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신상구(辛相龜)
최근 둔산동이 대전광역시의 중앙업무자구(CBD)로 떠오름에 따라 중구 은행동 중앙로 우측의 구도심은 침체되어 지금 활성화 대책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2013년 겨울 어느 날 그곳을 방문해 보니 놀랍게도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낡은 적산가옥들이 그대로 남아있어 도시 미관을 해치고 있었다. 이미 재개발 과정에 들어가 주민들이 타지로 거주지를 옮기는 바람에 적산가옥들이 텅빈 상태로 방치되다시피 하여 주변 환경이 많이 오염되어 있고 폐가가 많아 외국 대도시의 슬럼가를 연상하게 한다.
해방 후 한국 민족사학을 주도했던 한암당(寒闇堂) 이유립(李裕?, 1907-1986) 선생은 1963년부터 1976년까지 13년간 중구 은행동 107번지 적산가옥 224호 2층의 춥고 어둡고 비좁은 사글세방에서 궁핍하게 살면서 한배달 민족사를 연구하고 강연하며 제자들을 11명이나 양성했다. 그리고 1976년 10월 8일 이유립 선생이 안호상(安浩相)·유봉영(劉鳳榮)?박시인(朴時仁)?임승국(林承國)?박창암(朴蒼巖)?문정창(文定昌)?최동(崔棟)?정명악(鄭命岳) 등과 국사찾기협의회를 결성하고 전국적으로 <국사 바로 잡기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단단학회 본부를 중구 은행동의 자기 집에 두고 기관지인 <커발한(居發桓)>을 제53호까지 발행하여 대학교?도서관?회원들에게 보급해 정통국사 광복에 크게 기여했다.
지금도 이유립 선생의 제자인 양종현?김희백?성기석?권창영?강상모?박한동?송진영 등 10여 명이 대전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세월이 많이 흘러 이유립 선생의 <국사 바로 찾기 운동>을 기억하고 기리는 대전 시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요즈음 대전 구도심 활성화 대책을 토론하는 과정에서 이유립 선생을 거론하는 학자나 시민단체 대표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필자는 최근 충청지역 신문 칼럼을 통해 대전 구도심을 활성화 하고 대전지역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대전역 광장을 단재광장으로 명명하고, 중앙로를 단재로로 개명하는가 하면, 대전역 광장에 단재 신채호 선생 동상을 세워야 한다고 여러 번 주장한 바 있다. 그리고 대전 중구청 문화관광 담당 과장과 부청장실은 물론 중구의회 전문위원실을 방문해 내가 충청지역의 신문에 기고한 칼럼 복사본을 나누어 주고 협조를 당부했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답변을 듣지 못해 대단히 아쉽고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대전 중구문화원이 재야 민족사학자인 고 이유립 선생을 조사연구하여 문화콘텐츠로 개발하고, 대전 중구청이 중구 은행동 적산가옥들을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대전의 랜드마크가 되는 50층 이상의 대형 빌딩을 건축하고 그 안에 이유립 기념관이나 민족사학 박물관을 유치하여 구도심을 활성화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이유립 선생의 독립정신과 정통국사 광복운동을 기리는 기념비라도 세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대전에는 보문산성과 계족산성, 난간정사, 동춘당, 둔산 선사유적지, 고산사 대웅전, 송현서원과 도산서원, 대전시립박물관, 이응노미술관 등 볼만한 문화유적들이 많이 있으나 전국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곳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한암당 이유립 선생은 1980년대에『환단고기』를 처음으로 공개해 전국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적이 있고, 제자들이 전국에 5,000여 명이나 분포하고 있는가 하면, 일제강점기에는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고 해방 후에는 이암-이맥-이기-계연수-신채호-정인보-최태영으로 이어지는 민족사학을 주도하여 일본의 역사왜곡과 중국의 동북공정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대전 구도심의 핵심지구라고 할 수 있는 대전시 중구 은행동에는 대전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상징하는 건물이나 기념비가 아직까지 들어서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유립 기념관이나 민족사학 박물관을 건립하여 관광자원이나 체험교육장으로 활용하면, 찾아오는 관광객들이나 학생들이 많아 구도심이 활성화 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민족사학의 맥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독재정권의 감시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어 해방 이후 그 맥이 겨우 이어지고 있는데 비해, 일제 강점기에 식민사학의 본산이었던 조선사편수회에서 우리 역사를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 기술하는 데에 앞장섰던 이병도(李丙燾)와 신석호(申奭鎬)가 해방 후에 한국 역사학계를 독차지 하고 서울대와 고려대 사학과에서 식민사학에 물든 강단사학자들을 많이 양성해 정통국사 광복을 가로 막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아우내 단오축제』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57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