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열암 박종홍의 생애와 사상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1.12.11 03:08

      

          열암 박종홍의 생애와 사상

1.

   열암 박종홍(1903-1976)은 18세에 평양고등보통학교(4년제)를 졸업하고이어서 그 학교에 설치되어 있는 사범과에서 1년을 수학하고, 1종 보통학교 훈도 자격을 획득한 뒤 곧바로 전라도 보성(寶城)의 보성보통학교 훈도로 발령받아 내려갔다. 19세 때의 일이다보통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서당에서 한학을 익혔다고 하는데 거기에서 그는 사략(史略)통감(通鑑)까지 읽었다고 한다.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로는 1920년대초 보성에는 아직도 조혼과 만학의 경향이 남아 있어서 한학을 많이 익힌 동갑내기 비슷한 학생들이 상투를 튼채 학교에 들어와서는 한시(漢詩시합을 하자고 덤비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고 한다. 1년 뒤 그는 대구의 수창보통학교로 자리를 옮겼다그때부터 시작되는 8, 9년간의 대구 생활이 열암의 생애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그는 4년동안(1922-26) 거기서 훈도생활을 하였다.

첫해 여름방학에는 경주의 석굴암의 불상을 연구하였는데이것을 기연으로 [개벽(開闢)]이라는 월간잡지에 <조선미술의 사적 고찰(1)>을 1년 동안 연재하였다(1922, 5-1923, 5). 그 문장은 최남선의 독립선언서투이고 내용은 일반 국사책에 나올만한 수준이지만 내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그의 용기이다.

당시 지식층이 얇았다고는 하지만 20세의 보통학교 교유로서 중앙의 월간지에 연재할 만큼 용기를 가젔다는 것은 요즘 청년으로서는 상상하기 쉽지 않다. 1925년에는 일본 문부성에서 시행하는 중등교원자격 시험(교육과)에 합격중등교사가 되는 자격을 획득해서 26년 대구 공립고등봉통학교(대구고보)의 교유로 발령받아 조선어와 한문을 가르첬다그때는 아직 조선어 말살정책을 시행하기 전이라 그는 교실에서 향가용비어천가삼국사기삼국유사동국사략(東國史略)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28년에는 <이퇴계의 교육사상>을 [경북의 교육]에 발표하였다.

29년에는 전문학교 입학 자격검정시험에 합격하여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의 선과생으로 입학했다선과생이란 예과과정을 거치지 않은 입학생을 가리키는데 이는 뒤에 대학에서 부과하는 시험에 합격하면 본과생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중등학교 교유는 대학을 나오고 운이 좋아야 얻어걸리는 직장인데 그의 학구열은 그것을 내팽개치고 서울로 올라와서 대학생이 된 것이다그의 이런 노력과 향학열이 평양의 동학이나 후배들에게 큰 자극이자 격려가 되었음은 여러 회상 속에서 발견된다.

그는 거의 설흔 살에 대학을 졸업하는 만학이었다일본에서 공부한 동년배가 귀국해서 전문학교에서 가르칠 때 그는 사각모를 쓰고 대학에 다녔다그러나 그는 쉬지 않고 노력한 덕에 그 늦은 세월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8, 9년 동안 대구 시절의 연구는 주로 유교중심의 한학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교육학 방면이었으나철학과에 들어온 뒤로는 그는 서양철학특히 독일 관념론 연구에 골몰하였다그는 더 넓은 세상을 향해 치달은 것이다. 33년 졸업과 동시에 대학원에 진학하였는데 이때 철학인들 끼리 모여 [철학연구회]를 만들고 잡지도 간행했다그는 <철학하는 것의 출발점에 관한 한 의문>이라는 글 한편을 발표하였다거기에서 그는 철학의 출발점은 현실이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사유의 초창기부터 그의 사유 속에는 현실문제가 자리잡은 것이다.

32년에는 장숙진 여사와 결혼하여 이후 슬하에 52녀를 두는 다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였다. 35년부터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로 출강하다가 35년에 전임교수로 발령받았다이화여전 교수시절에는 문과과장으로 보임되기도 하였다그의 강의와 지도는 많은 학생들로부터 존경받는 것이 되었다. 35년에는 특히 일본의 암파(岩波)서점에서 발간하는 유력한 학술지 [이상]에 하이데거에 있어서의 지평의 문제를 일문으로 발표하였다해방직전에는 이원구의 <심성록>, 이퇴계의 <경서석의>, 이덕홍의 <주역질의>, 이교의 <복성서>, 정이천의 <안자소호하학론>, 정혜화상의 <절요사기화족>등을 붓과 만년필로 필사하였다해방을 전후한 시기부터 그는 신문과 잡지에 많은 논문과 수상을 발표하였다.

