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고구려성까지 萬理長城으로 날조하는 지나국 글쓴이 younbokhye 날짜 2010.05.19 15:35
고구려성까지 萬理長城으로 날조하는 지나국
 
왜곡도 정도껏 해야지 드러내고 하면 國格만 추락
 

윤복현 역사칼럼

▲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한반도 근처인 고구려 박장성까지라고 주장하고 있는 지나국2009년 4월 지나국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을 기존 산해관에서 약 2,500KM 떨어진 압록강변 호산장성으로 연장하겠다고 발표했다. 남북방향으로 1600M의 성벽을 신축했다.
 
그런데 지나국이 새로 쌓은 성벽 아래 동북방향으로 고구려식 석축이 있다. 고구려성을 깔아 뭉개고 성을 쌓아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고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독안의 쥐들을 공격하듯이 독 안에 들어 온 적군을 3면에서 공격하는 ㄷ자형의 '치'와 함께  쐐기 모양의 돌을 ‘品’ 형태로 쌓는 전형적인 양식이 고구려식 축성법이다. 성벽과 같은 방법으로 조성한 직경 4미터의 유물은 지나국 학자가 쓴 발굴기록까지 존재한다. 그러나 단동시는 이 모든 기록을 무시한 채 90년대 초반부터 호산에 장성 신축을 시작,원래 있었던 고구려 관련 표식을 모두 철거하고 호산에 ‘호산장성’ 이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 고구려 성 중에 평야지대에 쌓은 토성으로서 요동성, 안시성이 있다. 이 성들은 대부분 허물어 졌으나 백암산성(사진)은 돌로만 쌓은 석성이라 비교적 원형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구당서]와 [삼국사기]를 근거로 찾아낸 이 성의 이름은 고구려 박작성이였다. 이 곳은 비사성과 함께 서해와 요동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고 지나국의 침략을 방어할 수 있는 고구려 해양방어체계의 핵심적 거점이었다.
 
지나국에서 호산에서 만리장성의 석축을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제대로 된 발굴 보고서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만약 지나국측 주장이 사실이라면 호산엔 성과 성을 연결하는 석축의 연결점이 있어야한다. 그러나 제작팀에서 이형구 선문대 교수 등이 성곽 전문가와 함께 현장을 조사한 결과, 신축한 성벽 부근 어디에서도 석축을 발견할 수 없었다.

지나국이 주장한 배경에는 명대 초, 북방의 여진과 몽골을 방어하기 위해 산해관에서 압록강변까지 구축했던 방어 목책선으로써의 요동변장이다. 그러나, 엄연히 목책은 돌로 쌓은 성이 될 수 없기에 지나국의 주장은 궤변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만리장성의 동쪽을 산해관으로 명확히 표시하고 있는 고대 지나의 지도에도 만리장성과 목축을 확연히 구분하고 있다. 목책은 만리장성에서 빠져 있다.
 
 ▲ 십구사략통고의 장성도. 이 지도에는 아예 책성도 없다. 그러니까 책성은 훨씬 후에 쌓았다는 얘기다. 요동만 북쪽으러 조선이란 표기가 있다. [출전:신시본토기]   

지나국은 작년 4월에 이어 12월 또다시 통화현에서 한나라 시기 만리장성의 유적을 추가로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통화현은 집안 환인과 함께 고추모가 부여에서 남하하여 나라를 개국한 고구려의 대표적 발흥지다. 만리장성의 하나로 지목된 남대자성은 고구려 유적과 한 대 유물이 복합해 출토된 곳으로 일대 주민들은 이곳을 ‘고구려성’이라고 부른다. 비사성, 성산산성, 백암성, 봉황성 등 요동지역 고구려 성들의 현재 대다수 지나식으로 그 형태가 변형돼 있었고 그 이름조차 지국식으로 개명된 경우도 많았다.
 
▲ 당토여전도(唐土與全圖)의 장성과 책성은 원래가 분리되어 있다 [출전:향고도]   

이러한 지나국의 왜곡날조의 심리적 배경에는 수.당나라가 고구려에 참패한 치욕적인 역사의 열등감이 내재되어 있으며, 유라시아 강성대국 고구려에 대한 두려움이 깊게 깔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 흔적들을 지워 버리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란 왜곡날조한다고 해서 그 진실이 감추어지는 것은 아니다. 고구려는 한국.배달국.단군조선과 부여를 계승한 나라로 900년의 역사와 함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유라시아 강성대국이였다.
 
