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시는 언어의 사원이 아니다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4.08.02 03:35

                          시는 언어의 사원이 아니다


중앙일보

성민엽 문학평론가


시(詩)라는 한자는 왼쪽의 언(言)과 오른쪽의 사(寺)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글자입니다. ‘언’은 말(언어)이고 ‘사’는 절(사원)이니 시는 곧 말의 절, 혹은 언어의 사원을 뜻한다는 풀이가 매우 그럴듯해 보입니다. 언어의 사원이라고 하면 그것은 신성한 언어, 경건한 언어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풀이는 오류입니다. ‘寺’라는 글자가 절·사원이라는 뜻을 갖게 된 것은 기원 전후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의 일이고, 言+寺라는 형태의 한자 ‘詩’는 그 이전부터 이미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는 말(言)+절(寺)’ 풀이는 오류

불교 전래 이전에 한자 詩 존재

금문의 寺는 통제·유지의 의미

시는 ‘말로 뭔가 붙잡다’로 풀어야

‘詩’자는 전국시대 중기(기원전 4세기)에 존재했던 것이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확인되었고, 공자가 시경을 편찬한 춘추시대 말(기원전 5세기)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보는 게 정설입니다. 심지어 춘추시대는 물론이고 서주 시대(기원전 11세기~8세기)에 이미 言+寺 구조의 글자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서주 시대든 공자 시대든 전국시대 중기든, 그 당시에 ‘寺’라는 글자가 무슨 뜻으로 사용되었는지가 중요합니다.

서주 시대의 청동제 종이나 솥에 새겨진 글자를 금문(金文)이라고 합니다. 금문 다음에 나온 글자가 춘추전국시대의 대전(大篆)이고 진시황 때 새로 나온 글자가 소전(小篆)이며 대전과 소전을 합쳐서 전문(篆文)이라고 합니다. 금문은 춘추전국시대에도 계속 사용되었는데, 금문에서 ‘寺’는 상부의 ‘토(土)’를 ‘지(止)’로 썼고 ‘止’는 ‘가다, 가서 멈추다, 움직이지 않다’를 표시했으며, 하부의 ‘촌(寸)’을 ‘우(又)’로 썼고 ‘又’는 ‘손, 잡는 것’을 표시했습니다. 그래서 금문의 ‘寺’는 ‘잡고 있는 것, 유지, 통제’라는 뜻이었습니다.

중앙일보

왼쪽이 금문의 寺, 오른쪽이 전문의 寺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의 왼쪽이 금문의 寺, 오른쪽이 전문의 寺입니다.(위 사진)

진시황 시대를 전후해서 전문의 ‘寺’라는 글자가 ‘도성에서 관리를 접대하는 장소’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 시작했고(‘寺’가 관청이라는 뜻을 갖게 된 것은 이때부터입니다. 관청이라는 뜻의 ‘寺’는 ‘사’가 아니라 ‘시’라고 읽습니다), 한나라 때 불교가 전래된 뒤에는 ‘서방에서 오는 스님을 접대하는 곳’을 ‘寺’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寺’가 절이라는 뜻을 갖게 된 것은 이때부터입니다). 이렇게 ‘寺’자의 의미가 바뀌게 되자 ‘寺’자의 원래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寺’ 옆에 ‘수(手)’를 붙여 ‘지(持)’자로 대체하게 되었습니다.

이상의 검토를 통해 ‘시’의 어원을 언어의 사원이라고 보는 설이 단지 속설일 뿐이고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 속설은 한자문화권에서 흔히 발견됩니다. 한국·중국·일본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에서는 고은 시인이 대표적입니다. 고은 시인은 1971년에 신문에 시 월평을 쓰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고대 상형문자의 조립 방식으로 본다면 시는 언+사라는 수식이 되며 그것은 시가 언어 사원이라는 경건성으로 설정된다. 현대시가 이런 시의 근본적 의미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할 경우에도 그것은 시의 원형을 강조하고 있다.”

