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지역 문학산책을 하다가 보면 이곳저곳에서 자주 만나는 사람 중 한 명이 목은 이색이다. 우리의 문학세계에 그만큼 영향력이 크다는 방증이다. 따라서 이번에는 여말선초 삼은(三隱) 중 한 사람인 목은 이색이 우리 지역과 어떤 인연이 있는지 알아본다.
◆ 목은 이색의 생애와 문학세계
이색(李穡, 1328~1396)은 고려 말의 정치가, 사상가, 교육가인 동시에 우리 고전문학의 걸출한 시인이다. 이색의 자는 영숙, 호는 목은, 시호는 문정, 본은 한산이다.
이색은 1328년(고려 충숙왕 15) 경북 영덕군 영해읍 괴시1리에서 원나라 제과에 합격하고 원 관료를 역임한 후 고려에서 찬성사를 지낸 ‘차마설’의 저자인 가정 이곡과 모친 함창 김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나 2세가 되던 해에 부모의 고향인 충남 서천군 한산으로 귀향했다.
이색은 14세 때 성균시에 합격하고, 20세 때 국자감 생원에 선발되어 원나라 대도(오늘의 北京市) 국자감에서 공부했다. 23세 때 일시 귀국했다가 12월에 다시 원나라에 갔으나 이듬해 1월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했다. 27세 때에 원나라에서 급제하여 좌우사랑중 등의 관직을 역임했고, 고려에서는 두부시랑, 삼중대광한산군 등을 역임하며 고려의 유학을 이끌었다.
조선 개국 후 태조는 그의 재능을 아껴 1395년(태조 4) 한산백에 봉하며, 예를 다하여 출사를 종용하였으나, 망국의 사대부는 오로지 해골을 고산에 파묻을 뿐이라며 끝내 고사하였다. 그러나 1392년 4월 정몽주가 피살되자 고려말에 결당 모란한 자로 지목되어 금천·여흥·장흥 등지로 유배와 석방을 거듭했다. 그러다가 1396년 69세 되던 해 여주 신륵사에 가는 도중 여강의 배 안에서 급사하여 사인에 많은 의혹을 남겼다.
그러나 목은 이색은 삼은의 맏형으로 평생 총 5번에 걸쳐 지공거 혹은 동지공거로 과거를 주시하거나 성균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무려 132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해 학파에 ‘목은그룹’을 형성하였다. 중국의 성리학을 신유학으로 도입하고 문하에 권근·김종직·변계량 등을 배출하고 성리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어 정몽주·정도전·권근·이언적·퇴계를 거쳐 동학에 이르기까지 한국 성리학의 기반을 이어준 조선 선비의 큰 스승이었다.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 있어 갈 곳 몰라 하노라 - 목은 이색, ‘백설이 잦아진 골에’ 시조
이 시조는 여말선초의 역사적 전환기에 있는 지식인의 고뇌와 우국충정을 잘 표출한 목은의 대표적인 시조이다.
목은 이색은 이 시조 이외에도 『목은고』와 『목은시고』 등에 한시 약 6000여 수와 산문 240여 편의 많은 작품을 남긴 것으로 미루어 오직 성리학을 공부하고 차를 마시며 글을 쓰는 것을 생활화했던 선비 중의 선비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 서천 문헌서원과 묘소
충남 서천군 기산면 서원로172번길 66(영모리 10번지)에 있는 문헌서원은 하마비와 홍살문에 다다르기 전부터 한옥으로 단장한 문헌전통호텔과 그 앞의 목은 산책공원이 품격을 더해주고 있다. 그리고 홍살문을 지나자마자 좌측에 7개의 비석이 도열해 있고, 우측에는 연못과 경현루가 있으며 산기슭 아래에 제대로 갖추어진 서원의 한옥들과 푸른 잔디들이 잘 어우러져 깔끔한 선비의 정신을 내 뿜는 듯하다. 또 전통의 미를 살린 가로등마다 목은의 한시 원본과 번역본을 동시에 걸개 형식으로 전시하여 마치 야외 시화전에 온 듯한 문학적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문헌서원은 1594년(선조 27) 이곡, 이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현재는 이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한산이씨 명조 선현 8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문헌서원은 1575년 한산군수 이성중이 기린산 기슭에 있던 목은의 묘 아래에 사당을 짓고 이곡과 이색을 제향하며 두 분의 시호인 문효와 문정의 호를 따서 효정묘라 한데서 사액 되기 이전에는 현재 사당 이름과 같은 ‘효정사’라 하였다. 이후 20여 년이 지난 1597년 정유재란 때에 일본군에 의해 소실되자 1610년(광해군 2)에 한산면 고촌리에 서원을 복원하여 1611년 문헌서원으로 사액 되었다. 문헌서원이라는 액호는 우암 송시열이, 진수당 존양재 석척재 글씨는 동춘당 송준길이 쓴 것으로 유명하다. 문헌서원은 1969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 된 후, 2007년부터 2013년까지 5년간의 재정비 절차를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서원에서 보유 중인 문화유산으로는 강학공간 진수당인 문헌서원을 비롯해 장판각에 보관 중인 가정목은선생문집판, 목은 이색 선생 영당에 있는 목은 이색 영정, 목은 선생 신도비, 무학대사가 기린산 중턱에 자리를 잡아 주었다는 목은의 묘와 셋째 아들 종선의 묘가 있는 이색 선생 묘 일원 등이 있다.