▲ 광개토태왕 이후 몽골.만주.지나.한반도.일본지역이 민족통합(다물)노선에 따라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한단고기-태백일사-고구려 본기/북부여기]에서는 고구려의 기원과 광대한 영역에 대해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의 선조는 해모수로부터 나오나니 해모수의 어머니의 고향 역시 그곳이다. <<조대기>>에선 이렇게 말한다. [해모수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웅심산에서 일찌기 살다가 부여의 옛서울에서 군대를 일으켜 무리에게 추대되어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니 이를 부여의 시조라고 한다. 까마귀 깃털로 만든 관을 쓰고 용광의 검을 차고 오룡의 수레를 탔다. 따르는 시종이 500여명이 있었는데 아침엔 정사를 듣고 저녁엔 하늘로 오르니 호령하지 않아도 절로 관경이 교화되었다. 산에는 도적이 없고 벼와 곡식이 들에 그득했다, 나라에 큰 일 없고 백성 또한 일 없었다. 단군 해모수가 처음 하늘에서 내려오심은 임술(BC )4월 초 8일로써 곧 진시황 정의 8년이다. ]
 
고리국의 왕 고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며, 옥저후 불리지는 고진의 손자이다. 모두 도적 위만을 토벌한 공을 세워 봉함을 받은 바라. 불리지는 일찌기 서쪽 압록강변을 지나다가 하백녀 유화를 만나 그녀를 맞아 들여 고주몽을 낳게 하였다. 때는 곧 임인(BC 79) 5월 5일이라. 곧, 한나라왕 불능의 원봉2년이다. 불리지가 죽으니 유화는 아들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으로 돌아 왔으니 지금의 서란이다. 주몽이 성장하여 사방을 주유하다가 가섭원(연해주:동부여)을 택하여 거기서 살다가 관가에 뽑혀 말지기로 임명되었다. 얼마 안되어 관가의 미움을 사서 오이와 마리외 협보와 함께 도망하여 졸본으로 왔다. 때마침 부여왕 고무서는 후사가 없었다. 주몽이 마침내 사위가 되어서 대통을 이으니 이를 고구려의 시조라 한다.
 
계해 2년 고무서 단제가 영고탑을 순시하다가 흰 노루를 얻었다. 겨울 10월 단제가 붕어하고 고주몽이 유언에 따라 대통을 이었다. 이보다 앞서 단제는 아들이 없었는데, 고주몽을 보고 사람이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딸로서 아내를 삼게 하였었는데 이에 이르러 즉위하니 이 해 나이가 23세였다. 이 때에 부여인이 그를 죽이려 하였는데 오이, 마리, 협보 등 세사람과는 덕으로써 사귄 친구였던지라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서 함께 길을 떠나 분릉수에 이르렀다. 그러나 건너려고 하여도 다리가 없으므로 뒤쫓아 오는 군사들에게 몰릴까 두려워하여 물에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인데 오늘 도주함에 있어 추격병은 다가오고 있는데 어찌하란 말인가?’ 하니, 이 때 물고기와 자라 따위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므로 주몽이 건너가자 물고기와 자라는 다시 흩어졌다.
 
추모대제 32년 갑오(BC 27)10월 북옥저를 정벌하여 이를 멸망시켰다. 을미년에 졸본으로부터 서울을 눌현으로 옮겼다. 눌현은 지금의 상춘 주가 성자이다.
 
유리명제의 19년 또 눌현으로부터 국내성으로 옮겼으니 또한 황성이라고도 한다. 성안에 환도산이 있는데 산 위에 성을 쌓고 일이 있으면 여기에 머물렀다.
 
대무신열제의 20년, 제는 낙랑국(최씨 낙랑국)을 습격하여 멸망시켰으니, 동압록 이남이 우리에 속했는데 애오라지 해성의 남쪽, 바다근처의 여러 성들만은 아직 항복하지 않았다.


산상제의 원년 동생 계수를 파견하여 공손탁(요동태수)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현도와 낙랑을 정벌하여 이를 멸망시켰다.

대변경에서 말한다.

