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초 홍명희의 생애와 업적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칼럼니스트) 신상구(辛相龜)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는 1888년 충북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인산리)의 풍산 홍씨 가문에서 홍범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증조부 홍우길은 고종·철종 때 대사헌, 이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쳤고, 조부 홍승목은 중추원 참의 등을 지냈으며, 아버지 홍범식은 금산군수를 지내다가 1910년 한일합병조약 체결 소식에 통분하여 자결했다.
홍명희는 괴강에서 멱을 감고 낚시하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대대로 중앙관직에 나아간 명문가의 자제답게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한문교육을 받았고 <수호지>, <삼국지>, <춘추> 등을 외우다시피 해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당시의 풍습에 따라 13세 때 세 살 위인 아내와 혼인했고 서울의 중교의숙에 들어가 일본어와 수학 등 신학문에 접했다. 중교의숙에 다니던 16세에 홍명희는 장남 기문을 보았다. 나이 차가 겨우 15세밖에 나지 않는 이 ‘형제와 같은 부자’는 기문이 성장한 후 ‘부자간에 술도 같이 마시고 담배도 마주 피운다’고 일가에 소문이 날 정도로 아버지와 아들이라기보다 사회문화적·정치적 견해를 나누는 동반자처럼 지냈다고 한다.
중교의숙 졸업 후 잠시 귀향했던 홍명희는 곧 동경으로 유학, 1907년 다이세이 중학 3학년에 편입했다. 1910년까지 다닌 이 학교에서 그의 성적은 항상 1, 2등을 할 만큼 우수했으며 이 무렵부터 서양과 일본의 문학작품을 위주로 본격적인 독서를 시작했다. 그는 ‘명랑하고 경쾌한 프랑스 문학’보다 ‘침통하고 사색적인 로서아 작품’을, 그중에서도 ‘꼭 어떤 노인이나 선생이 설교하는 것 같은’ 톨스토이보다 도스토옙스키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동경 시절 홍명희는 문일평, 이광수, 최남선 등과 교유했다.
한편 ‘벽초’와 더불어 홍명희의 호였던 ‘가인’에 관해서는 그의 젊은 시절의 일면을 엿보게 하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홍명희는 동경 유학 시절 바이런을 애독한 나머지 그의 작품 「카인」의 음을 따서 호를 가인(假人)이라고 지었다. 그런데 나중에 중국에 가서 보니 ‘假人’이 ‘짜렌’으로 읽히는 것을 알고 발음이 비슷한 可人(커렌)으로 고쳤다. 그러나 그후 영어 성경을 읽으면서 카인이 ‘고현놈’임을 알게 되자 그것도 집어치웠다는 것이다. 또 이 시기 젊은 홍명희는, 오로지 어른 섬기는 일과 양반 체통 따지는 일만을 중요시하여 젊은이들을 묶어두는 전통사회의 인습에 대한 반감에서 차라리 ‘후레자식 구락부’ 같은 것을 모아보는 게 일종의 묘안이 되지 않을까 공상한 적도 있다고 한다.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된 1910년, 홍명희는 23세의 나이로 귀국했다. 금산군수를 지내던 그의 아버지 홍범식이 국치를 당한 날 관아에서 자결한 사건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이후 식민지시대와 해방 후에 홍명희가 했던 행동이나 선택, 그의 삶에서 지남침 역할을 했다.
아버지의 삼년상을 마친 홍명희는 1912년 정인보와 함께 홀연 중국으로 떠난다. 서간도를 거쳐 상해에 주로 머물었던 중국생활에서 그는 문일평, 박은식, 조소앙, 김택영, 신규식, 신채호 등을 만났다. 중국에서의 활동내용은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모종의 독립운동을 시도하거나 궁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후 1914년 다시 남양으로 가서 주로 싱가포르에 자리를 잡고 ‘광복운동의 자금 기반 마련’을 모색했다고 한다.