또, 문헌서원과 문헌전통호텔 인근의 영모리에는 지금 목은학당수련관과 공원 등을 조성하는 문헌사색원 공사가 한창이며 그 공사장 앞 버스 정류장에는 영모리의 유래비와 목은 이색의 시조비가 건립되어 목은의 문향을 전하고 있다.
◆ 대전 목은이색선생영당
지난해 금산지역 문학 답사을 가다가 우연히 마주친 '목은이색선생대전영당’이라는 이정표를 보고 언제 시간을 내서 꼭 방문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1년여가 지난 후 그 근처 학교에 근무하는 이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주소와 사전지식을 얻고 특별히 시간을 내서 내비게이션에 의존해 인적이 드문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산중에 꼭꼭 숨겨져 있는 대전시 중구 옥계동 84번지에 위치한 목은 이색 대전영당을 찾았다.
영당 입구에는 ‘목은 이색 선조상’이 있고, 그 옆으로는 ‘목은선생 대전영당 건립약기’비가 있으며, 건립약기 뒷면에는 목은의 대표적인 한시 ‘부벽루’가 목은의 유묵과 함께 번역시가 새겨져 있다.
어제 영명사를 지나는 길에/ 잠시 부벽루에 올랐어라/ 텅 빈 성에 조각달이 떠 비추고/ 낡은 성벽에 구름만 하염없이 떠도네/ 한번 가신 임의 행차 다시 돌아오지 않고/ 님은 어느 곳에서 헤매고 있는가/ 돌난간에 기대어서 긴 한숨 짓는데/ 산은 여전히 푸르고 강은 무심히 흐르네 -목은 이색, 부벽루 한시 번역본
이 시는 목은 이색이 평양성을 지나다가 지난날 찬란했던 고구려의 모습은 사라지고 텅 빈 옛 성터만 남아 있는 모습을 보며 자연의 영원함과 대비되는 인간 역사의 유한함을 깨닫고 인생의 덧없음을 표현한 명시이다.
그러나 문학 외적으로는 이 명시가 목은영당 건립약기비 뒷면에 새겨져 보물찾기 해야 하고, 영당 자체가 비탈진 산중에 숨겨져 접근성이 많이 떨어져 있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실제 영정은 영당이 잠겨져 있어 보지 못했지만, 대전영당 건립약기에 의하면 이곳에 모셔져 있는 영정은 예산의 영정과 동일한 양식과 크기로 여말선초 공신도상형식으로 1844년에 이모한 것이다. 화상에는 선생의 문하생인 권근이 1404년에 지은 ‘목은선생화상찬’이라는 예찬문을 선생의 17대손 계부(啓溥)가 경서 하였고, 1995년 12월 4일 국가보물 제1215-4호로 지정되었다.
목은 영당은 대전을 비롯해 전국 15개 지역에 산재해 있는데, 우리 지역에는 서천 문헌서원, 덕산 루산영당, 부여 임천 목은영당, 청주 이색목은영당 등이 있다.
◆ 공주 동학사 삼은각
동학사는 713년 당나라 스님 상원조사가 지은 상원암에 연원을 두고 있는 역사와 전통이 깊은 사찰로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계룡산 동쪽 자락에 있다.
동학사 경내에는 다른 사찰과 달리 동계사, 숙모전, 삼은각 등 유학인의 초혼각이 있고 동학사 들어가는 길에는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목은 이색의 위패는 동학사 삼은각에 모셔져 있다. 삼은각은 1394년(조선 태조 3)에 길재가 고려 태조의 원당인 동학사를 찾아와 단을 쌓고 고려 왕과 스승인 정몽주의 제사를 지내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1399년(정종 1)에 문신이자 천문학자인 고려 유신 유방택이 단을 정비한 후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 삼은의 초혼제를 지냈으며, 후에 유방택, 이숭인, 나계종의 위패를 추가로 모셔 오늘에 이르렀다.
이렇게 우리 지역 곳곳에 있는 목은 이색의 흔적들을 소중히 간직하면서 그가 남긴 충절과 문학의 향기를 재음미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참고문헌>
1. 방경태, "조선 선비의 큰 스승 목은 이색의 충절과 문향", 금강일보, 2024.7.1일자. 11면.
- 금강일보,
- 2024.7.1일자. 1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