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항일독립운동가이자 여성교육자인 차미리사 여사의 생애와 업적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1.03.06 02:41

                                                        항일독립운동가이자 여성교육자인 차미리사 여사의 생애와 업적


   차미리사(車美理士, 1879-1955)는 1879년 한성부 서부 공덕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들을 원했는데 딸이 태어났다고 섭섭하게 여겨 '섭섭이'라고 불렀다.
   18살이 되던 해 결혼했는데, 결혼한 지 3년만에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되었다. 홀로 된 처지를 비관하던 차에 고모가 권유하여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거기서 차미리사는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처음으로 교육활동을 했고, 기독교인이 되어 '미리사(Mellisa)'라는 세례명도 받았다.  개신교에서는 세례명을 따로 주지 않지만, 이 시기 구한말에서는 교회에서의 활동은 차미리사가 자아의식과 사회의식을 형성하는 데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말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러던 중 같은 교회에 다니던 여자 신자 하나가 차미리사에게 미국으로 유학을 가라고 권유했다. 차미리사도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미국 유학을 다녀온 한국 최초의 근대 여의사 박에스더를 보고 자신도 유학을 가리라 결심했다. 그래서 호머 헐버트 목사의 도움을 통해 1901년 23살의 나이로 중국에 유학을 갔다. 중국 상하이에 도착한 차미리사는 감리회 소속의 학교에서 4년 동안 영어, 중국어, 신학 등을 공부했다.  중국 유학을 마친 뒤 이번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유학을 가 1912년까지 8년 동안 지냈다. 처음 6년 동안은 사회운동에 헌신했고, 마지막 2년은 공부를 했다.
    미국에서 차미리사는 학업은 물론이고 교육운동, 계몽운동, 국권회복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차미리사는 1905년 미국 동포들과 함께 '대동교육회'라는 교육단체를 결성했다. 그리고 1907년에는 하와이로 가서 그곳의 한인 노동자들을 위한 사회봉사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노동자들의 숙식을 마련해주고 선교활동을 펼쳤으며, 구직을 돕고 교육도 했다. 1908년에는 샌프란시스코의 한인 가정을 규합하여 '한국부인회'를 창립했다. 차미리사는 이 단체의 회장을 맡아 국내에 고아원을 설립하는데 힘썼다. 그래서 각지의 모금과 성원을 통해 평안남도에 '대동고아원'을 세울 수 있었다. 또 조선인들을 위한 신문 <대동공보>를 간행하는데 참여하여 거기에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을 거치면서 차미리사는 사회운동의 경험을 쌓음과 동시에 조국의 현실과 미래를 고민하였다.
    1910년부터 2년 동안 미주리 주의 스캐리트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후, 차미리사는 1912년 8월 조선으로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미국인 감리회 선교사 조세핀 캠벨 부인이 서울에 세운 여학교 배화학당에 교사 겸 선교사로 부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특히 여성교육과 민족교육에 신경을 써서 학생들이 민족의식을 잃지 않도록 했으며, 배화학당 동료 교사인 남궁억을 도와 무궁화를 수놓는 작업을 했다. 학교 밖에서의 교육에도 적극적이어서, 방과 후에도 거리로 나가 교육활동을 했다. 차미리사는 동네의 여자들을 불러모아 조그마한 야학을 열었고, 부녀자들과 여자아이들에게 연필과 공책을 사주면서까지 한글을 가르쳤다. 3.1 운동 이후 일제와 학교당국의 압력으로 배화학당 교사를 그만둔 후에는 더욱 더 자유롭고 열성적으로 여성계몽운동에 나섰다.
   전 조선 일천만 여성은 다 내게로 오너라! 김미리사한테로 오너라!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성, 과부된 여성, 남편에게 압제받는 여성, 천한 데서 사람 구실을 못하는 여성, 뜨고도 못 보는 무식한 여성들은 다 오면은 어두운 눈 광명하게 보여주고 이혼한 남편 다시 돌아오게 해주마.
   그저 고통받는 여성은 다 내게로 오라!
    3.1 운동 이후 여성들의 활동과 계몽운동은 이전에 비해 적극적으로 일어났다. 이 때에는 여성들의 자아와 의식이 신장하는 시기였기에 많은 여성들이 여성계몽운동에 호응하고 참여하고 있었다. 여기에 동참한 차미리사는 1920년 여성운동가들과 함께 '조선여자교육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단체 내의 여성운동가들로 구성된 강연단을 꾸려서 전국으로 순회강연을 다녔다.
