 확립론을 제창했고 박영희는 건전한 민족 문학 정신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임화, 한효, 홍효민 등은 진보적 리얼리즘의 토대 구축을 위한 구체적 방안을 제시했고 문학의 기초와 그 터전을 닦으려고 했다. 비평가 김동석은 관념주의를 '위선자의 문학'이라 격렬하게 비판했고 김남천은 문학의 교육적 임무와 그 역할에 주목했다. 임화는 민족 문학 이념이 문학 운동과 사상적으로 통일돼야 한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이러한 비평계의 활동은 문학의 창작 방법과 성과가 과연 어떠한 방향성 및 가치관으로 이어져야 하는가를 후배 세대들에게 일깨워주는 뜻 깊은 각성의 계기였다.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민족 문학 정신을 일으켜 세우고 그것을 실천으로 보여준 시인들이 있었다. 신채호, 한용운, 이상화, 심훈, 이육사, 윤동주 등이 그 주인공이다. 연암 박지원의 문학이 지닌 실학사상에서 그 뿌리를 확인할 수 있는 민족 문학의 주체적 정신은 다산 정약용으로 계승돼 화려한 꽃을 피웠다. 그리고 그 전통은 단재, 만해, 상화, 심훈, 육사 등으로 이어졌다.

   대구가 배출한 이상화 시인의 민족 문학 정신은 특별하다. 상화 문학 정신에서 우리는 강건하고 우뚝한 남성적 톤과 기상, 서민적 삶에 대한 따뜻한 연민의 시각을 느낀다. 태산교악(泰山喬嶽)이라 불리는 경상도 기질의 진면목과 지사적 풍모까지도 경험하게 된다. 민족의 생존권이 절박한 위기를 겪던 시기에 그들은 개인의 안위를 버리고 오로지 민족적 가치를 앞세우는 삶을 실천에 옮겼다. 그리고 그 성과는 한국 문학사에서 영원히 빛나는 한 개씩의 별자리로 제각기 터전을 잡았다.

   이동순 영남대학교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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