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이 끝나고 서울에 ‘반도화랑’이 생겼다. 현재 롯데호텔 자리, 반도호텔 1층에 있던 여섯 평짜리 조그만 화랑. 1960년대 초 화가 이대원이 운영했고, 현대화랑 박명자 회장이 당시 점원으로 일했다. 박 회장의 회고에 의하면, 화랑 문을 열면 정면 벽 왼쪽에 이상범, 오른쪽에 박수근의 작품이 늘 나란히 걸려 있었다. 화랑의 대표 상품이었던 것이다. 이상범 작품이 6000원, 박수근 작품이 3000원에 거래되던 시절이었다.
청전(靑田) 이상범(1897~1972)은 당대 최고의 인기 작가였다. 작품을 제작하자마자 대부분 바로 팔렸다. 가격도 박수근보다 비쌌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에 방문했을 때 하와이 주지사에게 선물한 작품이 이상범의 ‘아침’이었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 존슨 대통령에게 막대한 지원을 얻으러 갈 때도 이상범의 병풍을 들고 갔다. 외국인에게 한국 고유의 느낌을 선사하는 최적의 선물이었다.
그러나 한국화(畵)의 인기는 급락했다. 시장 가격은 터무니없이 떨어졌고, 근대 한국화의 대표 주자 청전 이상범의 이름마저 젊은 세대에게는 익숙지 않다. 현란하고 자극적인 현대미술의 틈바구니에서, 청전의 담백하고 고즈넉한 그림은 별로 눈길을 끌지 못한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젊은 심전(心田), 청전(靑田)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전주 이씨 무관으로 평해군수와 칠원현감을 지냈으나, 이상범이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세상을 떴다. 집안이 급속히 기울자, 모친은 가산을 정리하고 상경했다. 자식들을 제대로 공부시키기 위해서였다. 이상범은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교과서 살 돈이 없어 친구 것을 베껴 썼는데, 글씨뿐 아니라 삽화까지도 똑같이 그려 주위를 놀라게 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안중식과 조석진이 운영한 서화미술회에 입학했다. 거의 학비 없이 공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이상범은 심전(心田) 안중식(1861~1919)의 수제자가 돼, 아예 그의 개인 화숙에서 함께 지냈다. 당대 가장 이름난 화가였던 안중식에게 맡겨진 그림 주문을 이상범이 대필했다고 할 정도로, 이상범은 ‘리틀 안중식’으로 통했다. 이에 걸맞게 심전 안중식은 그의 친구 오세창과 의논해, 이상범의 호를 ‘청전(靑田)’, 즉 ‘젊은 심전’으로 지어줬다. 1919년 3·1운동으로 오세창은 감옥에 잡혀가고 안중식도 고문 후유증으로 타계하면서, 이상범은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 됐다. 그는 “고아가 된 것처럼 울었다”고 썼다.
◇청전의 기자 시절
스승의 죽음은 슬픈 일이지만, 새 시대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상범은 스승의 그늘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이상범의 절친이자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변영로(1897~1961)는 3·1운동 독립선언서를 영어로 번역한 인물인데, 이 무렵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동양화론’이라는 글을 신문에 발표했다. 근대 조선화는 독특한 화의(畫意)도, 예민한 예술적 양심도 없는 그림이라고 통렬한 비판을 쏟아낸 글이었다. 그러고 보면, 동양화는 ‘매뉴얼’을 따르고 익히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이상범은 수백 년 지속된 관습에서 벗어나, 개성과 시대의 변화를 드러낸 동양화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던 세대였다.
1926년, 이상범이 29세였을 당시 그린 ‘초동(初冬)’은 그 고민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의 스승이 봤다면 꾸짖었을지 모른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그렸기 때문이다. 높은 산도 없고, 기묘하고 웅장한 바위도 없다. 평범한 토산(土山)뿐이다. 초겨울 경작을 마친 밭과 둔덕, 잡풀과 앙상한 나무들이 더없이 쓸쓸한 느낌을 주는 그림. 이상범은 우리 주변의 흔한 풍경, 전혀 특별할 것이 없이 황량하기까지 한 풍경을 작품 소재로 삼았다. 지금 관점에서는 당연해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미술사의 전환을 이룬 시도였다.
젊은 청전은 바빴다. 1927년부터 1936년까지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신문소설 삽화 대부분을 그렸다. 신문에 들어가는 이미지 자료를 편집하는 일도 했다. 동시에 매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발표해 10회나 특선을 차지했다. 1930년대 소설계 이광수의 위치에 해당하는 미술계 인물이 이상범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기실 이광수와 이상범은 동아일보에서 함께 일했다. 갑자기 연재 소설이 펑크 나면, 이광수는 그 자리에서 다른 사람의 소설을 이어 쓰고, 이상범은 그 소설 첫머리만 읽고 삽화를 그려 마감 시간을 맞췄다.
◇전쟁 때 죽도록 그린 그림
안 그런 화가가 어디 있었겠냐마는, 청전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를 신문 사진에서 지운 주인공이었기에, 온갖 고초를 겪었다. 해방 때까지 언론 활동이 전면 금지됐고 취직도 불가능했다. 그러다 일제 말에는 전쟁 옹호 미술 단체에 추대돼, 친일 이력을 남겼다. 개인사도 불행하고 복잡했다. 촉망받던 신진 화가였던 장남 이건영이 6·25전쟁 중 의용군에 합류했다가 부산 미군 포로수용소에 갇혔다. 친구 삽화가 이승만을 통해 이 소식을 들은 이상범은 통곡했다. 이건영은 이후 월북했다.