1918년 중국과 남양을 떠도는 8년에 걸친 방랑을 마치고 귀국한 홍명희는 약 반 년 동안 아들의 공부를 돌보는 등 모처럼 평온하게 지냈다. 그러나 이듬해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3월 18일 동부리 자택 사랑채에서 숙부 용식과 태식, 아우 성희 그리고 이재성, 김인수 등과 모의하고 3월 19일 충청북도에서 처음으로 괴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투옥되어 1년 가량 옥살이를 했다. 이 무렵부터 그의 집안형편은 몹시 나빠져서, 아들 기문의 글에 따르면 ‘초년 이후 고생으로 일관한 우리 아버지언만은 참말로 절박한 고생의 역사는 이때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출감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홍명희는 일가를 이끌고 서울로 이사했다. 그는 조선 에스페란토협회 회원으로서 선전부 일을 하기도 하면서 휘문고보와 경신고보 교사를 지내거나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에 출강하기도 했고 한때는 조선 도서주식회사에 근무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24년에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초빙됨으로써 언론계 생활3)을 시작한다.
「동아일보」에 재직하는 동안 홍명희는 문예분야에 관심을 쏟아 한국 신문 사상 최초로 신춘문예 제도를 시작하거나 큰 상금을 걸고 『춘향전』을 현대 소설수법으로 개작한 작품을 공모하기도 했다. 스스로 백옥석(白玉石)4)이라는 필명으로 동서고금의 이색적 지식을 소개하는 칼럼을 연재했으며 중국에 망명중이던 신채호의 문예평론 ‘낭객의 신년만필’이나 ‘전후삼한고’,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대사건’ 같은 조선고대사 관계 논문들이 실리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동아일보」가 다시 개량주의적 노선으로 돌아가자 홍명희는 사직서를 내고「시대일보」로 자리를 옮겼다.
「시대일보」에서 사장으로 재직할 당시인 1927년 홍명희는 신간회 창립에 관여하면서 사회운동에 적극 투신하였다. 신간회 일은 그가 전생애를 통해 가장 큰 기대와 애착을 가지고 임했던 사회활동이었다.
「시대일보」에서 홍명희는 편집국장을 거쳐 곧 부사장이 되었다가 다시 사장이 되었다. 진정한 민족신문을 만들자는 의욕으로 동지들을 끌어모은 그와 더불어 「시대일보」는 한때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함께 3대 민족지 정립시대를 맞았다. 그러나 재정난을 넘어서지 못하고 1926년부터 휴간했다가 끝내 폐간되고 만다.
홍명희는 이처럼 상경 후 교사와 언론인으로서 사회활동을 하는 한편, 민족해방운동의 한 돌파구로서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게 된다. 아들 기문이 쓴 글에 따르면 1920년대 초부터 ‘벌써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해야 된다고, 그렇게 고생하시는 중에도 원서를 얻어다가 읽으시고’ 했다고 한다. 또 홍명희는 1923년 결성된 급진적 지식인들의 사상단체인 신사상연구회5)에 들어가 활동을 하기도 했다. 신사상연구회는 이듬해에 화요회로 명칭을 바꾸면서 마르크스주의 행동단체로 성격을 바꾼다. 홍명희는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내면서 화요회 간부로도 활동했고 또 화요회를 주축으로 사회단체들의 통합을 추진하기 위해 결성된 정우회에도 참여했다.
다른 한편으로 1925년에는 조선사정조사연구회에도 참여했다. 이 연구회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일부 민족개량주의자들까지 가담하여 ‘조선의 현실을 조사 연구함으로써 민족정신 보존에 노력’하기 위해 창립한 학술단체였다. 이처럼 서로 성향이 다른 단체들에 관여했던 것은 얼핏 의아하게 느껴지지만 그가 민족해방과 국권회복, 그것을 이루기 위한 민족적 통합이라는 큰 과제 아래 좌·우 진영과 분파를 아우르는 민족통일전선에 관심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시대일보」 폐간 후 홍명희는 조만식의 뒤를 이어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겨울방학에 상경했다가 신간회 창립 준비작업과 조직사업에 몰두하게 되면서 채 1년이 못되어 학교 일을 그만두었다. 1927년 2월에 창립된 신간회는 반제민족해방이라는 큰 과제 앞에 좌와 우, 중도세력이 이념과 분파를 벗어나 모두 힘을 합친 민족통일전선체로, 몇 차례 노선을 바꾸며 1931년 5월까지 5년 동안 존속했다. 홍명희는 조직부 총무간사로서 신간회의 창립과 조직확대기를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신간회 일은 그가 전생애를 통해 가장 큰 기대와 애착을 가지고 임했던 사회활동이었다.
