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수주 변영로 시인의 생애와 업적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1.04.15 03:29

                                                                            수주 변영로 시인의 생애와 업적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문학평론가, 칼럼니스트) 대산 신상구


    변영로(卞榮魯)는 1898년 6월 27일(음력 5월 9일) 경기도 부평도호부 하오정면 고리동(지금의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고강동 313번지)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변영복(卞榮福)이었으나, 나중에는 영로(榮魯)라는 이름을 주로 썼고, 61세가 되던 1958년이 되어서야 변영로로 정식 개명했다. 호는 수주(樹州)이다. 할아버지는 변해영(卞海永), 아버지는 변정상(卞鼎相), 어머니는 진주강씨(晉州姜氏), 형은 법조인 변영만(卞榮晩, 1889-1954)과 국무총리를 지낸 변영태(卞榮泰, 1892-1969)이 있었다.
   서울 재동·계동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0년 사립 중앙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2년 체육교사와의 마찰로 자퇴하고 만주 안동현을 유람하다가 같은 해 평창이씨(平昌李氏) 흥순(興順)과 결혼했다. 1915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영어반에 입학하여 3년 과정을 6개월 만에 마쳤다.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와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했다.
   1918년『청춘(靑春)』에 영시「코스모스(Cosmos)」를 발표하면서부터 시인으로 활동하였는데, 당시에는 천재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1919년에는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해 해외에 소개했다.
   시인으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은 1920년『페허(廢墟)』제2호에 평론〈메텔링크와 예이츠의 신비사상〉,『신천지(新天地)』에 논문 〈종교의 오의(奧義)〉, 시 〈꿈많은 나에게〉 · 〈나의 꿈은〉 등 5편을 발표하면서부터 전개되었다. 1921년에는『장미촌(薔薇村)』동인으로 참가했으며,『신민공론(新民公論)』주필을 지냈다. 1922년에는『신생활(新生活)』에 대표작 〈논개〉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창작활동 초기부터 과작(寡作)의 시인이었다.『신생활』 · 『동명』 ·『개벽』 등을 통하여 한 해에 5, 6편 정도를 발표했을 뿐이다.
   1923년에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로 부임하여 활동했다.
   1924년에는 첫 시집『조선의 마음』이 평문관(平文舘)에서 간행되었는데, 거기에는 〈버러지도 싫다하올 이몸이〉를 비롯한 28편의 시와 수상 8편이 수록되었다. 그러나 이 시화집은 내용이 불온하다 하여 발행과 동시에 곧 총독부에 의해 압수되어 폐기 처분된 바 있다.
   1931년는 도미해 캘리포니아 새너제이 주립 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중퇴했다.
   1933년에는 동아일보 기자, 1934년에는『신가정(新家庭)』주간을 지내다 광복 뒤 1946년에 성균관대학교 영문과 교수, 1950년에 해군사관학교 영어교관을 역임했다.
   1953년에는 대한공론사(大韓公論社) 이사장에 취임했고, 1955년에는 제27차 비엔나국제펜클럽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한 바 있다.
   변영로 시인은 1930년에 박용철 · 김영랑 · 정지용 · 정인보 · 이하윤 · 신석정 등과 시문학파 동인으로 활동했고, 대표작으로는 〈논개〉·〈사벽송〉 등이 있다. 시집으로는 한글 시집『조선의 마음』과 영문 시집『진달래 동산』등이 있고, 수필집으로는『명정 40년』이 있다.
   변영로 시인은  우리나라 신문학 초창기에 등장한 신시의 선구자로서, 압축된 시구 속에 서정과 상징을 담은 기교에 중점을 두고, 시어의 선택과 수사, 그리고 연마에 빼어난 시인적 재능을 보였으며, 민족의 정서를 섬세하고도 세련된 기법으로 시화시켰다. 그리고 수필에도 재능이 있었다.
