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애리시 선교사 헌신적 보살핌과 후원 아래 애국신앙 기초 튼튼히 쌓아

유관순과 사애리시 선교사의 다정한 모습을 구현한 조각상이 영명학교 교정에 설치되어 있다.
유관순과 사애리시 선교사의 다정한 모습을 구현한 조각상이 영명학교 교정에 설치되어 있다.

매봉자락에서 자란 유관순이 서울 이화학당에 입학하기까지의 시간들은 많은 부분 베일에 가려져있다. 사실 나라를 빼앗긴 민족, 그 중에서도 넉넉지 못한 집안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자란 어린 소녀의 삶에 무슨 그리 대단한 사건들이 있었을까. 단 하나, 그가 고향 천안을 떠나 이웃 공주로 거처를 옮겨 영명여학교라는 이름의 미션스쿨에 다녔다는 증언만이 생생하다.

공주의 감리교선교부에서 활동하던 엘리스 샤프(한국명 사애리시) 선교사는 관할지역인 충청도 일대를 순회하며 교회들을 돌보고, 현지 주민들을 전도하는 사역에 역점을 두었다. 특히 사애리시는 신앙심이 돈독하고 총명한 여성들에게 제대로 교육을 받을 기회를 마련해주는 데 큰 관심이 있었다.

자신이 직접 설립한 학교들을 통해 교육하기도 했지만, 더욱 재능이 뛰어난 인재라는 판단이 들면 같은 감리교 계열의 학교인 서울의 이화학당으로 보내 상급과정의 교육까지 받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지령리교회를 방문한 사애리시에게 ‘똑순이’ 유관순의 두드러진 모습이 눈에 띄지 않을 리 없었다. 당시 유관순의 집안은 아버지 유중권이 홍호학교 운영과정에서 일본인에게 빚을 져 가세가 기우는 바람에 딸을 교육시키기 어려운 형편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애리시의 설득으로 유관순은 공주의 영명여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영명여학교는 사애리시 선교사가 남편 로버트 샤프 선교사(사선교사)와 함께 공주선교부에 부임한 후 세운 학교이다. 부부는 명설학당이라는 이름의 남학교, 명선학당이라는 이름의 여학교를 각각 세워 운영했다. 사선교사가 장티푸스로 갑작스레 별세하자 잠시 미국으로 귀국했던 사애리시가 2년 만에 공주로 돌아온 후, 두 학교는 분위기를 일신하며 이름도 영명학교와 영명여학교로 바꾸었다.

영명학교 교사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공주장터 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공주3·1공원.
영명학교 교사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공주장터 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공주3·1공원.

유관순의 친 오빠 유우석과 사촌오빠 유경석이 재학한 학교가 영명학교였고, 유관순의 숙부 유중무와 함께 지령리교회를 운영하던 조인원의 아들 조병옥도 이 학교를 졸업한 바 있어 ‘영명’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낯설지 않은 존재였다. 유우석과 조화벽 부부, 유경석과 노마리아 부부도 ‘영명’을 통해 맺어졌으며, 훗날 만세운동으로 가족을 잃은 유관순의 두 동생을 거두어 돌봐준 것도 바로 영명의 품이었다.

2007년 발간된 <영명 100년사>에는 유관순의 영명여학교 시절과 관련된 여러 증언들이 수록되어있다. 그 중 유관순과 같은 시절 영명학교를 다녔다는 강나열의 조카 강신근 씨는 유관순과 사애리시의 각별한 관계에 대해 상세한 증언을 한다.

영명여학교 재학 시절 유관순이 스승 사애리시와 함께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옛 선교사 사택.

“큰 고모 말씀에 의하면 사애리시 선교사가 관순이를 유별히 친딸처럼 보살펴주고 사랑을 해서 다 부러워했다고 한다…관순이는 기초적 학문은 영명에서 배웠기 때문에 이화학당 편입이 가능했고, 또 사애리시의 딸로서 학비 면제도 했고, 생활비도 대주었다. 관순이는 공휴일이나 방학 때에는 천안의 집보다 공주에 내려와서 사애리시 선교사를 도와주며 전도도 같이 다녔다고 한다.”

영명학교는 기독교신앙 못지않게 민족정신이 투철한 학교였다. 영명학교 초대교장 프랭크 윌리암스 선교사(한국명 우리암)가 자신의 아들 이름을 ‘우광복’이라 지으며 조선 독립을 희구했을 정도로 학교 구성원 모두에게 항일의식이 공유되고 있었다. 1919년 4월 1일 공주 만세운동을 주도한 것도 바로 영명의 교사와 학생들이었다. 영명여학교를 다니는 동안 유관순의 가슴 속에도 같은 정신이 새겨졌을 것으로 추정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유관순이 사애리시 선교사에게 건네받아 읽은 책 중에는 프랑스의 구국영웅 ‘잔다르크’ 이야기가 실린 <애국부인전>이 있었다. 나중에 3·1운동의 상징이 된 유관순에게 ‘한국의 잔다르크’라는 별명이 붙고, 실제로 이를 모티브로 쓴 전기(정광익의 1954년 작 <짠딱크와 유관순>)까지 나온 것도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영명학교 100주년 기념탑 앞에는 자랑스러운 영명 출신 인물들의 흉상이 설치되어있다. 맨 오른쪽이 유관순.
영명학교 100주년 기념탑 앞에는 자랑스러운 영명 출신 인물들의 흉상이 설치되어있다. 맨 오른쪽이 유관순.