시련이 닥칠 때마다 이상범은 그림에 매달렸다. 그가 나름의 자기 양식을 정립했다고 할 수 있는 시기는 바로 전쟁기. 부산에서 대구로 피란처를 옮긴 후, 더 많은 작품을 쏟아냈다. 대구의 무더위 속에서 작디작은 골방에 틀어박혀 마치 원한 맺힌 사람처럼 그는 그림만 그렸다. 1952년 대구 미 문화원 화랑에서 생애 유일한 개인전을 개최했다. 총 25점의 작품을 발표했고 거의 다 팔렸다. 고(故) 이건희 회장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작품 ‘추강모연(秋江暮煙)’이 바로 이때 그려진 작품. 그림의 배경은 가을인데, 제발에는 1952년 여름에 그렸다고 쓰여 있다. 여름에 왜 가을을 그렸으며, 세상이 그토록 어지러운데 배 띄운 어부는 어찌 이리도 평화로운가? 아무리 시대의 사실성을 담으려 노력해도, 전쟁의 현실은 차마 직면하기 힘든 고통이었다. 전쟁이라는 현실 앞에서 그는 ‘시골 사람의 가장 평범한 일상’이라는 판타지를 그림으로 구현했다. 지극히 평화롭고 아스라하게.
◇평화로운 시골 풍경
시골 사람의 가장 평범한 일상, 그것을 그리는 데 이상범은 평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펑퍼짐하게 펼쳐진 낮은 언덕에 초라한 집이 하나 있고, 일 마친 촌부가 지게 지고 언덕길을 올라 귀가하는 장면. 언덕 앞으로는 졸졸졸 개울이 흐르고, 크고 작은 바위에 부딪혀 방향을 바꾼다. 나무와 잡풀, 장소와 등장인물, 모두 이름이 없다. 익명의 세계이면서 동시에 어떤 이름을 갖다 붙여도 될 것 같은, 어떤 전형적인 조선 풍경을 그리려 그는 애썼다. “우리의 그림에는 우리의 분위기, 우리의 공기, 우리의 뼛골이 배어져야 한다”고 이상범은 썼다.
이상범은 하루 중 새벽과 해 질 녘 풍경을 즐겨 그렸다. 아직 어두운 마을에 일찌감치 일을 나서는 사람의 모습을 자연 속에 파묻히게 그려 넣었다. 그림 속 인물은 평생 일만 해서 장딴지가 굵고 허리가 굽었지만, 변함없이 새벽을 열고 해 질 무렵 초라한 집으로 돌아온다. 어쩌면 일평생 마을 밖 구경조차 나가 본 일 없을 것 같은 순박한 시골 사람들. 이들에게는 오로지 성실함과 부지런함이 무기다. 그것이야말로 조선을 일군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의 저력 아닌가. 어떤 면에서 이상범의 작품은 박수근의 작품과 통하는 데가 있다. 보통 사람의 정직함과 우직함이야말로 진실한 가치라고 일깨운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들이 한국의 국민 화가로 사랑받았던 이유일 것이다.
이상범이 바란 것은, 그림의 촌부처럼 스스로도 그저 성실하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었다. 그는 생애 대부분을 서울에서 살았지만 그 일상이 촌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72년 타계할 때까지 30년 넘게 같은 집, 서울 누하동 178번지에서 살았다. 새벽에 일어나 마당을 쓸고 화초를 가꾸고 오리와 꿩을 기르고 주변을 산책하고 내내 그림을 그렸다. 많이 그렸다. 평생 그가 그린 작품은 5000점에 이른다. 작품의 크기는 다양했지만, 모든 작품의 완성도가 고르게 높았다. 이상범의 누하동 집과 화실은 그의 유언에 따라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현재는 자료 전시도 열린다. 이상범이 진정 후대에 남기고 싶었던 건 부지런히 반복했던 소박하고 평범한 일상의 모습, 그 자체였는지 모른다.
◇청전의 여름 그림
유명한 컬렉터였던 유복열의 조카, 유재흥 장군도 그림을 좋아했다. 그는 6·25전쟁에 참전했고, 전투 실패도 여러 번 경험한 장군이었다. 국방부 장관도 지냈다. 영욕의 인생을 마감하는 시점에, 그가 현대화랑 박명자 회장에게 말했다. “죽을 날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내가 뭐가 보고 싶은가 생각해 봤더니 청전의 그림이었다.” 박 회장은 당장 청전의 시원한 여름 그림 한 폭을 구해줬다고 한다.
전쟁 세대에는 평화로운 일상이야말로 진정한 이상향이었다. 그러나 평화가 일상인 현 세대는 전쟁 이야기가 난무한 영화나 게임에서 판타지의 희열을 찾는다. 오늘날 청전의 그림이 큰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참고문헌>
1. 김인혜, "여름에 그린 가을 풍경...난세에 배 띄운 어부는 어찌 이리 평화롭나", 조선일보, 2024.7.20일자. B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