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칼럼니스트) 신상구(辛相龜)
'노론사관'이라는 용어는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인 이덕일 박사가 저술한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이덕일의 한국사 4대 왜곡 바로잡기)』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주한 연구위원도『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이라는 책에서 노론 음모론을 주장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76명의 친일파 인사들이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후작, 자작, 은사금을 받았다. 76명 중 64명이 당파가 확실한데, 그들 중에서 56명이 노론에 속한다.
친명사대주의와 성리학 유일주의로 똘똘 뭉친 노론사관은 식민사관의 원조이다. 노론사관은 조선 후기사를 왜곡하고 일제의 식민사관으로 전락했다.
식민사관은 일제가 한국침략과 식민지배의 학문적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조작해낸 역사관이다.
식민사관에 기초를 둔 한국사 연구는 19세기 말 도쿄제국대학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신공왕후의 신라정복설과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한국역사를 만주에 종속된 것으로 보는 만선사(滿鮮史) 이론, 당시의 한국 경제를 일본 고대의 촌락경제수준으로 보는 이론 등을 내세웠는데, 이러한 논리는 20세기 초 조선침략이 본격화되자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정체성론, 타율성론으로 대표되는 식민사관의 토대가 되었다.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은 한국의 주체성을 상실한 사관으로 한국사의 시공간을 축소시켰다. 시간적으로는 한국사를 1,500-1,600으로 축소시켰고, 공간적으로는 한반도로 축소시켰다. 이는 만선사관과 동북공정과 맥을 같이 한다.
만선사관(滿鮮史觀)은, 20세기초에 일본 학자들에 의해 주장된 한국사에 대한 관점으로, 만주와 조선의 역사는 하나이며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는 만주에 종속적임을 그 내용으로 한다. 만선사(滿鮮史)는 중국의 만주에 대한 영향을 제한하였고, 한국 문화의 독자성과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한반도와 만주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지적이 있다.만선사관을 주장했던 대표적인 학자로는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 도리야마 기이치(鳥山喜一) 등이 있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되었다. 노론은 경종 시기의 잠시를 제외하면 조선 말기까지 조선을 장악하였으며 조선의 발전에 심각한 폐해를 끼쳤다.
노론 음모론에 따르면, 노론은 사도세자 시대에 시파와 벽파로 분리되는데 벽파가 개혁군주 정조를 독살하고 정권을 잡는다. 그 후 지속적으로 정권을 잡은 노론 벽파는 세도정치를 펼치면서 조선을 썩게 만들다가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팔아먹고 친일파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환언하면, 노론 음모론자들은 기존 사학계와 적대적인 민족사학자들과 결합하여 주류 사학 = 노론사관 = 식민사관이라는 도식화된 주장을 한다.
순조 대부터 정권을 장악한 안동 김씨 및 풍양 조씨 등의 세도정치 가문들은 모두 노론 시파에 속하며, 오히려 노론 벽파는 정조가 사망한 직후 잠시 정권을 잡았다가 시파의 역공에 거의 숙청당했다. 게다가 붕당정치가 끝나고 세도정치가 들어서게 된 책임은 오히려 탕평책을 빌미로 왕권 강화에 지나치게 힘써서 신권의 견제 기능을 무너뜨린 영조와 정조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정조와 대립했다는 이유만으로 세도정치의 책임을 노론 벽파에게 전가하고 있다. 게다가 엄밀히 말하면 벽파는 反정조 세력이라 부르기도 뭣하다. 정조의 대리청정과 즉위를 지원사격한 김종수, 김귀주 등이 벽파였고 뒤의 행보를 보면 오히려 정조는 벽파를 보호했다. 벽파 수장 김종수를 일컬어 정조는 "내가 그의 목숨을 몇번이나 살려준지 모르겠다."라고 할 정도로 그의 뒤를 봐주었다. 그래서 김종수는 정조 즉위 후의 최측근 그룹이라 할 수 있는 동덕회 4인방 중 한 명으로 꼽히는데, 나머지 세 명이 정민시, 서명선, 그리고 홍국영이라는 점을 보면 김종수가 차지하는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심환지만 해도 심환지 어찰이니 뭐니 해서 反정조라는 공식은 거의 깨졌다.
굳이 지역적으로 당파를 구분하자면 노론은 경기-충청도 기반이고, 영남은 남인과 가까웠다. 당장 남인에서 추앙받은 이황과 류성룡이 어디 출신인지 생각해보자. 경상도 지방에도 노론 집안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나 정말로 손에 꼽힐 정도로 드물다. 무엇보다도 경종 이후 이인좌의 난 등으로 인해 경상도는 반역향이라 하여 정 2품 이상의 벼슬을 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현대 경상도 지역에서 양반 문화가 잘 남아 있는 이유로 조선 후기에 중앙 진출의 길이 완전히 막힌 영남 지역의 양반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해석까지 나올 정도이다. 참고로 안동 김씨 가문은 어디까지나 본관이 경상도 안동일 뿐이지 실제 정치적 기반으로서의 경상도와는 관련이 없는 가문이다.
그리고 위에서 잠시 언급한 영호남 지역감정 문제의 경우에도 말이 안 되는 것이, 조선시대의 호남 지역의 사대부들은 영남과 마찬가지로 동인/남인에 가까웠다. 단지 정여립의 난 때 서인인 정철의 주도로 호남 유림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받아 그 세력을 잃은 것이며, 시기적으로 좀 차이가 날 뿐이지 영남 유림과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
십만양병설의 경우 의도적인 역사왜곡 보다는, 서인 측에서 양병설을 포함하는 이이의 개혁/경장의 주장들을 언급하고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다가 생긴 착오에 가깝다. 불행히도 2014년 현재 노론 음모론은 주로 대중적인 서점들의 판촉을 기반으로 한국 대중들에게 널리 전파되고 있는 실정이며 이덕일 소장의 주 레퍼토리인 조선왕 독살설을 차용한 방송 매체들과 영화들이 우후죽순 제작되면서 이러한 상황에 기름을 붓고 있다. 전술했듯 허점이 많은 이론이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지만 현대 주류 학계를 각종 부패와 음모의 온상으로 묘사하는 걸 절대 빼먹지 않는 노론 음모론의 특성상 학계 차원의 반박만으로는 상황을 진정시키는 데에 무리가 있다. 오히려 조선사 및 근대사를 노론 음모론 계열의 서적으로 처음 입문한 이들에 한해서는 학계 차원의 반박이 주류 학계에 대한 더 큰 불신, 그리고 그에 따라 결국 더 심한 역효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대중들에게 널리 퍼진 잘못된 노론사관의 적절한 예시글. 일단 사도세자 노론 흑막설을 대놓고 쓴 글쓴이의 글 내용뿐만 아니라 밑에 댓글들 또한 노론사관 운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무튼 300년 전 노론사관이 100년 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식민사관으로 이어지고, 지금까지도 학문 권력을 독점하고 있어, 우리 역사는 계속 왜곡되고 있다. 그런데 민족사학은 세력이 약해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의 우리 역사 왜곡을 막을 수가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참고문헌>
1. 이덕일,『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 이덕일의 한국사 4대 왜곡 바로잡기』, 역사의아침, 2009.
2. 이주환,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 역사의아침, 2011.9.30.
<필자 신상구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아우내 단오축제』,『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997)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 등 58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