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집 지붕에 올라 하양 헝겊쪼가리들로 묶은 굵은 청솔가지를 들고 검은 허공에 내젓는다.

그리고 애곡(哀哭) 한다.

   머릴 조아리고 절을 한다. 그 분, 단재의 혼을 모셔 오려고.

   단군의 땅, 고구려 땅, 발해 땅에서 왜놈들이 가둬 놓은 얼음 감옥에서 돌아가신 그 분의 언 넋을 녹여드리고 싶어.

또 염치는 없지만. 역사도, 민족도, 위기감도 망각한 이 사람들에게 당신의 혼불을 다시 지펴 시대의 횃불 올릴 수 있을까 바라면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충청남도에서 가난한 선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세에 성균관에 입학해 곧 성균관 박사가 됐다.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에서 우국적인 기사를 쓰면서 ‘을지문덕’, ‘이순신’, ‘최영’의 영웅전을 출판했다. 그리고 한국 근대 역사학의 시작으로 평가된 ‘독사신론’을 연재했으나 조선이 망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 광복회 창설에 가담하고, 신문들에 관여했다.

   1913년 상하이로 내려갔다가 1914년 고구려의 첫 수도로 알려진 환인으로 가 대종교의 윤세복 형제가 세운 동창학교에서 학생(독립군)들에게 한국사를 강의하는 한편 고대사 연구에 매진했다. 고구려 유적들을 답사하고 백두산도 방문하면서 고대사를 심층적으로 연구한다. 그는 일본이나 조선사학계와는 다른 주장의 논문과 저서들을 출판했고, 이 주장들은 민족주의 사학자들에 의해 계승·발전돼 훗날 북한에서 다시 주장됐다.

   신채호는 1915년 베이징에 머물면서 신문에 일제를 비판하고 한국과 중국의 대동론을 주장했다. 베이징대학 도서관에서 현재도 확인되지 않거나 알 수 없는 명칭의 많은 책들을 섭렵한다.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에 참여하지만 이승만 등 외교론자들과 갈등을 빚어 탈퇴했다.

   이 무렵 의열단장인 김원봉의 부탁으로 불후의 명문이요, 독립운동가의 정신적 기둥 역할을 한 ‘조선혁명선언’이 탄생했다.

   그 무렵 동아일보에 ‘조선사연구초’를 1년 가까이 연재했다. 그는 유교와 김부식을 비판하면서 ‘낭가사상’을 주장했다. 또 풍류, 즉 풍월도를 고구려가 원조선으로부터 계승했고, 신라가 화랑으로 발전시킨 것으로 봤다. 

   독립전쟁에 매진하던 그는 이회영 등의 영향으로 1927년부터 무정부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그리고 거사자금을 확보하다가 체포돼 여순 감옥에 갇혔다.

   그가 감옥에서 병으로 고통받으면서도 조선일보에 연재한 ‘조선사’의 총론에는 이런 글이 있다.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생하여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생태의 기록이니, ~‘조선사’라 하면 조선민족의 그리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역사는 我와 非我의 투쟁의 기록이니라."

   8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던 단재 선생은 염원인 독립을 8년 앞둔 1936년 2월 21일 뇌일혈로 순국했다.

   단재는 한학자와 교육자로 출발해 언론인, 사회운동가, 독립운동가, 역사학자, 정치사상가, 문필가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역사, 종교, 문화, 문학, 역사철학, 아나키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학문과 사상을 섭렵했다. 

   안재홍은 이렇게 평가했다. "단재의 일념은 첫째 조국의 씩씩한 재건이었고, 둘째는 그것이 미처 못될진대 조국의 민족사를 똑바로 써서 시들지 않는 민족정기가 두고두고…."라고 했다. 또 "신 단재는 구한말에 낳은 천재적 사학자요, 또 열렬한 독립운동자이다." 

   단재에게 역사 연구의 우선 목적은 조선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이었다. 문명사의 틀에서 상고사를 해석했고 자기논리와 언어학, 지리조사 등의 다양한 연구방법론으로 연구했다.

   한민족의 활동 범주를 만주 일대로 확장했고, 시간적으로 단군개국 연대를 수용했다. 그리고 인간 및 국가의 가장 기본이며 힘의 원천을 ‘자의식’으로 삼았다.

   난 묻는다. 어떤 역사학자가 목숨 걸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역사를 연구했고, 끝내는 감옥에서 죽었는가? 어떤 역사학자가 단재만큼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섭렵했으며, 현장 답사를 했고, 그토록 많은 저서와 역사소설, 시, 평론들을 썼는가? 세상에 이러한 역사학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병도, 신석호만 있는가? 김원룡, 이기백, 김석형만 있는가? 홍명희, 이극로만 있는가?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와 페르낭 브로델(Fernad Braudel)만 말할 것인가? 

   젊은 역사학자들에게 말한다. 역사학은 다른 분야의 학문과는 다르다. 역사학자는 일반적인 직업인이 아니며, 더더욱 필경사나 번역가, 광부가 아니다. 

   ‘일편단생’에서 따온 ‘단재’를 호로 삼은 신채호는 「이순신 열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필(史筆)이 강하여야 민족이 강하며, 사필(史筆)이 무(武)하여야 민족이 무(武)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1. 윤명철, "초혼 단재 애곡", 기호일보, 2022.2.22일자. 1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