이 무렵 홍명희는 본격적인 작가생활을 시작하기 전이었으나 문사로 간주되고 있었고 프로문학 진영에서 선배로 대접받고 있었다. 그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에도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동정자’의 위치에서 관련을 맺고 있었다. 1926년 1월에 나온 카프의 기관지 『문예운동』 창간호 첫머리에 ‘신흥문예의 운동’이라는 그의 평론이 실렸다. 내용상 창간사에 해당하는 이 글에서 그는 ‘유산계급 문학에 대항한 문학, 생활을 떠난 문예에 대항한 생활의 문학, 구계급에 대항한 신흥계급의 사회변혁의 문학’을 주장하였다.
한편 1928년 11월 21일부터 홍명희는「조선일보」에 장편 대하소설 ‘임꺽정’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임꺽정’ 연재는, 홍명희를 비롯한 신간회 간부들이 이듬해 12월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해 민중대회를 추진하다가 대량 검거 투옥되면서 중단되었다. 1932년 작가가 출소한 후 다시 연재되었지만 그후에도 작가의 건강문제로 중단과 속개를 거듭하며 13년 동안이나 집필되었고 해방 후 내용상 미완인 채 10권의 단행본으로 묶여 출간되었다.
조선 중기의 큰도둑 임꺽정을 내세워 조선시대 서민의 생활양식을 총체적으로 엮어낸 이 소설은 일제강점기 최대의 문학적 성과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소설 『임꺽정』은 조선사회의 만화경인 동시에 고대어에서 현대어로, 궁중어에서 서민어로, 양반 말에서 상놈·백정의 말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풍부하게 구사된 말들로 인해 우리 겨레의 어휘의 보고(寶庫)라고까지 불린다. 뿐더러 조선다운 문장과 문체, 조선의 인물들, 조선 이름, 조선의 풍속 등 온통 ‘조선 것’의 총집합이기도 하다. 홍명희 자신은 ‘사건이나 인물이나 묘사로나 정조로나 모두 남에게서는 옷 한 벌 빌어입지 않고 순 조선 것’으로 쓰려 했으며 ‘조선 정조에 일관된 작품’이 목표였다고 했다. 해방 후 주위 사람들이 ‘임꺽정’을 끝맺으라고 권유하자 그는 “임꺽정이가 독립 후인 오늘날도 내 뒤를 따라다닌대서야······”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여기서 그가 이 소설을 당대의 상황에 맞서는 활동의 일환으로 썼음을 엿볼 수 있다. 말하자면 소설 ‘임꺽정’은 1930년대라는 조선 것 말살의 시대에 대한 그의 대응이었다.
1935년 그는 4대문 밖인 마포 한강변 대흥동으로 이사를 갔다. 일제의 광기를 피해 반쯤 은둔했다. 1937년 중일전쟁 도발 이후 전시총동원체제가 깊어졌다. 다시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 244-1번지(현재 서울 도봉구 창동 820번지, 창동초교 뒤)로 은둔했다. 창동에는 가인 김병로, 위당 정인보, 고하 송진우 등 요시찰인물이 살고 있었다. 일제는 창동주재소에 고등계 형사를 상주시켰다. 사람들은 벽초와 만나는 것을 꺼렸다. 마주치면 전봇대 쪽으로 돌아가 오줌 누는 척하는 지인도 있었다고 한다. 그 꼴을 당하며 벽초는 심산 김창숙 선생에게 이런 마음을 전한다. “관 뚜껑이 닫히기 전에는 항복도 하지 않고 모욕도 받지 않으리라.” 그 당시 지기였던 이광수, 최남선 등은 이미 일제의 나팔수가 되어 있었다. 벽초는 모든 집필활동을 중단했다. <임꺽정>의 신문 연재도 1939년 7월 영원히 중단됐다.
미완인 채 ‘임꺽정’ 연재를 마친 1940년 이후 해방되기까지 홍명희는 사회활동을 하지 않고 은둔했다. 1945년 ‘두 아들을 붙안고 대성통곡을 하며’ 해방의 날을 맞은 58세의 홍명희는 이듬해에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해방 후 미군정하의 남한은 각종 정치 그룹이 난립하고 친일세력이 다시 고개를 들면서 신탁통치문제 등 사회·정치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런 상황에서 정치활동에 뛰어든 홍명희는 1947년 민주독립당을 결성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민주독립당의 창당결의문을 보면 우리 민족의 ‘완전 자주 독립의 필수 전제조건’인 ‘탁치 없는 독립’과 ‘미소 양군 철퇴’를 환영하며 남북을 막론하고 ‘외세에 편승하는 반민족적 행동으로 삼천만 동포의 염원인 자주통일과 완전 독립을 저해하는’ 일체의 행위와 남북분단의 고정화를 경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48년 4월 10일,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북쪽으로 간 홍명희는 그 길로 북한에 주저앉았다. 이후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을 거쳐 부수상을 지냈고 과학원 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등 여러 직책을 거치다가 1968년 만 80세로 세상을 떠나 북한 혁명열사릉에 묻혔다.
