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진 한국토종씨앗박물관 관장
아내와 함께 전국 돌며 수집… 연해주·만주도 다녀와
떡·비누 만들기, 콩 맛 보기 등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
산두도, 흰다닥, 잔다다기, 홍도도, 귀도, 부자리, 조선도, 한양조, 대관도, 흰베, 소두조, 단두나, 흑대구, 승실조….
무슨 이름일까? 얼핏 복숭아나 과일 품종처럼 비쳐진다.
충남 예산군 대술면에 위치한 한국토종씨앗박물관에서 기획·전시 중인 토종벼의 이름이다. '토종벼, 천개의 이름으로 한반도를 노래하다'라는 주제의 이 전시장에는 강희진 관장이 전국을 발로 뛰며 수집한 토종 볍씨 수백 종을 전시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통일벼와 삼광, 오대, 동진 등보다 훨씬 다양한 벼가 이 땅에 재배돼왔음을 실감할 수 있다.
"같은 벼, 같은 콩이라도 동네에 따라 달라집니다. 토질과 환경, 날씨, 농법이 달라서 몇 년이 지나면 크기와 때깔, 윤기, 무늬도 변합니다. 무엇보다 이들 씨앗에는 그것을 재배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롯이 숨어 있습니다. 토종 씨앗을 하나 하나 수집하면서 거기에 담겨 있는 서사도 모으고 있습니다."
□ 아내와 함께 전국 순례… 연해주·만주서도 수집
강 관장은 예산에서 태어나 자라고 30여년 농사를 지은 토박이 농사꾼 출신이다. 농업을 '은퇴'하면서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이런 저런 고민 끝에 토종씨앗박물관을 시작했다고 한다.
강희진 관장이 토종씨앗을 구하여 직접 재배 중인 개구리참외에 대해 설명하고있다.
"사실 농민에게 은퇴라는 게 없잖아요? 그러나 저는 언젠가 가능하면 빨리 은퇴를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농사를 그만두면 글을 쓰겠다고 마음 먹었지요. 그때 우연히 토종씨앗이 눈에 들어와 박물관을 시작하게 됐어요."
농사를 은퇴한 뒤 전국 박물관을 답사했는데 이때 토종씨앗박물관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강 관장의 아내 김영숙씨도 슬로푸드 해온 터라 토종씨앗에 대한 관심이 컸다. 토종씨앗 연구·보전운동의 선구자인 안완식 박사(농촌진흥청 농업유전자원센터 초대 센터장)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부부가 의기투합하여 토종씨앗을 수집하여 전시, 보관, 교육하는 박물관을 짓게 된 것이다.
'토종벼, 천개의 이름으로 한반도를 노래하다'라는 주제의 기획전시장 모습.
2017년 문을 연 한국토종씨앗박물관은 115㎡(35평)의 면적에 그동안 강 관장 부부가 수집한 토종씨앗을 보관·전시하고 있다. 벼와 콩, 팥, 보리, 밀, 상추씨 등 1만5000여 종에 이른다. 콩만 해도 기름콩, 흰콩, 단천, 가우사리, 평북태, 울콩, 늦콩, 홀아비밤콩 등 수백 가지이고 팥도 참팥, 색깔쟁이팥, 개미팥, 깨골팥, 길가마귀, 유월팥 등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같은 참팥이라도 부여와 괴산, 단양, 횡성 등 동네에 따라 다르다.
농촌진흥청이 정의한 '토종'은 최소한 30년 이상 우리나라 기후와 환경에 적응한 작물을 가리킨다. 농작물은 1년에 한번씩 수확하기 때문에 30년이면 30세대를 거친 것으로 이때쯤이면 그 씨앗을 다른 데 심더라도 유전적 특성이 바뀌지 않는 '고정종'이 된다고 한다.
강 관장은 시간이 날 때마다 아내와 함께 2박3일 혹은 4박5일 일정으로 전국을 돌며 토종씨앗을 수집한다. 가까운 충청도는 물론 울릉도와 제주도 등 안 가본 데가 없다. 동포들이 사는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 흑룡강성도 다녀왔다.
백두산 아래 첫마을인 중국 길림성 안도현 내두산 마을에서는 고추와 대파씨를 수집했다. 조선족 동포가 1937년 한반도에서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챙겨온 씨앗으로 대를 이어 농사를 지어온 것이다.