    이 순회강연은 여자들은 물론이고 남자들에게도 관심을 끌었다. 1920년 6월 5일에 있었던 강연회는 강연 공간에 비해 방청객들이 너무 많이 와서, 강연을 다음으로 미뤄야 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11일 다시 열린 강연회에 군중 수천여 명이 건물 밖 마당까지 몰려들었다고 한다. 강연은 1920년 9월 말까지 전국 각 도시에서 이어졌다.
    이 강연은 완전히 여성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거의 최초의 교육활동이었다. 거기에 깊은 문제의식과 높은 강의수준, 그리고 시민들의 호응이 덧붙여져 강연회는 인기가 많았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 차미리사를 비롯한 강사들은 여성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설파하며 여성교육이 민족운동의 일환임을 강조했다. 또 성차별의 철폐와 여성해방을 줄기차게 주장했다.
   이런 활동 외에도 언론활동과 선전활동에도 열심이었다. 차미리사와 조선여자교육회는 1920년 발행된 잡지 《여자시론(女子時論)》을 인수하여 여성잡지의 선두에 섰다. 이 잡지는 순한글로 이루어진 잡지로 사람들이 읽기에 쉬웠다. 여기서 차미리사는 '여성개조'와 '여성해방'을 강조하는 글들을 잡지에 실었다. 또 앞에서 언급한 강연회를 전국에 펼쳐져 여성운동을 홍보했고, 1921년에는 여성들로 구성된 극단을 만들어 전국에 순회공연을 하기도 했다. 여기에 여성들과 시민들의 응원과 지원금이 쇄도했다.
   차미리사는 또한 가정에서 가사를 맡고 있는 대부분의 여성들에 주목하여, 이들을 상대로 1920년 4월 19일 '부인야학강습소'를 열었다. 이 강습소는 이전의 야학을 발전시킨 형태로 3.1 운동 이후 등장한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이자 여성들이 자체적으로 설립한 교육기관이었다. 강습소에서 차미리사는 여교사들과 함께 여학생들을 가르쳤다. 강습소에서는 사정이 딱한 학생들의 처지를 고려하여 무료로 수업을 해주었고, 수업에선 실용적인 일반 상식들을 가르쳤다.
    시가로부터 무식하다고 핍박받는 여성들이 학교를 많이 찾았다. 남편과 시부모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학구열은 대단하여 처음 10명으로 시작했던 강습소는 1920년 10월 경에는 160여 명을 가진 학교로 커졌다. 이 많은 학생들을 감당하기 위하여 차미리사와 조선여자교육회 회원들은 강연과 공연을 통해 새 학교를 짓기 위한 모금활동을 벌였다.
    그리하여 1921년에 새로운 학사를 세우고 1923년부터는 '근화(槿花) 학원'라는 이름을 학교에 붙여 정비하였다. '근화'는 무궁화를 의미하는 말이며, 근화여학교는 오늘날 덕성여중덕성여고덕성여대의 전신이 되었다. 차미리사는 근화여학교의 교장으로 부임했다.
    나는 가정도 없고 아무런 일가친척도 없다. 하나 두었던 딸은 어디에 있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러니 이 근화는 내 가정이고 이곳의 학생들은 모두 내 딸들이다. 내 한 몸을 오로지 이 학교와 학생들에게 바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하자.
    차미리사는 근화학원의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근화학원을 위해 일했다. 근화학원은 여성운동가들과 후원인들의 도움 속에서 많은 여학생들을 졸업시켰다. 1925년에는 근화여학교로 승격하여 정규교육도 실시했다. 근화학원을 이끄는 차미리사의 여성교육은 '배움의 기회를 잃은 가정부인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는' 교육이었다. 그래서 매우 헌신적으로 여성들의 교육에 임했다.  당시 차미리사가 생각해 온 교훈은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였는데, 주체적 삶, 창의적 지식, 실천적 사고을 강조한 것이었다.
    또한 차미리사는 실용적인 여성교육을 고민했다. 추상적인 고등교육보다는 일반적인 보통교육을 보급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여겼다. 국민 모두에게 교육의 기본적인 혜택이 돌아가야 한다고 믿고 근화여학교에 '실천교육'과 '실업교육'을 적용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1926년부터 여학생들에게 사진, 재봉, 자수 등을 가르쳤고 학교의 이름도 1935년에 '근화여자실업학교'로 바꾸었다.
