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관의 뿌리 <조선사편수회>의 만행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신상구(辛相龜)
일제는 1910년 9월 28일 한일합방조약으로 대한제국을 강탈하고, 대한제국을 영구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1916년 1월 중추원 산하에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를 발족했다.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는 1922년 12월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찬위원회로 바꾸고 식민사관을 날조했다.
조선사편찬위원회는 일본민족의 우위성을 고취하고 역사교육을 통해 한국민의 민족의식을 배제하고자 설립되었다. 그러다가 학문적으로 더욱 권위 있는 기구로 만들기 위하여 1925년 6월 일황 칙령에 의해 조선사편수회로 명칭을 바꾸고 독립된 관청으로 격상되면서 조직이 확대 개편되었다.
총독부 정무총감이 조선사편수회 회장을 맡았고, 고문과 위원은 한국인인 이완용.박영효.권중현.어윤적.최남선 등이 차지했다. 편수관 3명과 수사관보 4명은 일본인 이마니시 류(今西龍)를 비롯해 홍희, 신석호, 이병도 등이 임명되었다.
일제는 1918년에 일본 신화 4천년사에 맞추어『조선 4천년사』를 발간하여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식민사관을 보급했다.
일제는『조선 4천년사』에서 한반도가 고대 일본 영토였다고 기술했다. 실제로 일제는 일한합방은 일한의 정치적 복고이니, 그 역사는 즉 대일본제국 일부의 역사가 되니라, 신라 왕국은 일본인이 건설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가야 금관국의 수로왕은 일본의 황족이고, 만주는 曾前 我 고구려 고(高)씨의 옛 영토임을 설하니라고 기록해 한민족을 분노케 했다.
1925년 10월 8일에 제1회 조선사편수위원회를 개최했는데, 이 회의에서 결정한 주요 사항은 관계 자료의 수집 방안이었다. 초기에는 강제 수색과 압수를 통해 사료를 수집했으나 수장자들이 비장하는 바람에 수집이 어려워지자 대여 형식으로 방법을 완화했다. 그리고 일제는 1910년 11월부터 1937년까지 27년간 전국을 누벼 조선 사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했고, 전국의 도·군·경찰서 등 관청에 협력할 것을 강력히 지시했다.
한편 일제는 1932년부터 1938년까지 6년간 식민사관에 바탕한『조선사』(37책),『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20종),『조선사료집진(朝鮮史料集眞)』(3책) 등을 간행하였다. 특히 일제는 '단군조선'을 없애려고 편찬기구의 개편 때마다 한국사의 상한선을 아래로만 끌어내렸다.『조선사』편찬 초기부터 16년 2개월간 앞장서서 관여했던 일본인 이마니시(今西龍)는 단군조선을 신화로 왜곡하고 한국사를 왜곡·말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조선사편수회는 식민사관을 날조하는 것도 모자라 20만권의 우리 고서(古書)들을 수거해 불태우거나 일본으로 불법 반출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에도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였던 이병도의 저서인『한국사 대관』,『한국사 고대편』은 금과옥조처럼 사학 강단을 식민사관으로 물들였다.
이병도는 40년 후인 1986년 10월 9일자 조선일보에 “단군은 신화 아닌 우리의 국조”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해 회개했다. 그러나 이병도의 2세대, 3세대 제자인 강단사학자들은 지금도 식민사학을 벗어나지 못해 재야 민족사학자들의 국사광복운동을 방해하고 있다. 특히 교사들을 양성하는 한국교원대 송호정 교수는 지금도 국조 단군을 신화적 인물로 보고, 고조선 영토를 축소하는 발언을 서슴치 않고 해 재야 민족사학자들의 비판을 많이 받고 있다.
그런데 독립운동가로서 한국법학교수회 회장을 역임했고, 신채호와 정인보를 이어 평생을 한국상고사 연구에 전념한 최태영(崔泰永) 박사는 자기의 저서인『인간 단군을 찾아서』(학고재, 2000.4.15)에서 다음과 같이 일제의 식민사관과 한국의 식민사학자들을 호되게 비판함으로써 재야 민족사학자들에게 힘을 많이 실어주었다.
"일제는 조선을 침탈하면서 자기네보다 유구하고 우월한 역사를 가진 조선인들에게 그 옛날 고조선이라는 강대하고 광활한 독립국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서든 잊어버리도록 해야만 통치하기가 수월했다.
한국 고대사 왜곡의 앞잡이 이마니시의 부류가 '한국사는 신라 때부터 시작이라'는 당치도 않은 설을 '실증주의 사학'이라고 호도함으로써, 그 이전 수천년의 한국 고대사를 못믿을 것으로 돌려버렸다.
당시의 적대국인 일본인들이 한국사를 질시해 조작한 사실을, 한국인이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미친 짓이다.
그것이 얼마나 한국인들에게 용기를 잃게 했는가를, 일본이 그 때문에 얼마나 덕을 보았는가를 몸서리나게 보아오지 않았던가"
법학자 겸 한국상고사학자인 최태영(崔泰永) 박사는 2005년 11월 30일 향년 105세를 일기로 타계했지만, 지금도 살아서 우리 역사 광복을 가로 막는 식민사학자들을 호되게 꾸짖고 계시는 것 같다.
<참고문헌>
1. 최태영,『인간 단군을 찾아서』, 학고재, 2000.4.15.
2. 곽춘근,『조선 태고사』, 천사연출판사, 2009.2.10. p.3.
3. 대한교육신문 제1997호 太古史 특집, 2012.8.16일자. 1면.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아우내 단오축제』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57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