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최초 칸 취화선 속 달항아리, 세계에 우리의 것 위상 높였다.
“저 심심하고 무덤덤한 항아리는 어디서 구했는가.”
“욕심 없이 무심한 마음으로 그저 흥에 겨워 손 가는 대로 빚은 그릇이지요. 왠지 모자라는 듯 너그럽고 여유롭고 따스하지 않습니까.”
영화 ‘취화선’에서 장승업(최민식)과 기생 매향(유호정)이 달항아리를 두고 나누는 대화는 임권택 감독이 추구해온 정겹고 소박한 한국의 미(美)를 보여준다. 조선 말기 천재 화가 장승업(1843~1897)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는 2002년 한국 최초로 칸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임 감독은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도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 고뇌한 장승업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지난 4일 만난 임 감독은 “20대에 화가가 돼 평생 그림에 매진한 것이나, 술을 즐기고 여기저기를 떠돌며 산 성향도 나와 닮았다”면서 “내가 영화를 찍으면서도 어떤 장면에선 임권택이 그 안에서 찍히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고 했다.
대부분의 영화 소품과 사진 등의 자료를 동서대 임권택영화박물관에 기증했지만, ‘취화선’에 썼던 백자 항아리만큼은 집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 영화의 결말에서 장승업은 항아리에 신선을 그리고선, 도자기를 굽는 불가마 속으로 기어들어 가 자신의 그림을 완성시킨다. 최민식의 대역이자 영화에 등장하는 그림 60여 점을 그린 김선두 중앙대 한국화전공 교수는 촬영이 끝나고 장승업과 임권택 감독이 작은 배에 앉아 술을 기울이는 그림을 항아리에 그려 선물했다.
김선두 교수는 “취화선에는 부단히 거듭나고, 새로워지려는 예술가의 번뇌가 담겼다. 장승업이라는 인물을 통해 임 감독님이 자신이 추구하던 미적 세계를 보여준 것”이라고 했다. ‘취화선’은 한국화뿐 아니라 국악·한복·다도·서예 등 각 분야의 장인들이 참여해 한국 문화계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만들어진 작품이기도 하다. 임 감독은 “2002년 월드컵 시기에 개봉해 국내 흥행엔 처참히 실패했다. 영화감독이 흥행을 해야지, 망해놓고 만족스러울 게 뭐 있겠냐”며 웃었다. 그는 “상을 타봤자 영화인끼리나 알아주는 것이지”라며 자신을 낮췄지만, 당시 ‘취화선’은 르몽드 등 주요 언론의 관심을 받으며 한국 영화로는 최초로 프랑스에서 8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 흥행 9위까지 올랐다.
‘서편제’의 소리북
“자동차가 길을 달릴라면 말이여, 길이 잘 닦여야 쓸 거 아니여. 그것처럼 북은 장단하고 추임새로 소리의 길을 닦아줘야 한단 말이여.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듯이, 북도 밀고 달고 맺고 푸는 길이 있다고 몇 번이나 말허냐.” (‘서편제’ 중 유봉이 동호를 꾸짖으며)
북 하나 메고 팔도를 유랑하는 소리꾼들의 한(恨)을 담아낸 영화 ‘서편제’는 한국 영화 최초로 관객 수 100만을 돌파했다. 1993년 10월 31일 자 본지는 “한국 영화사에 신기원을 이룩했다”면서 “외래 문화가 지배적이던 우리 문화 전반에 우리 것 재발견의 붐이 일어나게 한 서편제 신드롬은 우리 문화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될 사건”이라고 이날을 기록했다.
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던 1992년 초,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을 영화로 만들려 했으나 정부에서 제동을 걸었다. 아직은 이념 문제를 다룰 때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부담 없이 저예산으로 판소리 영화를 만들어보자고 시작한 것이 ‘서편제’였다.
영화 내내 등장하는 소리북은 유봉(김명곤)의 대사처럼 밀고 당기고 맺고 풀며, 흥을 돋운다. 유봉이 잔칫집에서 ‘춘향가’를 부르는 장면은 민속촌에서 엑스트라를 동원해 찍었다가 만족스럽지 않아서, 해남 주민들 100여 명을 데려다 막걸리를 한잔 마시게 한 후 다시 촬영하기도 했다. 임 감독은 “구경꾼들이 춤도 추고, 추임새도 넣고 자연스럽게 어울려 즐기는 분위기가 나왔다”면서 “다른 동네에선 나올 수 없는 남도만의 흥이 있더라”고 했다.
◇청산도 고갯길
‘서편제’를 비롯해 임권택의 영화엔 길 위를 떠도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영화를 만들 때 가장 신경 쓴 부분 중 하나도 장소 헌팅이었다.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담아낸 그에게 가장 의미 있는 곳은 청산도의 고갯길. 여인숙에서 쫓겨난 유봉과 송화, 동호가 정처 없이 고갯길을 걸어가며 진도아리랑을 부르는 장면을 촬영한 곳으로 지금은 ‘서편제길’로 불린다.
신산한 삶을 신명 나는 노랫가락으로 승화시킨 이 장면은 한국 영화사상 가장 아름다운 롱테이크 장면으로 꼽힌다. 임 감독은 “다듬어지지 않고 굽이진 흙길이 고단한 인생길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면서 “장면이 바뀌면서 이 노래가 가진 섬세한 정서를 해쳐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5분을 넘겨 한 컷에 담아냈다”고 했다.
그럼에도 임 감독은 “완벽한 영화를 단 한 편도 남기지 못해 부끄럽다”고 했다. 그는 “함량 미달의 영화를 찍어왔으니 영화 인생 전체가 아쉽다. 욕심스럽게 찍고 싶은 것들이 많았는데, 채워지지 않은 채로 찍어야 한다는 게 늘 어려웠다”고 했다. 요즘은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낸다는 그는 한국 영화계의 근황을 여러 번 물었다. 임 감독은 “그래도 감독이 자기 생각대로 찍을 수 있던 시절에 영화를 만들 수 있어서 행복했다. 나는 평생 영화를 만들어 온 사람이니, 우리 영화계가 싱싱하게 돌아가길 바랄 뿐”이라고 했다.
<참고문헌>
1. 백수진, "韓 최초 칸 ‘취화선’ 속 달항아리, 세계에 우리의 것 위상 높였다", 조선일보, 2024.6.11일자. ㅁ1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