홍명희의 사상성향에 대해서는 배타적 민족주의자로 보는 견해와 사회주의자로 보는 견해가 맞서 각각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와 증언들을 제시하고 있다. 또 그가 비밀 공산당원이었다는 설과 한때 공산당에 가입했으나 축출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그가 북쪽을 선택한 데는 ‘금산군수 홍범식의 아들’ 홍명희는 결코 친일파가 다시 세력을 얻어가는 세상에서는 살 수 없었을 것이며, 그에게 중요한 기준은 좌냐 우냐가 아니라 애국이냐 매국이냐였으리라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홍명희를 접했던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도 단아한 학자’, ‘소문난 독서가’, ‘선비형의 인물’, ‘나서기 싫어하고 지도자연 하지 않는 사람’, ‘용감하게 나아가지는 못하나 날카롭게 보고 굳게 지키는 분’ 등의 말로 그를 표현했다. 월북 후 오랫동안 묻혀 있던 그의 이름과 ‘임꺽정’은 1985년 한 출판사에서 『林巨正』 10권을 발간함으로써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충북 괴산군 제월리에 남아있는 벽초 홍명희의 옛집은 근래에 곧잘 문학기행 코스로 꼽히는 곳이다. 제월리 산수골 마을 안쪽으로 쑥 들어간 곳에 있는 홍명희의 옛집은 지금 사랑채 하나만 남아 있다. 난간 둘린 누마루와 마루 딸린 방 세 개, 마루 없이 커다란 방 한 개로 이루어진 사랑채의 규모와 계단 등을 보면 본디 꽤 큰 집이었을 듯하다. 그러나 뒤쪽에 있던 안채는 다 뜯겨 없어져 밭이 되었고 밭가에 세워진 자그마한 돌에 ‘작가 홍명희가 태어나 자란 고향’이라는 명문이 적혀 있다.
벽초 홍명희의 혼이 깃든 제월대에는 홍명희 문학비가 서 있다. 낮은 기단 위에 다섯개의 원기둥이 둘러쌓인 사각형 모양의 비에는 한글과 한자로 ‘벽초 홍명희 문학비(碧初 洪命憙 文學碑)라는 제목 아래 벽초 선생의 캐리커쳐가 그려져 있다.
해마다 괴산에서는 우익 인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홍명희 문학제가 개최되어 홍명희의 문학정신을 기리고 있다.
벽초 홍명희는 정치인이기에 앞서 문인, 언론인, 독립운동가, 사회운동가였다. 부친의 뜻에 따라 좌우,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모두가 단합해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이루고자 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정치적으로는 우유부단하게 비쳤다. “용감하게 나아가지는 못하나 날카롭게 보고 굳게 지키는 분”이라고 아들 홍기문은 평했고, 벽초 자신도 “내가 다른 데는 유약해도 무엇이든지 안 하는 데는 강하다”고 자평했다. 그는 눈 밝은 평론가 양건식이 평한 것처럼 천상 원칙과 양심에 투철한 선비였을 뿐이다.
벽초 홍명희는 최남선, 이광수와 함께 조선 신문화의 삼재라고 불린다.
아버지 홍명희와 함께 북한으로 간 홍기문은 국어학자의 길을 걸었다. 그는 신라 향가 연구의 권위자가 되었으며 조선조 실록과 팔만대장경 등의 국역작업을 하는 등 국어학 분야에 많은 공적을 남겼고 김일성대학 교수, 사회과학원 부원장을 지내다가 세상을 떴다.
<참고 문헌>
1. “벽초 홍명희의 옛집”『답사여행의 길잡이 12 - 충북』초판, 동베개, 2003.
2. 이웅재, “벽초 홍명희의 혼이 깃든 괴산읍 제월1리”, 괴산자치신문, 2010.10.21일자.