   변영로 시인이 상재한 제1시집『조선의 마음』(平文舘, 1924)이 2021년 4월 11일 오전 11시부터 12시까지 1시간 동안 KBS 1 TV에서 방영된 ‘진품명품 1270회’ 프로그램에서 김영복(67세) 서예/고서 감정위원이 3,000만 원으로 평가하여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 시집은 일제 식민지하 시대정신 속에서 저항적 민족의식의 각성으로 비소하며 읊조리는 암울한 상황을 극복하고 희원한 것으로, 우리 한민족에 대한 올바른 정체성과 안타까운 심정을 형상화한 대표 시집이라고 할 수 있다. 변영로 시인은 이 시집에서 조선의 마음을 ‘님’이라는 실체로 호칭하고, 우리 한민족이 머잖아 상봉할 님을 위하여 고통과 수난을 참고 견디는 순교자적 소명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1951년에 제2회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1953년에 대한공론사(大韓公論社) 이사장에 취임하여 영자 일간지를 발간했다. 1955년에 제1대 한국 펜클럽 회장에 선출되어 제27차 비엔나국제펜클럽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술이라 하면 수주(변영로)를 뛰어넘을 자가 없고 담배라 하면 공초(오상순)를 뛰어넘을 자가 없다."라는 유행어가 한때 1950년대 중반에 서울 항간에서 난무했는데, 이는 당시 시인 수주 변영로(樹州 卞榮魯)가 알아주는 애주가였고 시인 공초 오상순(空超 吳相淳)이 알아주는 애연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인 수주 변영로가 자신의 단골 주점인 은성 주인 이명숙의 아들 최불암이 서라벌예술대학에 합격하자 막걸리잔을 내밀고 술을 한잔 주었다. 하지만 최불암이 막걸리잔에 뜬 술지게미는 손으로 걷어서 내버리자, 변영로는 이놈이 음식을 함부로 버린다고 화를 내며 즉석에서 귀뺨을 후려쳤다는 일화가 있다.
   변영로는 동창이자 절친인 윤치영과 함께 중학교 수업과 YMCA 학당 강의를 빼먹고 땡땡이를 치는 일이 자주 있었다. 한번은 이를 본 중앙중학교 교사이자 YMCA 학당 강사인 월남 이상재가 변영로 일행이 있는 곳을 보고는 변정상씨, 변정상씨 하고 계속 불렀다. 화가난 변영로가 이상재에게 선생님 치매걸리셨습니까? 왜 남의 아버지 이름을 부르십니까? 하자 이상재는 변정상이 내 친구이다. 그런데 네가 변정상의 씨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씨란 말이냐? 라고 답했다 한다. 이상재의 기지는 변정상의 회고록과 이를 지켜본 윤치영의 자서전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2살 연상인 평창 이씨 이흥순(李興順, 1896년 출생)과 결혼했으나 사별하여, 남원 양씨인 양창희(梁昌姬)와 재혼했다.
   변영로 시인은 1961년 3월 14일 인후암으로 사망했다. 묘소는 경기도 부천시 고강동 산 63-7번지 밀양변씨 묘역에 위치하고 있다.
   부천 중앙공원에는 수주 변영로의 논개 시비가 우뚝 서 있어 오가는 부천시민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부천문화재단에서는 ‘논개’의 시인 수주 변영로 선생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기리기 위한 ‘수주문학제’를 해마다 9월 말에 개최하고 수주문학상을 수여하고 있다.
                                                                                      <참고문헌>
    1. “수주 변영로”, 네이버 위키백과, 2021.4.11일자.
    2. 백창현, “부천문화재단, 수주 변영로 선생 기리는 '수주문학제' 개최”, 중부일보, 2019.9.23자.
                                                                                     <필자 소개>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아호 대산(大山) 또는 청천(靑川), 본관 영산신씨(靈山辛氏) 덕재공파(德齋公派)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2019),『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  『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5권. 
  .주요 논문 :「항일독립투사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중봉 조헌 선생의 생애와 업적」,「고려 태조 왕건의 포용정책과 천안」,「최근 타계한 충청지역 원로 향토사학자들의 생애와 업적 고찰」,「한국 연극사 연구 선구자인 노정 김재철의 생애와 업적 고찰」,「202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미국의 여류시인 루이즈 글릭의 생애와 문학세계」,「눈물과 정한의 시인 박용래의 생애와 문학세계 등 113편
  .주요 발굴 실적 : 민촌 이기영의 천안 중앙시장 3·3항일독립만세운동 기록(2006)
                        포암 이백하 선생이 기초한 아우내장터 독립선언서(2007)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시부문 신인작품상, <문학사랑>·<한비문학> 문학평론부문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동양일보 동양포럼 연구위원, (사)대한사랑 자문위원, 평화대사, 통합논술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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