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이 최근 '백제실'을 개편해 무덤이나 절터에서 발굴한 새로운 자료들을 선보이고 있어요.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부여 왕흥사지에서 발굴된 두 점의 '치미'예요. 치미는 기와지붕의 용마루 양쪽 끝에 올려놓은 장식용 기와로, 새의 꼬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에요. 높이가 123㎝나 되는 왕흥사지 치미는 국내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해요. 치미가 발견된 부여 왕흥사지는 일본 최초의 사원 '아스카데라(飛鳥寺)'의 모델로 일본에서도 유명합니다. 두 나라의 절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일본 최초의 기와집 '아스카데라'
일본은 538년에 백제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어요. 처음엔 불상이나 경전·승려만 받아들였을 뿐 목탑이나 불전 같은 대형 건물은 세우지 않았어요. 그래서 귀족들이 저택 일부에 불상을 모시는 정도였죠. 대형 건물이 배치된 본격적인 사원은 백제 기술자들이 일본에 파견되어 만든 '아스카데라'가 최초였어요.
일본 아스카 문화의 원류
일본에 백제의 불교가 전래된 것은 사상과 교리뿐 아니라 선진 문물의 획기적 수용을 의미하기도 해요.
사원 건축은 건축·토목·회화·금속공예·기와 제작 등 다양한 선진 기술을 아우르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일본 역사에서 한반도에서 전래된 불교 문화가 눈부시게 발전한 7세기를 '아스카(飛鳥) 시대'라고 하는데, 그 시작이 바로 아스카데라의 건립이었어요.
기술을 전해준 백제의 불교 문화를 연구해 아스카 문화의 원류를 찾는 것이 일본 고대사를 해명하는 길이라고 보고 일제강점기부터 많은 노력을 기울였어요. 그래서 일본은 1935년 부여에서 군수리사지를 시작으로 많은 절터를 발굴했어요. 당시 군수리사지 발굴에선 건물의 배치나 출토된 불상 형태가 일본 아스카 시대의 것들과 매우 비슷하다는 것이 밝혀져 두 나라 사원의 유사성이 증명됐어요. 하지만 부여의 절 중에서 어느 것이 아스카데라와 똑같은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어요. 왕흥사지에서 발굴된 사리용기의 비밀
2007년 가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낙화암 건너편 산자락에 자리한 부여 왕흥사 목탑지에서 사리용기 한 세트를 발굴했어요. 백제 시대 사리용기가 완전하게 발굴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이후 국보로 지정됐어요.
금·은·동 한 세트로 된 사리용기는 청동 사리합에 은제 사리호를 넣고 다시 그 안에 금제 사리병을 담았어요. 모두 둥근 몸체에 뚜껑이 있고 뚜껑에는 꼭지가 달렸어요. 청동 사리용기 몸통에는 '정유년 2월 15일, 백제 창왕(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세우고, 사리 2매를 묻을 때 신의 조화로 3매가 되었다'는 글이 새겨져 있어요. 창왕은 백제 위덕왕의 생전 이름이고 정유년은 위덕왕 24년(577년)에 해당해요. 이 기록으로 우리는 왕흥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와 건립 배경을 알 수 있게 됐어요.
중국에선 부처님의 사리가 저절로 늘어나는 영험함을 갖고 있다고 믿었는데, 백제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사리 2개가 3개로 변했다고 적어둔 것이죠. 하지만 2007년 사리용기를 발굴했을 때 안에 사리는 없었고 물만 가득 차 있었다고 해요.
위덕왕이 만든 왕흥사와 아스카데라
부여 왕흥사가 577년에 건립된 것이 밝혀지자 그보다 11년 뒤에 건립된 아스카데라의 원류(源流)가 왕흥사라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실제 두 사원은 비슷한 점이 많아요.
우선 사리를 안치한 방식이 비슷해요. 두 사원 모두 목탑지 기단 중앙 지하에 사리공(사리를 넣기 위해 돌에 뚫은 구멍)이 있는 커다란 돌을 놓고 그 위에 돌 덮개를 덮었어요. 이런 사리 안치 방식은 중국에서는 보이지 않아 백제에서 창안한 것으로 여겨지고, 그것이 일본에 전해진 것으로 보여요. 또 두 사리용기 주변에서 모두 같은 시기 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한 금·은·옥·유리로 만든 다양한 장신구가 발견됐어요. 이것은 탑이 본래 부처님의 무덤을 상징하기 때문에 사리를 봉안할 때 고분의 부장품과 비슷한 장신구들을 넣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요.
사원의 기와지붕을 장식한 수막새의 문양과 기술도 닮았어요. 아스카데라의 기와는 두 종류의 가마에서 생산된 것으로 드러났는데, 부여 왕흥사에서도 그와 유사한 문양의 두 종류 기와가 발견됐죠. 577년에 왕흥사를 창건한 위덕왕이 588년 일본에 기술자를 파견했으니 왕흥사의 수막새나 치미를 만든 와박사가 10여 년 뒤 일본에 건너갔을 가능성은 충분해요.
백제가 사원 건축 기술을 전해준 까닭은
그렇다면 백제는 왜 이런 사원 축조 기술을 일본에 전해줬을까요? 백제가 문화적으로 우월해서 일본에 은혜를 베풀었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건 적절하지 않아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국제관계에서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백제도 뭔가 얻고 싶은 게 있었을 거예요. 위덕왕은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아버지 성왕이 전사하는 등 국가적 위기를 맞았는데, 신라나 고구려와 경쟁하는 상황에서 일본의 지원과 협력이 필요했어요. 위덕왕은 불교라는 사상 체계와 사원 축조 기술을 전해줌으로써 일본의 협조를 얻으려고 했던 거지요.
불교 확산에 노력한 백제 위덕왕]
위덕왕(威德王)은 백제 성왕의 아들로 554년부터 598년까지 45년간 백제를 다스렸어요. 554년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한 전투에서 아버지 성왕과 군사 3만명이 전사하는 참화를 딛고 왕위에 올랐어요. 처음엔 죄책감으로 왕위를 포기하고 승려가 되겠다고 했지만 귀족들의 만류로 어쩔 수 없이 왕위에 올랐어요.
567년 백제 금동대향로가 발견된 능산리에 사원을 건립하는 등 불교를 확산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고, 국제관계 개선 등으로 국가 위기를 극복하고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했어요. '위덕'이라는 시호(諡號)는 불교를 널리 퍼트린 그의 업적과 성품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해요.
<참고문헌>
1. 이병호, "일본 최초 사원에서 백제의 기술이 보이는 이유", 조선일보, 2021.12.16일자. A33면.백제 기술… 일본 최초 사원에 전해졌대요| 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