3. 곽병찬, “제월대 영화담에 어린 벽초, 선비의 초상”, 한겨레신문, 2014.12.17일자. A29면.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아우내 단오축제』,『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997) 등 4권.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 등 58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증조부 홍우길은 고종·철종 때 대사헌, 이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쳤고, 조부 홍승목은 중추원 참의 등을 지냈으며, 아버지 홍범식은 금산군수를 지내다가 1910년 한일합병조약 체결 소식에 통분하여 자결했다.
홍명희는 괴강에서 멱을 감고 낚시하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대대로 중앙관직에 나아간 명문가의 자제답게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한문교육을 받았고 <수호지>, <삼국지>, <춘추> 등을 외우다시피 해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당시의 풍습에 따라 13세 때 세 살 위인 아내와 혼인했고 서울의 중교의숙에 들어가 일본어와 수학 등 신학문에 접했다. 중교의숙에 다니던 16세에 홍명희는 장남 기문을 보았다. 나이 차가 겨우 15세밖에 나지 않는 이 ‘형제와 같은 부자’는 기문이 성장한 후 ‘부자간에 술도 같이 마시고 담배도 마주 피운다’고 일가에 소문이 날 정도로 아버지와 아들이라기보다 사회문화적·정치적 견해를 나누는 동반자처럼 지냈다고 한다.
중교의숙 졸업 후 잠시 귀향했던 홍명희는 곧 동경으로 유학, 1907년 다이세이 중학 3학년에 편입했다. 1910년까지 다닌 이 학교에서 그의 성적은 항상 1, 2등을 할 만큼 우수했으며 이 무렵부터 서양과 일본의 문학작품을 위주로 본격적인 독서를 시작했다. 그는 ‘명랑하고 경쾌한 프랑스 문학’보다 ‘침통하고 사색적인 로서아 작품’을, 그중에서도 ‘꼭 어떤 노인이나 선생이 설교하는 것 같은’ 톨스토이보다 도스토옙스키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동경 시절 홍명희는 문일평, 이광수, 최남선 등과 교유했다.
한편 ‘벽초’와 더불어 홍명희의 호였던 ‘가인’에 관해서는 그의 젊은 시절의 일면을 엿보게 하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홍명희는 동경 유학 시절 바이런을 애독한 나머지 그의 작품 「카인」의 음을 따서 호를 가인(假人)이라고 지었다. 그런데 나중에 중국에 가서 보니 ‘假人’이 ‘짜렌’으로 읽히는 것을 알고 발음이 비슷한 可人(커렌)으로 고쳤다. 그러나 그후 영어 성경을 읽으면서 카인이 ‘고현놈’임을 알게 되자 그것도 집어치웠다는 것이다. 또 이 시기 젊은 홍명희는, 오로지 어른 섬기는 일과 양반 체통 따지는 일만을 중요시하여 젊은이들을 묶어두는 전통사회의 인습에 대한 반감에서 차라리 ‘후레자식 구락부’ 같은 것을 모아보는 게 일종의 묘안이 되지 않을까 공상한 적도 있다고 한다.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된 1910년, 홍명희는 23세의 나이로 귀국했다. 금산군수를 지내던 그의 아버지 홍범식이 국치를 당한 날 관아에서 자결한 사건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이후 식민지시대와 해방 후에 홍명희가 했던 행동이나 선택, 그의 삶에서 지남침 역할을 했다.
아버지의 삼년상을 마친 홍명희는 1912년 정인보와 함께 홀연 중국으로 떠난다. 서간도를 거쳐 상해에 주로 머물었던 중국생활에서 그는 문일평, 박은식, 조소앙, 김택영, 신규식, 신채호 등을 만났다. 중국에서의 활동내용은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모종의 독립운동을 시도하거나 궁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후 1914년 다시 남양으로 가서 주로 싱가포르에 자리를 잡고 ‘광복운동의 자금 기반 마련’을 모색했다고 한다.
1918년 중국과 남양을 떠도는 8년에 걸친 방랑을 마치고 귀국한 홍명희는 약 반 년 동안 아들의 공부를 돌보는 등 모처럼 평온하게 지냈다. 그러나 이듬해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3월 18일 동부리 자택 사랑채에서 숙부 용식과 태식, 아우 성희 그리고 이재성, 김인수 등과 모의하고 3월 19일 충청북도에서 처음으로 괴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투옥되어 1년 가량 옥살이를 했다. 이 무렵부터 그의 집안형편은 몹시 나빠져서, 아들 기문의 글에 따르면 ‘초년 이후 고생으로 일관한 우리 아버지언만은 참말로 절박한 고생의 역사는 이때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출감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홍명희는 일가를 이끌고 서울로 이사했다. 그는 조선 에스페란토협회 회원으로서 선전부 일을 하기도 하면서 휘문고보와 경신고보 교사를 지내거나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에 출강하기도 했고 한때는 조선 도서주식회사에 근무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24년에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초빙됨으로써 언론계 생활3)을 시작한다.