공주시 중동 소재 영명중고등학교(교장:이용환) 교정과 정문 앞 공주삼일공원에는 사애리시와 유관순이 나눈 돈독한 사제의 정, 이들과 동료들이 함께 꽃피운 애국신앙의 자취를 담은 수많은 조형물과 전시품들을 살펴볼 수 있다. 두 사람이 함께 지낸 장소로 추정되는 선교사 사택도 부근에 보존되어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와 유관순 서거 100주년이 되는 올해에는 사애리시 부부의 묘소가 조성된 선교사 묘역의 대대적 단장과 함께, 유관순과 사애리시를 추모하는 조각상이 옛 사택부근에 새롭게 설치되는 등 여러 기념사업들이 전개되고 있다.

샤프 선교사와 사애리시 선교사 부부를 비롯한 공주지역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잠든 묘역.
샤프 선교사와 사애리시 선교사 부부를 비롯한 공주지역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잠든 묘역.

이용환 교장은 “사애리시 선교사가 한국인들을 섬기며 보여준 감동적인 헌신, 그의 품에서 자란 유관순이 신앙을 토대로 한 나라사랑의 정신을 떨친 모습은 오늘의 영명인들에게도 큰 귀감이 된다”면서 “학교가 애국신앙의 요람으로서 역할을 앞으로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힌다.

유관순이 영명여학교에서 보통과 과정을 수학한 시간은 대략 2년 정도였고, 1916년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1915년 조선여선교회연례회의에서 사애리시는 “공주의 주간학교는 등록된 학생 수가 지난해와 같은 70명이다…5명의 소녀가 초등과정을 졸업했는데, 그들은 1년 후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이화로 가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보고한다.

다섯 명의 소녀 중 한 사람이 유관순이었을 가능성이 유력하다. 지령리의 똑순이는 어느새 조국을 가슴에 품은 애국소녀로 자라, 발걸음을 서울로 옮기고 있었다.

애국신앙으로 이끈 스승들
유관순 성장에 버팀목 되다

유관순의 학창시절에 큰 영향을 미친 스승들. 왼쪽부터 사애리시, 김란사, 박인덕.
유관순의 학창시절에 큰 영향을 미친 스승들. 왼쪽부터 사애리시, 김란사, 박인덕.

유관순의 성장에 길잡이와 버팀목이 되어준 결정적 인물이 있으니 바로 영명여학교와 이화학당의 스승들이다.

시골소녀 유관순을 도회지로 이끌어준 건 미국인 여성 앨리스 샤프, 한국이름으로 사애리시 혹은 사부인이라 불리던 인물이었다. 감리교선교사로 1900년 12월 한국을 찾아와 39년 동안 머물며, 공주 영명여학교를 비롯한 여러 학교를 세워 이 땅의 여성들을 눈뜨게 했다.

서울 서초문화예술회관 임연철 전 관장이 쓴 <이야기 사애리시>(신앙과지성사)에서는 그녀를 ‘유관순 열사 신앙의 어머니, 충청 선교사의 개척자’라고 지칭한다. 특히 이 책에서는 두 사람의 조우를 ‘운명 같은 만남’으로 지칭한다.

사애리시가 유관순을 딸처럼 돌보며 후견인 역할을 했다는 증언, 나중에 유관순을 이화학당에까지 진학시킨 장본인이라는 증언, 두 사람이 함께 충청도 일대를 누비며 전도활동을 벌였다는 증언 등은 이 둘이 얼마나 돈독한 사이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사애리시에게는 올해 3·1절을 즈음해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이 추서됐다.

유관순이 이화학당으로 진학한 후 만난 교사들 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사람은 아마도 김란사였을 것이다. 김란사는 미혼 학생만 받아들이던 이화학당의 전통을 깨고 기혼여성으로는 최초로 입학하는 기록을 세운 인물이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모교에 교사로 돌아와서는 교감과 기숙사 사감 등을 지냈고, 이화학당 출신으로는 최초로 대학부 교수까지 맡았다.

학생들에게 규율을 강조하며 엄격하게 대해 ‘호랑이 선생님’으로도 불렸지만, 이 땅의 여성들이 열심히 배워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데 등불 같은 역할을 감당하기 바랐던 그의 소망과 신념 또한 학생들에게 부족함 없이 전달됐다. 특히 이화에서 학생들의 독립정신을 배양하는 통로가 된 이문회를 지도하며 유관순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다.

3·1운동이 벌어진 1919년, 김란사는 고종의 명을 받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는 각국 대표들에게 전달할 밀서를 들고 몰래 출국했다. 하지만 파리로 향하던 여정 중 베이징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며 그의 임무는 완수되지 못했다. 1995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이화학당에는 박인덕이라는 또 한 명의 걸출한 여교사도 있었다. 3·1운동 직후 학생들이 만세시위에 참여하도록 선동하는 역할을 했다는 죄목으로 연행되어 5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석방되자마자 여성독립운동단체인 애국부인회에 가담한 사실이 밝혀져 그해 12월 다시 투옥된다.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 유관순을 만나 대화한 사실, 아끼던 제자가 일제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은 사실 등을 결정적으로 증언한 인물이 바로 박인덕이다. 하마터면 역사 속에 묻힐 뻔한 유관순의 존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질 수 있었던 데는 박인덕의 공이 크다.

                                                                           <참고문헌>

     1. 정재영, "[역사기획/ 유관순 서거 100주년 특집-애국의 꽃으로 피어난 신앙] (2)조국을 가슴에 품다", 기독신문, 2020.6.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