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키면서 근대지향적인 나라로 탈바꿈했다. 애국심에 불타는 지식인들과 하급 무사들은 부국강병을 주장하며 홋카이도, 유구, 타이완과 조선 등을 점령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했고,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등은 ‘정한론’을 주장했다. 군사력을 증강했고, 특히 서양의 해군력을 목도한 병부성은 20년에 걸쳐 군함 200척 및 운송선 20척을 건조하자는 계획을 건의했고, 이를 계기로 장갑함을 비롯한 수입품으로 무장한 근대 해군이 탄생했다. 그리고 1871년에서 1873년 사이에는 영국·미국·프랑스 등에 국비유학생을 대거 파견했는데, 그 비용이 1872~1873년 교육예산의 약 10%였다.

   그럼 그때 중국은 어떠한 상황에 처했을까? 청나라는 영국과 불평등 조약인 남경조약을 맺었고, 1844년에는 미국·프랑스와도 동일한 내용으로 조약을 맺었다. 러시아와는 1858년에 아이훈 조약, 1860년에 베이징 조약을 맺어 흑룡강 이북과 연해주땅 100만㎢를 빼앗겼다. 일본과는 1871년 과거와는 다른 상호평등의 관계로 전환되는 ‘청일수호조규’를 맺었다. 

   그런데 이 시대부터 동아시아의 질서에 직접 영향을 끼쳤고, 지금까지도 우리 운명에 큰 영향을 끼친 나라는 러시아였다. 그러자 위협을 감지한 영국·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과 태평양 세력으로 부상한 미국은 대항마로서 일본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이미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의 구도를 파악하고 영국·국 등의 서구 열강을 이용했다. 

   동아시아 세계에, 그리고 우리 운명에 영향을 끼치게 된 미국은 어떤 나라였을까? 미국은 1853년 ‘포함외교(Gun boat Diplomacy)’를 강행해서 1854년 미일 화친조약을 체결했다. 1865년에는 남북전쟁을 종결시켰고, 1869년에는 대륙횡단철도를 완성시켜 대서양과 태평양을 아우르는 ‘양양(兩洋)국가’로 변신했다. 이때부터 조선을 비롯해 아시아 나라들의 운명은 미국의 영향을 받게 됐다.(윤명철, 「동아시아의 해양영토분쟁과 역사갈등 연구」)

   그렇다면 이렇게 긴박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떤 생각들을 하고, 어떻게 대응했을까?

   실권자였던 대원군은 외국 선박과의 교섭 금지령을 내렸고, 프랑스 신부들과 신도들을 대량으로 죽였다. 그러자 주청 프랑스 공사관은 조선을 개항시키는 빌미로 활용하려고 함대를 파견했다. 이렇게 해서 1866년 9월 병인양요가 발생했다. 2척의 군함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양화진(양화대교)까지 접근했다. 산동으로 회항한 함대는 다시 군함 4척으로 강화도에 진입해 갑곶진을 점령하고, 문수산성 전투에서 조선군과 싸우다가 퇴각했다. 이때 엄청난 규모의 은괴와 외규장각 도서를 비롯한 숱한 문화재들을 약탈했다. 

   그런데 바로 얼마 전인 음력 7월에는 ‘제너럴 셔먼호’라는 미국 상선이 대동강을 타고 올라와 평양에 정박했다가 정부와 백성들의 공격으로 배가 전소됐고 선원들은 몰살당했다. 미국은 5년이 지난 1871년 이 사건을 빌미로 군함 5척으로 강화도를 공격했다. 초지진을 점령했고, 다음 날에는 덕진진과 광성보를 공격했다. 신미양요가 일어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어재연 장군을 비롯해 최소한 253명의 군인들과 다수의 백성들이 전사했고, 반면에 미국은 단 3명만이 전사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대원군은 2번의 ‘양요’에서 승리했다고 자처하면서 쇄국정책이 옳았다며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다. 일본의 공격을 예방하는 교훈조차 못 얻었다. 그리고 불과 4년 후에 일본은 조선을 공격해서 항복을 받아냈다. 

   일본은 1874년에는 타이완을 침공했으며, 1875년에는 유구국을 점령하고 4년 후에는 오키나와현(沖繩縣)으로 만들었다. 다음 단계는 조선이었고, 열강들은 일본의 다음 수순을 예측했다. 하지만 물러난 대원군도, 고종과 민비의 친정체제도 위기를 감지하지 못했고 무능력했다. 일본은 드디어 예고 없이 부산항에 입항했고, 운요호를 비롯한 함대 3척이 강화 해안에 상륙해서 조선군을 패배시켰다. 이어 ‘조선병탄론’ 등 시나리오대로 움직여 열강들에게 외교전을 펼쳤고, 군함 3척과 수송선 3척에 전권대표와 해병대 등 800여 명을 태우고 강화도 연안에서 무력시위를 벌였다. 결국 조선의 신정권은 최초의 근대 조약이면서 불평등 조약인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조선은 청나라에서 벗어난 자주국으로 변신했지만 일본에게 종속되기 편하게 변형됐다. 신정부는 자국책을 강구해 서양 세력들과 근대 조약을 맺으면서 개항과 또 다른 개혁을 선택했지만 결과는 대실패였다.

   일본과 조선은 불과 13년의 차이를 두고 서양 세력과 만났다. 그런데 일본은 성공했을 뿐 아니라 조선을 멸망시켰다. 조선은 게을러서 국력을 강화시키지 않았고, 중국에 의존하느라 자주의식도 없었다.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와서 국제질서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 한국은 어떠한가? 피난의 땅, 강화도를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은 이러한 역사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참고문헌>
   1. 윤명철, "국난의 시기에 강화도 유감", 기호일보, 2021.11.30일자. 1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