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서산과 태안의 봄철 풍경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1.04.17 13:40

                                                                 수선화로 강림한 서산의 봄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에 있는 100년 된 고택에는 봄이 폭발하는 중이다. 서해안 고속도로 서산IC에서 그 집 앞까지 4㎞ 도로가 차로 막히지만 꾹 참고 들어가 보라. 일 년에 딱 한 번 폭발하는 봄을 목격할 수 있다. 집 이름은 ‘유기방 고택’이다. 충청남도 민속자료 23호다. 주소는 서산시 운산면 이문안길 72-10이다.

    3‧1운동이 벌어진 1919년 세운 이 집에는 서산 류(柳) 씨가 산다. 지금 살고 있는 사람 이름은 유기방(柳基方)이다. 올해 73세다. 23년 전 옆 마을에 살다가 이 집에 들어왔다. 서산 류씨는 ‘류'로 표기하지만 이 집 공식명칭은 ‘유기방 고택'이다. 집 솟을대문에는 여미헌(餘美軒)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넉넉한 아름다움이라는 뜻이다.

   과연 넉넉하다. 유기방은 뒷산 대나무 뿌리를 다 뽑아버리고 수선화를 심었다. 모두 2만 평이다. 담벼락 바깥에 빈터가 생기면 그곳에 모조리 수선화를 심었다. 그물처럼 땅속에 얽힌 대나무 뿌리를 다 제거하고 꽃밭을 만들었다. “나무를 심으려면 10년을 보라”고 한 조선 학자 홍만선과 달리, 대한민국 농부 유기방은 자그마치 23년 동안 수선화를 심었다.

   소나무와 수선화가 이리 어울릴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제주도에 유배됐던 추사 김정희가 벗에게 쓴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수선화가 마치 흰 구름이 멀리 깔려 있는 듯 흰 눈이 널리 쌓여 있는 듯합니다(漫漫如白雲 浩浩如白雪·만만여백운 호호여백설). 눈 감으면 그만이지만 눈을 뜨면 눈에 가득 들어오니 어찌 눈을 가려야 할지요.’(김정희, 완당선생전집3, ‘권돈인에게 보내는 편지5’)

    김정희를 황홀경에 빠뜨렸던 그 수선화가 서산에 가득 피었다. 봄이 폭발한다. 4월은 입장료를 받지 않으면 대혼란이 벌어질 정도로 인파가 몰린다. 올해는 더하다. 역병에 지친 사람들이 마스크 속에 웃음을 감추고 꽃에게서 위안을 찾는 것이다.

푸른 소나무와 노란 수선화가 이리 잘 어울린다. /박종인
푸른 소나무와 노란 수선화가 이리 잘 어울린다. /박종인

                                               백화산에서 사라지는 봄

    서산 수선화밭에서 서쪽으로 1시간 정도 차를 타고 가면 태안 백화산이 나온다. 포장 잘된 임도변에는 벚나무가 꽃비를 흩뿌린다. 봄이 간다.

백화산으로 오르는 벚꽃길. 봄이 간다. /박종인
백화산으로 오르는 벚꽃길. 봄이 간다. /박종인

    백화산에는 태일전(太一殿)이 있었다. 태일전은 태일성, 그러니까 북극성에게 제사를 올리던 사당이다. 태일성은 생사(生死)와 병란, 천지만물 생장을 관장하는 신이다.

    별에게 지내는 제사를 초제(醮祭)라고 한다. 그런데 태일성이 45년마다 하늘에서 위치를 바꾸니, 태일초제를 지내는 태일전도 함께 자리를 옮겨다녔다. 고려 때 강원도 통천에 있던 태일전은 1434년 세종 때 경북 의성으로 옮겼다. 그리고 1477년 조선 성종 정부는 경상북도 의성에 있던 태일전(太一殿)을 백화산으로 옮겼다.(1477년 6월 1일 ‘성종실록’) 별이 위치를 바꾼 곳이 강화도냐 인천이냐 1년 가까이 격론 끝에 정부는 별이 태안으로 갔다고 결론내렸다.(1476년 8월 24일, 1477년 윤2월 18일 등 ‘성종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태일전은 1479년 태안으로 이건이 완료됐다.