중앙일보

내장산국립공원에 진노랑상사화가 활짝 피어 있다. 상사화는 봄에 잎이 나왔다가 시든 후 여름에 꽃을 피워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상사화의 꽃말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이다.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시의 근본적 의미’를 경건성에서 찾는 관점은 나름대로 성립될 수 있습니다. 다만, 시(詩)라는 한자의 어원이 그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정희성 시인이 1997년에 발표한 ‘시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시가 흥미롭습니다.

“말이 곧 절이라는 뜻일까/ 말씀으로 절을 짓는다는 뜻일까”.

이렇게 시작되는 이 시의 화자는 절에 가서 시를 찾지만 결국 찾지 못한 채 ‘절은 있어도 시는 보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대신 그가 본 것은 꽃대궁만 있고 잎은 보이지 않는 상태의 상사화입니다. 꽃말이 ‘이룰 수 없는 사랑’인 상사화는 잎과 꽃이 서로 다른 시기에 피어 만날 수 없는 연인의 비유로 쓰입니다. 시인은 상사화에서 시를 발견하고, “아마도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인 게라고” 생각합니다. 시는 언어의 사원이라는 속설에서 벗어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詩’ 속의 ‘寺’가 뜻을 갖는다면 그것은 ‘절’이 아니라 ‘잡아두기’입니다. 말을 잡아두는 것일 수도 있겠고 말을 사용해서 무엇인가를 잡아두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느 쪽이든 ‘잡아두기’의 구체적 양상이 중요합니다. 시가 무엇인지를 한자의 어원으로 살핀다면 바로 여기서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합니다. 시는 언어의 사원이 아닙니다.                                                                                                                                                                                                 <참고문헌>                                                                           1. 성민엽, "시는 언어의 사원이 아니다", 중앙일보, 2024.8.1일자. 26면.                                                                  


시청자 게시판

2,426개(9/122페이지)
시청자 게시판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시청자 게시판> 운영원칙을 알려드립니다. 박한 96276 2018.04.12
2265 대전 영시축제, 성공적 개최를 기대하며 사진 신상구 347 2024.08.08
2264 21세기 교육의 방향: 들뢰즈(Deleuze)의 생성적 교육 사진 신상구 260 2024.08.08
2263 역사 속 활과 화살 사진 신상구 519 2024.08.08
2262 광복, 소중한 유산 신상구 275 2024.08.08
2261 고 박정희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 별세 50주년 회고 중앙일보 대담 신상구 314 2024.08.08
2260 충청에 스민 동악 이안눌의 문향 신상구 309 2024.08.07
2259 국문학자 조동일의 보물 3가지 신상구 349 2024.08.07
2258 <특별기고> 한암당 이유립 기념관을 건립해 대전 구도심을 활성 사진 신상구 271 2024.08.06
2257 이유립 선생 제자 양종현 선생 별세 신상구 302 2024.08.05
2256 대전광역시 중구 목척 5길 244 한암당(寒闇堂)을 아시나요 신상구 459 2024.08.05
2255 항일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인 길영희 선생의 생애와 업적 신상구 456 2024.08.04
2254 김진현 “단군이래 최고 성공 한국, 썩은 리더십에 혼돈” 사진 신상구 447 2024.08.03
2253 대구 청라언덕이 키운 예술 자부심, 한국전쟁 때 꺾여 사진 신상구 280 2024.08.03
2252 일제강점기 '여공'들 조명한 다큐 '조선인 여공의 노래' 7일 개봉 사진 신상구 416 2024.08.02
2251 '서편제' 주인공들이 부른 진도아리랑은 육자배기토리 노래 사진 신상구 395 2024.08.02
>> 시는 언어의 사원이 아니다 사진 신상구 267 2024.08.02
2249 40세 ‘불혹’ 김정은, 11세 어린 딸 김주애를 후계자로 파격 내정? 사진 신상구 365 2024.08.02
2248 탈성장은 선택이 아니라 유일한 답이다 사진 신상구 337 2024.08.01
2247 『사주는 없다』쓴 이재인 박사 인터뷰 사진 신상구 330 2024.08.01
2246 화가 황주리의 현대사 보물 사진 신상구 332 2024.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