「동아일보」에 재직하는 동안 홍명희는 문예분야에 관심을 쏟아 한국 신문 사상 최초로 신춘문예 제도를 시작하거나 큰 상금을 걸고 『춘향전』을 현대 소설수법으로 개작한 작품을 공모하기도 했다. 스스로 백옥석(白玉石)4)이라는 필명으로 동서고금의 이색적 지식을 소개하는 칼럼을 연재했으며 중국에 망명중이던 신채호의 문예평론 ‘낭객의 신년만필’이나 ‘전후삼한고’,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대사건’ 같은 조선고대사 관계 논문들이 실리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동아일보」가 다시 개량주의적 노선으로 돌아가자 홍명희는 사직서를 내고「시대일보」로 자리를 옮겼다.
「시대일보」에서 사장으로 재직할 당시인 1927년 홍명희는 신간회 창립에 관여하면서 사회운동에 적극 투신하였다. 신간회 일은 그가 전생애를 통해 가장 큰 기대와 애착을 가지고 임했던 사회활동이었다.
「시대일보」에서 홍명희는 편집국장을 거쳐 곧 부사장이 되었다가 다시 사장이 되었다. 진정한 민족신문을 만들자는 의욕으로 동지들을 끌어모은 그와 더불어 「시대일보」는 한때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함께 3대 민족지 정립시대를 맞았다. 그러나 재정난을 넘어서지 못하고 1926년부터 휴간했다가 끝내 폐간되고 만다.
홍명희는 이처럼 상경 후 교사와 언론인으로서 사회활동을 하는 한편, 민족해방운동의 한 돌파구로서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게 된다. 아들 기문이 쓴 글에 따르면 1920년대 초부터 ‘벌써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해야 된다고, 그렇게 고생하시는 중에도 원서를 얻어다가 읽으시고’ 했다고 한다. 또 홍명희는 1923년 결성된 급진적 지식인들의 사상단체인 신사상연구회5)에 들어가 활동을 하기도 했다. 신사상연구회는 이듬해에 화요회로 명칭을 바꾸면서 마르크스주의 행동단체로 성격을 바꾼다. 홍명희는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내면서 화요회 간부로도 활동했고 또 화요회를 주축으로 사회단체들의 통합을 추진하기 위해 결성된 정우회에도 참여했다.
다른 한편으로 1925년에는 조선사정조사연구회에도 참여했다. 이 연구회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일부 민족개량주의자들까지 가담하여 ‘조선의 현실을 조사 연구함으로써 민족정신 보존에 노력’하기 위해 창립한 학술단체였다. 이처럼 서로 성향이 다른 단체들에 관여했던 것은 얼핏 의아하게 느껴지지만 그가 민족해방과 국권회복, 그것을 이루기 위한 민족적 통합이라는 큰 과제 아래 좌·우 진영과 분파를 아우르는 민족통일전선에 관심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시대일보」 폐간 후 홍명희는 조만식의 뒤를 이어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겨울방학에 상경했다가 신간회 창립 준비작업과 조직사업에 몰두하게 되면서 채 1년이 못되어 학교 일을 그만두었다. 1927년 2월에 창립된 신간회는 반제민족해방이라는 큰 과제 앞에 좌와 우, 중도세력이 이념과 분파를 벗어나 모두 힘을 합친 민족통일전선체로, 몇 차례 노선을 바꾸며 1931년 5월까지 5년 동안 존속했다. 홍명희는 조직부 총무간사로서 신간회의 창립과 조직확대기를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신간회 일은 그가 전생애를 통해 가장 큰 기대와 애착을 가지고 임했던 사회활동이었다.