태안 백화산 태을암에 있는 태을동천. 태안에 살던 김해 김씨들이 자기네 족보를 암벽에 보관한 장보암이다. 뒤쪽 암반에는 바둑판이 새겨져 있다. 태을암에는 국보로 지정된 태안 마애삼존불이 있다. /박종인
태안 백화산 태을암에 있는 태을동천. 태안에 살던 김해 김씨들이 자기네 족보를 암벽에 보관한 장보암이다. 뒤쪽 암반에는 바둑판이 새겨져 있다. 태을암에는 국보로 지정된 태안 마애삼존불이 있다. /박종인

     어렵게 백화산에 태일전을 만들고 나니 1518년에는 아예 태일전을 철거하자는 주장이 나왔다.(1518년 9월 4일 ‘중종실록’)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왕위에 앉힌 사림(士林)이 주인공이다. 성리학에 어긋나는 일체를 배격했던 사림에게 도교 성전은 있을 수 없는 이단이었다. 조선 왕실은 도교 또한 중요한 종교였기에 중종은 어물쩍 이 청을 넘겨버렸다. 하지만 1528년 윤10월 3일 태일전 멍석을 돗자리로 교체하라는 어명 이후 실록에서 태일전은 등장하지 않는다.

별은 사라졌다. 그런데 훗날 20세기에 그 태일전 자리에 김해 김씨 가문이 태을동천(太乙洞天)을 지었다. 백제 때 마애삼존불상이 있는 태을암 경내다. 태을과 태일은 같은 말이다. 동천(洞天)은 신령이 사는 영역이다.

1923년 태안 지역에 사는 김해 김씨 문중은 태을암 옆 암벽에 태을동천 넉 자를 새겨넣었다. 이듬해 이들은 암벽을 뚫고 새로 만든 족보 한 질을 집어넣었다. 바위 상단 왼쪽이 족보를 넣은 곳이고 오른쪽에는 ‘가락국 기원 1883년 갑자’라고 새겨져 있다. 서기 1924년이다.

장보암 세부. 왼쪽 뭉툭한 부분에 구멍을 뚫어 족보를 넣고 바윗돌로 막았다. /박종인
장보암 세부. 왼쪽 뭉툭한 부분에 구멍을 뚫어 족보를 넣고 바윗돌로 막았다. /박종인

   족보를 넣은 바위를 장보암(藏譜岩)이라 한다. 김해 김씨 장보암은 경남 산청에도 있다.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릉 건너 절벽에는 1896년 김해 김씨 일파가 족보를 집어넣었다. 전남 광양 다압에도 있고(김해 김씨) 충북 보은에도 있다(기계 유씨 보실과 능성 구씨 보갑). 전북 임실에 살던 경주 이씨는 고조부까지 5세대 족보를 바위에 새겨넣었다.

태을동천 족보는 바스러져 폐기됐다.(이왕기 등, ‘태안 김언석 가옥’, 태안문화원, 2015, p72) 강원도에서 경상도로 충청도로 향불을 들고 별을 좇던 시절도 갔다. 고운사 숲길에서 최치원의 슬픈 뒷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추사를 황홀하게 한 수선화도 한철이다. 새털처럼 많았던, 봄날이 간다.

태을암 대웅전 앞에 있는 서양란. 공기 속에도 봄이 보인다. /박종인


태을암 대웅전 앞에 있는 서양란. 공기 속에도 봄이 보인다. /박종인

     1. 박종인, "서산 소나무숲 속에는 봄이 아득하였다", 조선일보, 2021.4.14일자. A28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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