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인 길영희 선생의 생애와 업적
1900년 고종 37년 11월 30일 평안북도 희천출생. 평양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학년 때 3·1운동에 학생대표의 1인으로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다. 경성 의학전문학교에서 퇴학당한 뒤,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평양고보 시절 만난 함석헌과 사귀었고, 안창호를 만나 민족의 앞날을 논의하였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廣島高等師範學校)에서 역사를 전공하였고, 1929년 졸업과 함께 귀국, 운동 전력 때문에 공립학교 임용을 거절당하고, 배재고등보통학교와 경신학교에서 10년간 봉직했으나, 1939년 일제의 압박으로 교단을 물러나 농과대학 설립의 꿈을 안고 장기려(張起呂)·박원선(朴元善) 등 동지들과 더불어 인천에서 후생농장을 경영하였다.
광복 후 인천중학교 학부형과 학생 대표들의 요청으로 인천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일본인 중학이었던 인천중학교를 민족교육의 도장으로 바꾸는 한편, 1954년 제물포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을 겸임하였다.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이라는 신념 아래 무감독시험, 개가식 도서관 등 독특한 제도를 운영하였고 나라의 선비(國士)를 기르는 자신의 교육철학을 실천하였다.
5·16으로 1962년 인천중 학교·제물포고등학교 교장에서 물러난 뒤, 인천 신흥동 소재 "대성학원(고교 입시 재수생들을 위한)"을 운영하였다. 1969년 충청남도 덕산(德山) 가루실에 가루실농민학원 을 설립, 낙향하여 젊은시절부터 오랜 꿈이었던 농민교육에 헌신하였다. 그의 교육철학은 한국교육이 정치가들의 권력에 의해서가 아닌 교육자들 자치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될 때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강직하게 살았다.
안창호와 함께 민족 계몽운동에 앞장서 ‘유한흥국(流汗興國 땀을 흘려 일하여 나라를 일으키자)’을 교육의 지표로 세웠다. 교장 재직 시에 학생들에게 유한흥국의 노작교육을 강조하여 교사와 도서관 신축시 학생들과 함께 등짐으로 벽돌을 나르며 몸소 그 정신을 실천하였다.
길영희의 인재육성을 향한 일념은 1961년 서울대 전체 수석 및 3개 단과대학에 수석 입학생을 배출함으로써 제물포고등학교를 전국 유수의 명문학교로 키워 내었다. 인재 양성을 위해 길영희는 '민족의 얼'을 천명하였는데 이를 형성하는 3가지 기본정신으로 애국심, 정직성, 근면성을 강조하였다.
2. 최원식, "길영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4.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