해방과 더불어 그는 경성대학 철학과 교수로 취임하고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 교수가 되었다그로부터 68년 정년 때까지 33년 동안 그는 문리과대학 교수와 대학원장으로서 대학을 떠나지 않고 오직 학문연구에만 정진하였다. 53년 수복 후 54년에는 학술원 일반회원과 한국철학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55년에는 미네소타 프로젝트에 따라 1년간 미네소타 대학에서 연구하고는 귀국 길에 유럽 철학계를 둘러보았다.

그는 그 기회에 많은 세계적 지성을 방문하여 대담하였으며 그것을 발표하곤 하였다정년을 앞두고 그는 국민교육헌장을 초안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하였으며도산서원 원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69). 정년 후에는 잠시 성균관대학의 유학대학장과 대학원장한양대학의 문과대학장을 역임하다가 70년 박정희 정권의 대통령 교육문화담당 특보로 영입되어 약 5년간 전국의 각급학교를 방문해서 국민교육훈장의 이행을 독려하였다. 71년 다산학회 회장 추대, 75년 발병으로 이 직을 면제받고 치료하다가 다음해(76) 3월에 서거하였다향년 73.

2.

그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맨 처음에 쓴 것은 <일반논리학>(48)이다이 책은 당시 고등학교와 대학 1년생의 교재로 널리 읽혔다지금은 고등학교 수학에서 이미 기호논리학을 가르치고 있지만 그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교과서 구실을 할 수 있었다대학의 한 학기 교재로는 좀 부족했으나 그 뒤 여러 번 증보하였다.

그 다음에 나온 책이 부산 피난시절의 <인식논리학>과 <철학개론 강의>(53)이다전자는 당시의 지적 수준으로는 매우 학술적인 것이었고후자는 대학 강의안을 출판한 것인데 뒤에 <철학개설>로 증보개정(61)되었다이 증보개정판에는 우리나라의 선철들이 소개되어 있다이것은 한국적 사유를 처음으로 교과서에 반영한 것인데뒤에 한국사상 또는 한국철학이라는 개념이 잉태되는 기초를 만들 수 있었다.

거기에 이어 이미 신문과 잡지에 발표한 글들을 모아 <지성의 방향>(56), <철학적 모색>(59), <새날의 지성>(61), <현실과 구상>(63), <지성과 모색>(67)이라는 제호의 단행본으로 발표하였다수준높은 학술적 논문을 모아서는 <한국의 사상적 방향>(68), <한국사상사(불교편)>, <자각과 의욕>(72), <한국적 가치관>(75)을 간행하였다. 60년에는 <부정(否定)에 관한 연구>로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열암의 학문적 지향은 어디인가?

그는 <일반논리학>과 <인식논리학>을 저술하고는 이어서 논리학 체계를 구상하게 되었다그것은 위의 두 저술에 이어 <변증법 논리>, <()의 논리>, <창조의 논리>를 저술함으로써 완성하겠다는 것이었다그러나 <변증법 논리>만을 유고(77)로 발표하였을 뿐 나머지는 손을 대지 못하고 말았다그런 논리학 체계가 학문적으로 가능한지 안한지는 별도로 치더라도 그 구상이 중단되었다는 것은 비단 열암 개인뿐 아니라 한국 철학계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그것이 완성되었어야 철학적으로 그 의의를 검토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경성제국대학은 일본 동경제국대학의 식민지 분교이었기 때문에 교수들은 전원 동경제대 출신이고 따라서 학풍도 거의 그것을 답습했다다른 점이 있었다면 특히 사학과에서 우리의 역사를 형편없이 폄하하는 소위 식민지사관을 악랄하게 주장하는 것이었다철학과에서는 동경제대의 커리큘럼을 그대로 옮겨와서 독일철학 일변도로 가르쳤다.