□ 씨앗 하나하나마다 역사와 이야기 담겨
울릉도에서는 요즘 보기 어려운 홍감자도 수집했다. 홍감자는 알이 작은 붉은 색 감자로 울릉도 사람들이 쌀 대신 주식으로 삶아 먹고, 송편과 인절미도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한 주민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계속 이 감자씨를 심고 지켜온 덕분에 수집할 수 있었다.
"씨앗은 대개 두 가지 경로로 수집합니다. 사전에 얘기를 듣고 찾아가서 얻는 것인데 이런 경우는 드뭅니다. 대개는 아내와 함께 무작정 시골을 찾아갑니다. 이제는 이골이 나서 농가를 보면 딱 감이 잡힙니다. 제 예감이 50% 정도는 들어맞아요. 어떤 농가는 2-3가지, 많은 집은 20-30개 품종의 토종씨앗을 갖고 있더군요."
농민들은 대부분 애지중지 보관해온 씨앗을 선선히 내준다고 한다. 토종씨앗의 가치를 알아주고 거기에 담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을 고맙게 여기는 것이다. 한 농가에서 한나절 넘게 씨앗에 담긴 이야기도 듣는 경우도 있다. DNA에 초점을 둔 생명과학도와 달리 강 관장은 그 씨앗에 담긴 역사와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는데도 큰 관심을 갖고 있다.
"논산에 매꼬지상추라는 게 있어요. 봄에 심은 상추는 장마철 쯤 되면 꽃대가 올라와 못먹게 됩니다. 매꽃마을 주민이 꽃대가 늦게 올라오는 상추를 발견했는데, 이 상추씨를 고르고 고르며 수십년 농사를 지어 우수한 상추를 개발해냈습니다. 맞도 좋은 데다 한 여름에도 계속 상추를 비싸게 내다 팔 수 있어 돈도 많이 벌었다고 합니다. 주민들이 이 품종을 지키기 위해 엄청 노력을 했고…."
강 관장은 토종씨앗을 나눠주는 일도 하고 있다. 소중한 토종씨앗을 널리 퍼뜨리고 보전하기 위해서이다. 올해도 지난 3월 토종벼 나눔행사를 가졌다. 그는 "씨앗은 파는 게 아니라 나눠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농촌에서 농민들끼리 씨앗을 나눠주기는 해도 돈을 받고 파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 박물관은 우리가족 먹여 살려준 씨앗에 대한 감사
강희진 관장은 2017년 박물관을 개관한 이래 지금까지 1만5000여 종의 토종씨앗을 수집했다.
그는 박물관 밖 한켠에 개체유지 포장을 만들어 놓고 직접 농사도 짓는다. 전국에서 수집한 토종씨앗을 심어 씨앗과 열매를 수확도 해보는 것이다. 올해도 여러 종류의 조와 당근, 생강, 상추, 고추 등을 재배하고 있다. 감참외와 개구리참외, 은천참외도 심었다.
박물관에서는 체험과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전시장을 보면서 토종씨앗에 대해 공부도 하고, 떡과 비누 만들기, 쌀과 콩 맛 보기, 콩나물 기르기 체험도 할 수 있다. 충청남도 농촌체험학습 프로그램 경진대회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기획전시회도 열고 있다. 지난 2021년에는 '콩의 나라 대한민국'이라는 전시회를 열었다. 콩의 기원이 한반도와 중국 만주지방이라는 것에 착안하여, 전국에서 수집한 800여 종의 콩을 전시했다.
한국토종씨앗박물관 강희잔 관장이 자신이 수집한 토종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씨앗이 참 재밌어요. 천 개의 씨앗에는 천 가지의 서사가 있지요. 어떤 농부는 어려서 죽은 딸이 좋아했던 콩을 계속 재배하고, 어떤 아들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억하기 위해, 어떤 사람은 자신이 어렸을 때를 추억하기 위해 감자를 심습니다. 인간이 무언가를 기억하고 삶을 살아가는 방식인 것이지요."
그는 토종씨앗을 수집하면서 모은 이야기들을 모아 (누구도 토종을 지키라고 말하지는 않았다)(렛츠북 간)라는 책을 펴냈다.
"30년간 농사를 지었어요.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자식들 가르치고 어머니하고 우리 부부가 먹고 살아온 게 씨앗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기대어 살아온 농사와 씨앗에 대한 부채를 다소나마 갚는 게 토종씨앗박물관입니다."
<참고문헌>
1. 김재근, "씨앗 1만 5000종에 담긴 역사·이야기 들려주고파", 대전일보, 2024.7.28일자. 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