    하지만 차미리사의 근화여학교 경영이 언제나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1930년대가 되면서 학교는 재정난에 휩싸였고, 이를 극복하고자 단행한 여러 정책들은 여학생들과 세간의 비판을 샀다. 대표적인 예로는 재정난을 이유로 학급 수와 교원 수를 감축하려고 했거나, 근화여학교에 빚을 지고 있는 다른 여학교의 학사를 차압한 일이었다. 이로 인해 학교에 2차례의 동맹휴학이 발생했고, 차미리사는 '딱장대'라는 불미스러운 별명을 얻어야 했다.
    이런 일들에도 불구하고 차미리사는 근화여학교의 재정난 극복에 앞장서서 1934년 근화여학교를 재단법인으로 만들 수 있었다. 차미리사는 이를 축하하며 "조선의 딸들과 같이 울다가 세상을 떠나겠다." 하며 눈물을 흘렸다. 1936년부터 근화여자실업학교는 첫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차미리사는 '김미리사'에서 자신의 원래 성인 '차미리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편 일제의 탄압도 학교에는 큰 부담이었다. 특히 학교 이름을 두고 '무궁화'인 것이 마음에 안 든다고 난리였다.염병하네 당시 학교 내에는 무궁화를 심었고, 무궁화를 자수 놓는 교육이 있었으며, 학생들은 무궁화가 수놓아진 교표를 교복에 달고 다녔다. 이에 일제는 학교를 폐교시키겠다며 온갖 압력을 가했고, 차미리사는 학교 이름을 '덕성(德成)'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교표만은 무궁화를 그대로 써서 일제에 마냥 굴복하지만은 않았다.[17]
    학교의 개명을 이끌어 낸 일제는 이제 탄압의 목표를 차미리사로 향했다. 일제는 "황국신민서사를 외지도 못하면 교장 자격이 없다", "국어 상용도 못하는 벙어리이니 훈시를 못할 것이다", "요시찰인 명부에 있으니 물러나지 않으면 인가를 취소하겠다"라는 식으로 차미리사가 교장직을 내려놓을 것을 강요했다. 차미리사는 이런 공격에도 여러 번 버텼으나 결국 1940년 8월 교장에서 물러났다. 물러난 이후 덕성여자실업고등학교는 황국 신민화 교육에 순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야 만다.
    차미리사의 뒤를 이어 학교 교장이 된 사람은 송금선이라는 여자였는데, 친일인명사전에 오를 정도로 유명한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 이 작자는 광복 이후 현재의 덕성여대에서 초대 학장을 지냈는데, 송금선의 자식들이 이 학교를 족벌운영을 하는 동안 덕성여대의 창립자로서 여겨져 오고 있었다. 1997년 이에 반대하는 학내분규가 발생하여 2000년에는 차미리사가 덕성여대의 창립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차미리사는 당대의 여성교육자 중에는 때 묻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광복 이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와 관계를 맺으며 이승만과는 거리를 두었다. 신탁통치 논쟁이 벌어졌을 때에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신탁통치를 반대했다.
    이후 남북 간의 분단이 기정사실화되자 다른 지식인들과 함께 남북협상을 지지 및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남북은 분단되었고 6.25 전쟁이 터지고야 말았다. 휴전 이후 2년 만인 1955년 6월 1일, 차미리사는 "내게는 한 가지 한이 있다. 온전한 독립을 못 보고 죽는 것이 유한이로다."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당대의 페미니스트였던 나혜석과는 생각에 차이가 있었다. 나혜석이 자유연애와 가정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했다면, 차미리사는 학교 학생들의 중매 결혼을 도왔다. 다만 남자를 볼 때 남자의 생활력을 기준으로 중매를 섰다고 한다.
   유명한 공산주의 운동가였던 박헌영이 차미리사의 <여자시론>에 기자로 활동한 적이 있다고 한다.
    계몽운동가였으나 친일파였던 윤치호가 차마리사의 교육활동을 지원해주었다.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서 차미리사를 크게 칭찬하며 평생 후견인이 되어주었다. 
    덕성여중덕성여고덕성여대의 전신을 세운 분이기에, 이 학교들은 차미리사를 설립자로 여기며 존경한다. 2003년 4월 19일에는 부속연구소로 차미리사 연구소를 세웠고, 같은 해 12월 23일에는 덕성여대 교내에 차미리사 기념관을 설립했다.
    2002년 정부는 차미리사에게 건국공로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 참고자료>

   1. <차미리사 평전 - 일제강점기 여성해방운동의 선각자>, 한상권, 푸른역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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