그 시대의 일반적 경향에 따라 처음에는 신칸트학파의 영향 아래 주로 칸트와 헤겔 등 독일 관념론이 교수되었으나 이어서 후설의 의식현상학이 도입되고 거기서 혜성처럼 등장한 하이데거가 연구되었다이것이 1920년대 후반부터 30년대 중반까지의 일반적 흐름이었다. 30년대 후반부터는 전쟁준비로 광분하거나 또는 반전운동에 휩쓸려서 철학연구에 몰두할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해방 직후 우리나라 철학연구 제1세대가 대학교수로서 철학 강의를 해야 할 처지가 되었을 때 그들이 가르친 것은 다름 아닌 칸트헤겔후설하이데거가 주이고 거기에 곁들여서 니체 정도가 언급되었다철학사를 가르쳐야 했기 때문에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데카르트스피노자로크 등이 언급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625 전란을 당하여 삶이 극한상태에 빠지자 실존주의 사상이 물밀 듯이 들어와서 50년대를 풍미하였다지성계에서는 사르트르까뮈 등이 폭발적으로 읽혔다. 6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우리 것에 대한 자각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열암의 한학과 이퇴계이율곡최한기 등을 중심으로 한 유교연구(주로 성리학)가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그의 강의도 50년대 후반부터는 한국사상의 방향으로 움직여 갔다논문도 주로 한국사상에 관한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위에서 언급한 <한국의 사상적 방향>(68), <한국사상사(불교편)>, <자각과 의욕>(72), <한국적 가치관>, 미처 간행하지 못한 <한국사상사논고>(유학편)등이 이를 증명한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면 그의 저술은 첫째 논리학 계통과 철학 개설류둘째 <지성의 방향>, <철학적 모색>), <새날의 지성>, <현실과 구상>, <지성과 모색등 계몽적인 구상과 모색그리고 셋째 한국사상 연구이다구상과 모색은 마지막 단계인 한국사상 연구로 향하는 길 위에서의 모색이고 구상이다이것으로 보면 그의 사상적 고민의 축은 한국사상에 가서 멎는다.

열암은 유가적 인품과 교양을 갖춘 철학자였다나는 그분을 4, 5년 동안 모셔 봤지만 한 번도 화내는 모습을 본 일이 없다그는 온화하고 자상한 어버이 같은 분이었다누구에게나 늘 친절하고 자상하였다남을 험담하지 않음은 말할 것도 없고불필요한 객담이나 농담 따위는 아예 입에 올리지 않는 근엄한 군자요 인격자였다강의실에서 그는 명강의로 유명하였다발의(發疑)로 시작해서 결론에 이르는 논의과정이 분명하여 조금도 의심스런 데가 없었다.

글씨는 명필이어서 분필로 쓰는 판서도 아름다웠다저 앞에서 말한 붓과 만년필의 필사본은 뒷날 영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나눠 가젔는데 그 내용보다도 글씨가 아름답고 힘차서 여간 탐나지 않았다. 50년대 졸업생들은 열암 선생을 모시고 결혼식 올리는 것을 큰 영광과 보람으로 여길 정도로 제자들의 존경을 한 몸에 안았다그는 천성적으로 애국자이었다박정희 정권의 교육문화 특보로 근무할 때 한국의 지성계는 그것을 심히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한국의 대표적 지성이 독재정권을 비호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로는 그는 참으로 유학적 애국자였고그래서 흔들림 없이 자기의 외로운 길을 거침없이 걸어갔던 것이다그는 뛰어난 교육자이었다중등교와 대학에서 교육을 실천했으며처음에 쓴 논문도 교육이고 교유로서 지망한 교과목도 교육이었다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관여한 것도 국민교육헌장이고 마지막으로 국가에 봉사한 것도 교육문화 특보이었으며, 5년간 각급학교에 가서 강연한 것도 교육헌장이었다유가적 인격과 한국사상 연구 그리고 교육의 실천과 애국정신나는 열암의 일생을 이렇게 특징짓는다.

 

3.

이제 제자들이 그 분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했는가를 적어야 할 것 같다그것으로 그의 학문과 인격 및 후인들에게 준 그의 감화가 짐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63년 열암의 회갑을 앞두고 제자들은 마치 계돈 모으듯이 모금하여 회갑기념논문집을 준비하였다논문도 모았는데 이것을 모두 열암에게 주어서 손수 골라서 게재하도록 했다그것이 당시 유일한 제자들만의 회갑기념논총이었다.