이 무렵 홍명희는 본격적인 작가생활을 시작하기 전이었으나 문사로 간주되고 있었고 프로문학 진영에서 선배로 대접받고 있었다. 그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에도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동정자’의 위치에서 관련을 맺고 있었다. 1926년 1월에 나온 카프의 기관지 『문예운동』 창간호 첫머리에 ‘신흥문예의 운동’이라는 그의 평론이 실렸다. 내용상 창간사에 해당하는 이 글에서 그는 ‘유산계급 문학에 대항한 문학, 생활을 떠난 문예에 대항한 생활의 문학, 구계급에 대항한 신흥계급의 사회변혁의 문학’을 주장하였다.
한편 1928년 11월 21일부터 홍명희는「조선일보」에 장편 대하소설 ‘임꺽정’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임꺽정’ 연재는, 홍명희를 비롯한 신간회 간부들이 이듬해 12월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해 민중대회를 추진하다가 대량 검거 투옥되면서 중단되었다. 1932년 작가가 출소한 후 다시 연재되었지만 그후에도 작가의 건강문제로 중단과 속개를 거듭하며 13년 동안이나 집필되었고 해방 후 내용상 미완인 채 10권의 단행본으로 묶여 출간되었다.
조선 중기의 큰도둑 임꺽정을 내세워 조선시대 서민의 생활양식을 총체적으로 엮어낸 이 소설은 일제강점기 최대의 문학적 성과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소설 『임꺽정』은 조선사회의 만화경인 동시에 고대어에서 현대어로, 궁중어에서 서민어로, 양반 말에서 상놈·백정의 말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풍부하게 구사된 말들로 인해 우리 겨레의 어휘의 보고(寶庫)라고까지 불린다. 뿐더러 조선다운 문장과 문체, 조선의 인물들, 조선 이름, 조선의 풍속 등 온통 ‘조선 것’의 총집합이기도 하다. 홍명희 자신은 ‘사건이나 인물이나 묘사로나 정조로나 모두 남에게서는 옷 한 벌 빌어입지 않고 순 조선 것’으로 쓰려 했으며 ‘조선 정조에 일관된 작품’이 목표였다고 했다. 해방 후 주위 사람들이 ‘임꺽정’을 끝맺으라고 권유하자 그는 “임꺽정이가 독립 후인 오늘날도 내 뒤를 따라다닌대서야······”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여기서 그가 이 소설을 당대의 상황에 맞서는 활동의 일환으로 썼음을 엿볼 수 있다. 말하자면 소설 ‘임꺽정’은 1930년대라는 조선 것 말살의 시대에 대한 그의 대응이었다.
1935년 그는 4대문 밖인 마포 한강변 대흥동으로 이사를 갔다. 일제의 광기를 피해 반쯤 은둔했다. 1937년 중일전쟁 도발 이후 전시총동원체제가 깊어졌다. 다시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 244-1번지(현재 서울 도봉구 창동 820번지, 창동초교 뒤)로 은둔했다. 창동에는 가인 김병로, 위당 정인보, 고하 송진우 등 요시찰인물이 살고 있었다. 일제는 창동주재소에 고등계 형사를 상주시켰다. 사람들은 벽초와 만나는 것을 꺼렸다. 마주치면 전봇대 쪽으로 돌아가 오줌 누는 척하는 지인도 있었다고 한다. 그 꼴을 당하며 벽초는 심산 김창숙 선생에게 이런 마음을 전한다. “관 뚜껑이 닫히기 전에는 항복도 하지 않고 모욕도 받지 않으리라.” 그 당시 지기였던 이광수, 최남선 등은 이미 일제의 나팔수가 되어 있었다. 벽초는 모든 집필활동을 중단했다. <임꺽정>의 신문 연재도 1939년 7월 영원히 중단됐다.
미완인 채 ‘임꺽정’ 연재를 마친 1940년 이후 해방되기까지 홍명희는 사회활동을 하지 않고 은둔했다. 1945년 ‘두 아들을 붙안고 대성통곡을 하며’ 해방의 날을 맞은 58세의 홍명희는 이듬해에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해방 후 미군정하의 남한은 각종 정치 그룹이 난립하고 친일세력이 다시 고개를 들면서 신탁통치문제 등 사회·정치 상황이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런 상황에서 정치활동에 뛰어든 홍명희는 1947년 민주독립당을 결성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민주독립당의 창당결의문을 보면 우리 민족의 ‘완전 자주 독립의 필수 전제조건’인 ‘탁치 없는 독립’과 ‘미소 양군 철퇴’를 환영하며 남북을 막론하고 ‘외세에 편승하는 반민족적 행동으로 삼천만 동포의 염원인 자주통일과 완전 독립을 저해하는’ 일체의 행위와 남북분단의 고정화를 경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48년 4월 10일,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북쪽으로 간 홍명희는 그 길로 북한에 주저앉았다. 이후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을 거쳐 부수상을 지냈고 과학원 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등 여러 직책을 거치다가 1968년 만 80세로 세상을 떠나 북한 혁명열사릉에 묻혔다.
