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식·윤언이·정지상·묘청의 네 갈래 길
이익주 역사학자
묘청의 난을 진압한 고려 문신 김부식의 영정. [연합뉴스]
묘청 “땅 기운 쇠하면 수도 옮겨야”
공을 쏘아 올린 사람은 묘청이었다. 그는 1128년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제의했다. 수도 개경(지금 개성)이 땅의 기운이 다했고 서경은 왕기가 서렸으니 서경으로 천도하면 고려가 천하를 호령하게 될 것이며 금나라가 스스로 항복해 올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 전적으로 풍수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풍수란 땅에 기운에 있으며,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 기운이 성했다 쇠했다를 되풀이한다는 이론이다. 따라서 수도를 정할 때는 땅의 기운이 성한 곳을 찾아야 하고 시간이 지나 기운이 쇠해지면 다른 성한 곳으로 옮겨야 하는데, 지금이 바로 개경에서 서경으로 옮길 때라는 것이었다. 그럼 금나라가 스스로 항복해 올 것이란 무슨 말일까?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 [중앙포토]
처음에 고려는 강력 반발했고, 금의 국서에 응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은 고려 편이 아니었다. 금은 점점 더 강성해졌고, 마침내 1125년에는 거란을 멸망시킨 데 이어 송나라 수도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고려의 대응도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1126년 어전 회의에서 “금이 과거에 작았을 때는 우리를 섬겼으나, 지금은 갑자기 세력을 일으켜 거란과 송을 멸망시켰으며, 병력도 강하여 나날이 커지고 있으니 사대하지 않을 수 없다”는 현실론이 격론 끝에 채택되었다. 그에 따라 금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 대가로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민심이 문제였다. 어제까지 아래로 보아왔던 여진을 갑자기 상국으로 받들게 된 상황을 대다수 고려 사람들은 용납할 수 없었고, 그 틈을 묘청이 채우고 나선 것이었다. 서경으로 천도하면 금나라가 항복할 것이란 말은 그래서 나왔다.
개경의 고려 황궁 화재가 천도 명분
일제강점기의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 『조선사연구초』에서 묘청의 난을 고려·조선 1000년 역사의 최대 사건으로 규정했다. [중앙포토]
윤언이의 묘지명. 금나라의 사대요구를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이 실려 있다. 그는 묘청 반란 진압에 가담했으면서도 묘청 일파와 내통했다는 혐의을 받았다. [사진 이익주]
12세기 전반, 국가적 위기에서 네 사람은 각각 다른 길을 걸었다. 그 결과 김부식이 정지상과 묘청을 죽이고 윤언이를 지방관으로 쫓아내고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 승리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차가웠다. 정지상의 죽음에 대해서 “당시 사람들이 ‘김부식이 평소 정지상과 문장에서 명성을 다투었는데, 불평이 쌓였다가 이때 반란에 내응했다는 핑계를 대고 죽였다’고 말들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전한다. 수십 년이 지나서 이규보의 『백운소설』에는 정지상의 귀신이 절간 해우소에서 김부식의 음낭을 옥죄어 죽게 했다는 전설이 실렸다. 윤언이와는 좀 더 긴 이야기가 있다. 일찍이 윤관이 대각국사 의천의 비문을 지었는데 문장에 불만을 가진 문도들이 왕에게 아뢰어 김부식으로 하여금 고쳐 짓도록 했더니 김부식이 사양도 하지 않고 다시 지었으므로 아들 윤언이가 앙심을 품었다. 어느 날 왕이 김부식에게 『주역』을 강의하게 하고 윤언이에게 토론하도록 했는데, 윤언이가 일부러 거침없이 따져 물었으므로 김부식이 진땀을 흘렸고, 이 일로 감정이 상한 김부식이 묘청 난을 진압한 후 윤언이를 모함해서 내쫓았다는 일화이다.
신채호 “묘청·김부식 대립은 진취·보수 싸움”
서경(평양) 임원역의 대화 궁 터. 한때 천도 주장에 기울었던 고려 인종이 묘청의 건의에 따라 조성하려다 중단했다. 성벽과 내궁 흔적이 보인다. 1916년 촬영 사진. [사진 이익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