그런데 논문집을 발간하고 보니 약간의 돈이 남았다이것을 가지고 그때 정체상태에 있던 한국철학회의 회지 [철학]을 대신하는 젊은이들 중심의 학회를 구성하기로 하고앞의 기념논총에 싣지 못한 논문들을 거기에 발표하기로 하였다학회명칭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 하는 문제로 약간의 잡음이 생겼다일부에서는 열암을 기리기 위해 모은 돈이고 그것을 밑천으로 만드는 학회이니 열암철학회로 하자고 하는가 하면열암의 동료교수 몇 분은 졸업생을 열암이 독차지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를 극력 반대하곤 하였다결국 고유명사를 정하지 못한 채 회지를 발간하지 않을 수 없어 그냥 철학연구회로 하고만 것이다이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고유명사 없는[철학연구회]라는 학회명의 유래이다나는 그때 그 회지 [철학연구1호의 편집자이었다.

열암이 세상을 떠난 직후 76년에는 제자들 중심으로 열암선생유고간행위원회가 결성되었다다음 해(77)에는 <변증법적 논리>가 유고로 간행되었다같은 해 <한국사상논고 유학편>과 <스승의 길>이라는 회상록 모음이 간행되었다. <스승의 길>은 두 번 발간되었다첫 번째는 77년에두 번째는 20년 후에 재간되었는데 후자에는 전자에 미처 수록하지 못하고 빠졌던 글들즉 여기에 수록하기로 청탁받아 쓰지 않고 이미 다른 곳에 발표한 회상록들을 마저 모아서 수록한 것이다.

대우재단에서는 이 책을 구입해서 그해 서울교육대학 졸업생들에게 기증하곤 하였다여기에는 동료교수와 평양고보 동창들대구 교유시절과 경성제대 시절의 제자 후배들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시절의 제자들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 교수시절의 제자들대학원장 시절에 인연맺은 사람들옆에서 지켜본 사람들언론사 등이 모두 참여하였다필자는 모두 82명이었다그 모든 글은 열암의 인품을 찬양하고 그로부터 받은 교훈과 격려를 회상하고 기록한 것들이었다.

열암은 3월 17일에 작고하였는데 작고한 다음해부터 졸업생들이 모여 3월 둘째 토요일에 산소참배를 시작했다이 행사는 약 30여년 계속되었다그러나 그 졸업생들도 세상을 떠나는데다 사모님마저 작고하신 2007년을 마지막으로 나는 참배를 중단하기로 하고그 대신 모여서 열암을 기념할만한 이야기를 하기로 하였다그 첫 번째 행사로 나는 한국철학 제1세대의 철학연구를 발표하였다(08). 거기에 이어 제2차로 50년대의 학풍을 발표하기로 했다.

78년에는 열암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다. 80년에는 <박종홍전집7권이 형설출판사에서 발간되었다그러나 여기에는 오자와 오식이 너무 많은데다가 많은 글이 수록되지 못해 언젠가는 다시 간행해야겠다는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98에 대우재단의 지원을 받아 나는 <박종홍전집7권을 재간하였다. 10년간의 교열과 새로 발견된 원고를 모두 수록해서 이번에는 완전한 것으로 만들어 묘소에 가서 고유제를 지냈다.

2003년에는 열암탄생 1백주년을 맞아 세 사람에게 열암철학을 발표하게 하고 이것을 열암을 기리는 회지 [현실과 창조3권에 수록하였다이것 역시 묘소에 가서 헌증하였다이 일들이 사모님 생전에 한 일이라 보람 있었다열암기념사업회에서는 해마다 훌륭한 업적을 낸 저자를 발굴하여 시상하기 시작했다이 상은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지금까지 30회 가까이 지속되고 있다상금은 처음에는 3백만 원이었으나 곧 5백만으로 증액했다그러나 금리가 떨어져 한정된 기금이 줄어들고 물가는 올라서 5백만 원의 시상도 해마다 하기가 버거워 몇 해전부터는 시상을 격년으로 하고 있다나는 열암기념사업회 회장을 11년간 역임하다가 2008년에 그 책을 벗었다이것으로 나는 생전의 열암선생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만분의 일에 보답한 것으로 자위하고 있다

                                                                                       <참고문헌>

1. 서울대 명예교수 소광희, 서울대동창회보 17. 20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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