[고주몽성제는 조서를 내려 가로대,<천신께서 만인을 만드실 때에 하나의 상으로서 균등하게 삼진을 주시었으니 이에 사람은 저 하늘을 대신하여 능히 세상에 서게 되었다>라고 하셨다. 하물며 우리나라의 선조는 북부여에서 나와 천제의 아들이 되었다. 밝은 이의 마음이 비어 고요함은 계율에 뿌리를 두는 것이니 오래도록 사특한 기운을 눌러 그 마음이 안락하고 태평하다. 이에 뭇 사람과 함께 일하면 항상 잘되는 것이라. 병력을 쓰는 까닭은 침범을 느슨하게 하려함이요. 형을 행함은 죄악을 없앨 것을 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허가 지극하면 정이 생기며, 정이 지극하면 지혜가 가득하며, 지혜가 지극하면 덕이 융성하다. 때문에 마음을 비워 가르침을 듣고 고요한 가운데 헤아리며 지혜로써 사물을 이치대로 하고 덕으로써 사람을 다스린다. 이것이 곧 신시의 개물교화이다. 천신을 위해서는 성품을 열고 중생을 위해서는 법을 세우고, 선왕을 위해서는 공을 다하고, 천하만세를 위해서는 지와 생을 나란히 닦는 교화를 이룸이라.]

 
▲ 광개토태왕에게 제사를 지낼 만큼 신라가 고구려의 속국이였음을 보여 주는 경주출토 청동제사그릇 -'국강상광개토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명확히 표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장수홍제호태열제는 건흥이라고 연호를 바꿨다.인의로써 나라를 다스려서 강역을 넓혔다. 이에 웅진강이북이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어 북연.실위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족속의 서열에 들어 오게 되었다. 또 남쪽 평양(현재 북한 평양)에서 신라와 백제를 만나 납공과 군사의 수를 정했다. (주:광개토태왕 당시 백제와 신라는 이미 고구려에 항복하고 복속되었기에 고구려에 조공과 군사지원을 해야 했다)
 
▲  장수태왕 당시 한반도지역에서의 지배권을 고구려가 완전히 장악했음을 증명하는 중원 고구려비-한반도지역에서 고구려와 신라, 백제 3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우리나라에 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또한 당시 한반도 평양은 한반도를 통치하기위한 부수도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장수태왕 당시 고구려의 수도는 단군조선 초기의 상징 비파청동검이 가장 많이 출토되어 단군왕검이 정한 첫도읍지 아사달로 추정되는 '조양'이였다. 북한 평양으로의 수도천도는 평원태왕 때의 일이다. 

비문의 주요 내용은"고려건흥 4년 5월중(高麗建興 四年 五月中) 고려대왕조왕(高麗大王祖王) 령환신라매금야(令還新羅寐錦也) 세위원여형여제(世爲願如兄如弟) 상하상지수천(上下相知守天) 동이지매금기태자공(東夷之寐錦忌太子共)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 "다.     

즉,"건흥 4년 5월에 고구려대왕(文咨王)의 조왕(장수왕)이 신라의 자비왕(慈悲王)을 돌려보낼 때 대대로 형제와 같이 지내기를 원하고, 상하(上下)가 수천(守天 : 하늘의 도리)할 것을 서로 약속해야 한다는 말에, 동이의 매금(寐錦 : 신라왕)이 공손히 응하였다."라는 의미로 고구려가 신라를 이용하여 백제를 겨냥하기 위한 차원에서 신라를 형제로 부르고 있다.
 
문자호태열제는 연호를 명치라고 개원하였다.11년 제.노.오.월의 땅(백제담로지역이였던 산동.양자강 지역)은 고구려에 속했다. 이에 이르러 나라의 영토는 더욱 더 커졌다.12년 신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로 삼았다. 이 해에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않음으로 병력을 파견하여 공격하여 요서의 진평 등의 군을 취하고 백제군을 폐했다." (주:고구려 "문자호태열제 12년 신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로 삼았다."는 의미는 한반도지역의 신라인들이 홍콩지역으로 이주해 감으로써 비로소 지나 동남부 지역에 거주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는 의미가 '알맹이'로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 백암성 밑의 기단은 약간 앞으로 돌출되어 있다.7~8개 단까지는 기단이 차츰차츰 안으로 들어 가면서 올려 쌓았다.그리고 급히 위로 쌓는 성벽의 방식을 따랐다.  

우리 민족은 성이나 담쌓기에 도가 튼 민족이다.남미지역 산꼭대기에 건설한 마츄피츄를 보아도 잘 알 수 있듯이 피라미드 등 적석문명의 주역이 그래서 한민족인 것이다. 마땅히 고구려성인 박작성을 가지고 호산성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고 주장하니 양심불량한 지나국은 대국이라 할 수 없다.
 
▲  동북아시아에서 아메리카로 이주한 한민족(잉카인)이 안데스 산꼭대기에 돌로 쌓아 만든 공중도시-마츄피츄 ▲ 잉카인들이 돌로 쌓은 담과 도로


▲ ‘品’ 형태로 쌓는 전형적인 고구려 축성법(상)과 마츄피츄 축성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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