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신미양요 150주년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1.06.13 04:27

                                                                                  신미양요 150주년

②1871년 6월 존 로저스 사령관이 이끄는 미국 아시아함대는 군함 5척을 이끌고 인천 강화도 해협을 침략했어요. 사진은 알래스카함이에요. ③신미양요 당시 미국 콜로라도함에 잡혀간 조선인 포로들이에요. 갓을 쓴 사람은 포로를 만나러 온 관리로 추정됩니다. 조선군 중엔 따듯한 날씨에도 두꺼운 무명옷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것은 무명옷 수십장을 겹쳐서 만든 일종의 방탄조끼 ‘면갑’이었대요. /위키피디아·국사편찬위원회
 ②1871년 6월 존 로저스 사령관이 이끄는 미국 아시아함대는 군함 5척을 이끌고 인천 강화도 해협을 침략했어요. 사진은 알래스카함이에요. ③신미양요 당시 미국 콜로라도함에 잡혀간 조선인 포로들이에요. 갓을 쓴 사람은 포로를 만나러 온 관리로 추정됩니다. 조선군 중엔 따듯한 날씨에도 두꺼운 무명옷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것은 무명옷 수십장을 겹쳐서 만든 일종의 방탄조끼 ‘면갑’이었대요. /위키피디아·국사편찬위원회

   오늘(10일)은 신미양요에서 본격적인 충돌이 시작됐던 초지진 전투가 일어난 지 15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신미양요의 '신미(辛未)'는 60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신미년으로, 여기서는 1871년(고종 8년)을 말하는 거예요. '양요(洋擾)'는 서양(西洋) 세력이 일으킨 소란(소요·騷擾)이란 뜻이죠. 1866년의 병인양요는 프랑스가, 1871년의 신미양요는 미국이 조선을 침입해 일어난 사건입니다. '양요'라는 이름에서 보듯, 당시 조선에서는 프랑스와 미국을 그다지 구별하지 않고 '서양'으로 봤다는 사실과, 이 사건을 본격적인 국가 간 전쟁이 아니라 작은 충돌 정도로 인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미국이 군함 보내 조선 개항시키려 했어요

   "조선군은 수적 열세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용감하게 최후까지 싸웠다. 창검이 부러지면 돌이나 흙을 던지고 싸웠으며 중상을 당했어도 항복하지 않고…" "가족과 국가를 위해 이보다 장렬하게 싸운 국민을 다시 찾아볼 수 없다."

   신미양요 중 가장 큰 전투였던 1871년 6월 11일(이하 양력) 광성보 전투에 관한 미군 측의 기록이에요. 전투에서 승리한 미군은 기뻐하기보다는 조선군이 처절하게 항전하는 모습을 보고 기가 질린 분위기였습니다.

   미군이 한양 도성 근처인 강화도까지 와서 전투를 벌이게 된 계기는 그보다 5년 전인 1866년으로 올라갑니다. 미국 민간 상선(사람이나 짐을 나르는 데 쓰는 배)인 제너럴셔먼호가 통상(나라 사이에 물품을 사고팖)을 요구하며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다가 평양에서 불탄 사건이 일어났어요.

   이후 미국 정부는 두 차례 배를 보내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탐문했고,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동시에 '군함을 보내 조선을 개항(외국과 통상할 수 있게 항구를 개방함)시킨다'는 정책을 수립했습니다. 이미 미국은 1853년 매슈 페리가 이끄는 미국 군함을 일본에 보내 이듬해 개항을 이끌어 낸 경험이 있었어요. 조선의 수도인 한양 도성 근처에 군함을 보내 겁을 주면 조선도 순순히 개항할 것이란 계산이었죠. 영토를 빼앗거나 식민지로 만들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명백한 침략이었습니다.

                                                         전투에서 조선이 졌지만 미군이 물러나

    1871년 5월, 미국 아시아함대 사령관 존 로저스가 이끄는 군함 5척은 1230명의 병력과 대포 85문을 싣고 조선 침략에 나섰어요. 6월 2일 조선 측의 허가를 받지 않은 미군 배가 강화해협에 들어서자 조선군이 공격하는 '손돌목 포격사건'이 일어났죠.

