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현지 시각)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대선 유세 도중 총격을 받아 오른쪽 귀를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어요. 언론들은 끔찍한 정치 테러가 벌어졌다며 이번 총격 사건을 자세히 다루었는데요. 트럼프 지지자들이 이번 일을 계기로 더욱 결집할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도 나와요. 만약 암살이 성공했다면 미국 역사의 흐름도 바뀌었을 거예요. 실제로 역사를 살펴보면 유명인의 암살로 역사가 크게 바뀐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 13일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총격 사고 이후 무대에서 퇴장하면서 청중을 향해 주먹을 쥐어 보였어요. /AP 연합뉴스© 제공: 조선일보

사라예보의 총성

가장 유명한 암살은 아마도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 사건이 아닐까 싶습니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그의 아내가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열혈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된 사건이죠.

세르비아는 1878년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한 나라예요. 하지만 그들은 완전한 ‘민족국가’가 되지는 못했어요. 많은 세르비아인이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에 속한 보스니아에 살았거든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보스니아와의 통합을 세르비아 민족국가의 완성으로 생각했어요. 따라서 이를 가로막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분노가 강했지요. ‘젊은 보스니아’ ‘검은 손’과 같은 비밀단체를 만들어 오스트리아에 맞서는 과격한 젊은이들도 있었어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된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난 현장 모습. /위키피디아© 제공: 조선일보

황태자 부부를 향해 총을 쏜 이는 ‘검은 손’ 소속의 19세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였어요. 총에 맞은 황태자 부부는 결국 사망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정부에 책임을 추궁하며 최후통첩을 보냅니다. 세르비아 내 반오스트리아 단체를 해산하고, 암살과 관련된 자들을 처벌하라는 내용이었죠. 하지만 이에 대한 세르비아의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자, 결국 선전포고를 합니다.

그러자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돕겠다며 군대 총동원령을 내립니다. 이를 보고 있던 오스트리아의 동맹국 독일도 러시아에 총동원령 해제를 요구하며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게 됩니다. 이후 동맹 관계로 얽혀 있던 각국이 이런 식으로 선전포고를 하며 유럽 전체가 전쟁에 휩싸이게 됐어요. 황태자 부부를 향해 쏜 총탄이 제1차 세계대전의 신호탄이 된 거예요.

고대 로마 정치가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로 한 나라의 정치체제가 바뀐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고대 로마의 정치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죽음이에요.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손잡고 삼두(三頭)정치로 국가를 통치했어요. 또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역 총독으로 부임해 약 8년 동안 일대를 정복하며 대중의 인기를 얻게 됐지요.

카이사르가 암살당하는 순간을 묘사한 그림. /위키피디아© 제공: 조선일보

카이사르의 높은 인기를 경계한 원로원은 삼두정치에 금이 간 사실을 알고 폼페이우스와 결탁해 카이사르를 몰아내려 했어요. 하지만 카이사르는 무너지지 않았고 로마로 돌아와 최고 권력자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더하여 그는 평생을 임기로 하는 종신 독재관이 되었지요.

카이사르의 생일은 국경일이 되었고 신전들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어요. 로마 공화정을 지지하는 세력은 왕이나 다름없었던 카이사르의 존재에 불안함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원로원 의원들과 카이사르를 질투하고 미워하던 사람들은 그를 죽이기로 결심합니다. 그렇게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는 칼에 찔려 숨졌습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 로마 공화정의 부활로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원로원 의원들은 카이사르파의 복수가 두려워 뿔뿔이 흩어졌고, 로마 시민에게 유산을 나눠준다는 카이사르의 유언장이 공개되자 대중은 카이사르를 죽인 이들에게 분노했어요.

그런데 카이사르의 유언장에는 자기 누이의 손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를 양자로 지정해 유산을 물려준다는 내용도 담겨 있었어요. 어리고 존재감이 크지 않았던 옥타비아누스는 이후 주목을 받았고, 실력을 길러 반대파를 제거하고 고대 로마 초대 황제가 됩니다.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도 받았죠. 카이사르의 죽음이 로마 제국의 탄생에 영향을 미친 것이에요.

청나라 황제 광서제

암살이 한 왕조의 운명에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바로 청나라 이야기예요. 19세기 내우외환의 위기에 처한 청나라는 개혁을 실시했어요. 서양의 과학기술, 특히 군사기술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꾀한 양무운동이 그 시작이었죠. 하지만 청일전쟁(1894~1895)에서 패하며 양무운동은 한계를 드러내게 돼요.

청나라 황제 광서제. /위키피디아© 제공: 조선일보

이후 청에선 낡은 제도를 벗어던지고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받아 모든 분야에서 근대 개혁을 추진하자는 ‘변법자강’ 운동이 힘을 얻게 됩니다. 이 중심에는 캉유웨이와 량치차오가 있었어요. 당시 캉유웨이는 황제였던 광서제에게 제도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상서를 보냈는데, 이는 광서제의 마음을 흔들었어요. 당시 실권은 광서제의 큰어머니였던 서태후에게 있었어요. 서태후는 막대한 권력을 휘두르며 사사건건 정무에 간섭했죠.

광서제는 이번이 서태후와 그의 세력에서 벗어날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변법자강 운동을 실시하면서 서태후를 따르는 신하들을 파직하고 그 자리에 개혁파 관리들을 앉힙니다. 이렇게 광서제가 서태후를 배제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서태후와 그 세력들은 불안감을 느꼈고, 광서제와 변법자강 운동을 이끄는 관리들을 감시했어요. 그리고 마침내 이들은 정변을 일으켰고, 광서제를 궁중에 감금했습니다.

   감금된 채 허수아비 황제로 지내던 광서제는 1908년 37세 나이에 요절합니다. 지병으로 사망했다는 이야기, 독살됐다는 이야기 등 무수한 설이 나돌았죠. 특히 바로 다음 날 서태후도 사망하면서 의혹은 더욱 커져가기만 했어요.

   그런데 지난 2008년 그가 독살당해 숨졌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됐다는 보도가 나왔어요. 광서제의 유골과 모발로 독극물 화학 실험을 했더니 치명적 분량의 비소가 검출됐다는 거예요. 물론 그를 죽인 자가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아요. 하지만 광서제와 서태후가 연이어 사망하고, 청나라는 이후 1911년 일어난 신해혁명으로 무너져요. 광서제가 서태후보다 더 오래 살았다면 청나라의 운명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문헌>

  1. 서민영, "공화정 지키려 카이사르 암살, 경과는 제국의 탄생", 조선일보, 2024.7.24일자. A2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