홍명희의 사상성향에 대해서는 배타적 민족주의자로 보는 견해와 사회주의자로 보는 견해가 맞서 각각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와 증언들을 제시하고 있다. 또 그가 비밀 공산당원이었다는 설과 한때 공산당에 가입했으나 축출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그가 북쪽을 선택한 데는 ‘금산군수 홍범식의 아들’ 홍명희는 결코 친일파가 다시 세력을 얻어가는 세상에서는 살 수 없었을 것이며, 그에게 중요한 기준은 좌냐 우냐가 아니라 애국이냐 매국이냐였으리라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홍명희를 접했던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도 단아한 학자’, ‘소문난 독서가’, ‘선비형의 인물’, ‘나서기 싫어하고 지도자연 하지 않는 사람’, ‘용감하게 나아가지는 못하나 날카롭게 보고 굳게 지키는 분’ 등의 말로 그를 표현했다. 월북 후 오랫동안 묻혀 있던 그의 이름과 ‘임꺽정’은 1985년 한 출판사에서 『林巨正』 10권을 발간함으로써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충북 괴산군 제월리에 남아있는 벽초 홍명희의 옛집은 근래에 곧잘 문학기행 코스로 꼽히는 곳이다. 제월리 산수골 마을 안쪽으로 쑥 들어간 곳에 있는 홍명희의 옛집은 지금 사랑채 하나만 남아 있다. 난간 둘린 누마루와 마루 딸린 방 세 개, 마루 없이 커다란 방 한 개로 이루어진 사랑채의 규모와 계단 등을 보면 본디 꽤 큰 집이었을 듯하다. 그러나 뒤쪽에 있던 안채는 다 뜯겨 없어져 밭이 되었고 밭가에 세워진 자그마한 돌에 ‘작가 홍명희가 태어나 자란 고향’이라는 명문이 적혀 있다.
벽초 홍명희의 혼이 깃든 제월대에는 홍명희 문학비가 서 있다. 낮은 기단 위에 다섯개의 원기둥이 둘러쌓인 사각형 모양의 비에는 한글과 한자로 ‘벽초 홍명희 문학비(碧初 洪命憙 文學碑)라는 제목 아래 벽초 선생의 캐리커쳐가 그려져 있다.
해마다 괴산에서는 우익 인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홍명희 문학제가 개최되어 홍명희의 문학정신을 기리고 있다.
벽초 홍명희는 정치인이기에 앞서 문인, 언론인, 독립운동가, 사회운동가였다. 부친의 뜻에 따라 좌우,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모두가 단합해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이루고자 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정치적으로는 우유부단하게 비쳤다. “용감하게 나아가지는 못하나 날카롭게 보고 굳게 지키는 분”이라고 아들 홍기문은 평했고, 벽초 자신도 “내가 다른 데는 유약해도 무엇이든지 안 하는 데는 강하다”고 자평했다. 그는 눈 밝은 평론가 양건식이 평한 것처럼 천상 원칙과 양심에 투철한 선비였을 뿐이다.
벽초 홍명희는 최남선, 이광수와 함께 조선 신문화의 삼재라고 불린다.
아버지 홍명희와 함께 북한으로 간 홍기문은 국어학자의 길을 걸었다. 그는 신라 향가 연구의 권위자가 되었으며 조선조 실록과 팔만대장경 등의 국역작업을 하는 등 국어학 분야에 많은 공적을 남겼고 김일성대학 교수, 사회과학원 부원장을 지내다가 세상을 떴다.
<참고 문헌>
1. “벽초 홍명희의 옛집”『답사여행의 길잡이 12 - 충북』초판, 동베개, 2003.
2. 이웅재, “벽초 홍명희의 혼이 깃든 괴산읍 제월1리”, 괴산자치신문, 2010.10.21일자.
3. 곽병찬, “제월대 영화담에 어린 벽초, 선비의 초상”, 한겨레신문, 2014.12.17일자. A29면.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아우내 단오축제』,『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997) 등 4권.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 등 58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