    이 사건을 빌미로 미군은 6월 10일 전투를 시작해 인천 강화도 쪽 진지인 초지진을 점령했고, 다음 날 덕진진을 점령한 데 이어 강화도 요새지의 총사령부라고 할 수 있는 광성보를 공격했습니다. 처절한 전투 끝에 어재연(1823~1871) 장군을 비롯한 조선군 350명이 전사했습니다(미국 측 기록). 미군 전사자는 3명에 그쳤죠. 최신 무기로 무장한 데다 남북전쟁(1861~1865)으로 실전 경험까지 갖춘 미군의 월등한 전투력 앞에서 조선군은 일방적으로 패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의 반응은 미국 측의 예상을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광성보 전투 뒤에도 조선은 초지진을 야간 기습하는 등 항전을 멈추지 않았고 포로 협상에도 응하지 않았어요. 전함 5척으로 더 이상 전투를 벌이기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미군은 성과 없이 7월 3일 조선에서 철수했습니다. 조선을 강제 개항시키려는 미국의 계획은 완전히 어긋났던 것이죠. 뉴욕 데일리 트리뷴 등 미국 언론은 "미국의 국제적 체면을 손상시킨 실패한 전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나라 문은 더 꼭 닫아걸게 됐죠

    당시 조선의 실질적 집권자는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었어요. 그는 두 차례 '양요'를 겪은 뒤 쇄국(나라 문을 닫아 걸음) 정책을 강화했고, 전국에 '양이(서양을 낮춰 부른 말)와 화친하자는 것은 매국 행위'라는 내용의 척화비를 세웠습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게 있습니다. 프랑스와 미국이 대포를 앞세우고 와서 "나라 문을 열라"고 요구한 것은 우리 입장에선 명백한 침략이었고, 일단 싸워서 이들을 물리친 것은 정당한 행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강제 개항 위기를 두 번이나 극복한 이상, 개항 자체는 거스를 수 없는 세계적 흐름임을 깨닫고 자발적으로 서양 열강과의 협상에 나섰더라면 훨씬 유리한 위치에 올라설 수 있지 않았을까요?

    결국 조선은 신미양요 5년 뒤인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고 강제 개항을 하게 됩니다. 국제 정세가 하루가 다르게 급속히 바뀌던 19세기 후반에 5년은 무척 긴 시간이었죠. 미국과는 1882년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됩니다. 적이었던 두 나라가 11년 만에 친구가 된 셈입니다.

                                                                  [136년 만에 돌아온 수자기(帥字旗)]

    조선시대 전쟁이 일어났을 때 장군이 있는 곳에 걸어 놓는 커다란 깃발이 있었어요. '지휘관'을 뜻하는 수(帥)라는 글자를 큼지막하게 쓴 '수자기(帥字旗)' 입니다. 1871년 6월 광성보 전투에서 승리한 미군은 어재연 장군의 장군기였던 수자기를 전리품으로 빼앗아 가져갔습니다. 가로와 세로 모두 4.5m 크기인 이 깃발을 당시 미군이 콜로라도함 함상에 걸어놓고 촬영한 <사진1>이 남아 있어요.

     그 뒤로 수자기는 미국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었죠. 우리 정부는 이 깃발의 반환을 추진했지만, 박물관 측은 "미국 법에 승전 기념으로 가져간 전리품은 반환할 수 없게 돼 있다"며 난색을 표했습니다. 결국 이 깃발은 2007년 '장기 임대' 형식으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수자기는 현재 강화역사박물관에 있지만 소유권은 여전히 미국이 갖고 있습니다.

                                                                                  <참고문헌>

    1. 유석재, "개항하라며 강화도 온 美전함… 끝까지 항전해 철수시켰죠", 조선일보, 2021.6.10일자. A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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