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족 대동단 실체
1919년 3월일진회(一進會) 회원 전협(全協)과 최익환(崔益煥)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던 단체.
2. 개설
서울 봉익동(鳳翼洞) 62번지 전협의 집에서 결성되었다. 항일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한 대동단은 귀족, 관계(官界), 유림, 종교계, 상공인, 청년학생을 대상으로 단원을 모집하였다.
그리하여 김찬규(金燦奎), 박영효(朴泳孝), 김가진(金嘉鎭), 민영달(閔泳達) 등이 가담하였다. 같은 해 4월 중 김가진을 총재로 추대하고,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평안, 만주 안동현(安東縣)에 지부를 설치하고 단원 모집과 자금 모집에 힘썼다.
3. 기능과 역할
이 단체의 활동은 독립의식의 고양을 목적으로 한 선전활동과 삼일운동과 같은 방법으로 거행하려 한 ‘제2회 독립만세시위’를 통해 특징 지워진다. 최익환은 권태석(權泰錫)의 도움으로 자금을 지원 받아 인쇄시설을 설치하고 선전문(宣傳文) 등을 인쇄 배포하였다.
그 가운데는 ‘일본이 한국을 독립시키지 않으면 혈전(血戰)이라도 벌이자’는 포고문도 있었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23일 일제에 의해 발각되어 최익환, 권태석, 이능우(李能雨), 엄경섭(羅景燮), 김영철(金永喆) 등이 체포되었다.
이 단체의 활동 중 주목되는 것은 의친왕(義親王)이강(李堈)을 망명시켜 임시정부에 참여시키려던 계획이다. 전협, 정남용(鄭南用), 김가진 등이 의친왕을 상해로 탈출시켜 수령(首領)으로 추대하고 제2차 독립선언을 발표해 국내외의 여론을 고취시키고, 독립운동을 촉진시키려는 목표였다.
이를 위해 같은 해 10월 10일 총재인 김가진과 전협이 먼저 상해로 탈출해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 안창호에게 협조를 요청하였다. 같은 해 11월 9일 정남용, 이을규(李乙奎), 한기동(韓基東), 송세호(宋世浩) 등이 의친왕과 함께 수색역을 출발해 열차편으로 압록강을 통과해 11월 12일 만주 안동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의친왕의 탈출계획을 사전에 감지한 평안북도경찰부(平安北道警察部)에서 파견한 경부(警部) 미산(米山)에게 체포되어 임시정부 참여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의친왕은 서울로 호송되고 전협, 정남용, 이을규 등이 차례로 체포되었다.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진행된 재판에서 대동단 사건의 주모자인 전협과 최익환은 징역 8년과 6년, 정남용, 이재호, 권태석 등 관련자 20여 명도 최고 5년에서 최하 2년까지 언도받았다.
4. 대동단총재 김가진은 아직도 독립운동 서훈 못받아 안타깝다.
대동단 활동으로, 단일조직으로는 최다인 80여 명이 독립운동 서훈을 받았지만 정작 총재인 동농 김가진(1846~1922) 선생만 서거 100년이 되도록 서훈은 물론 유해조차 중국에서 귀국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대한제국 고종 황제를 마지막까지 대변한 외교관 동농 김가진의 60살 때 대례복 차림. 그는 1919
년 대신으로는 유일하게 망명해 상하이 임시정부 고문을 지내고 대동단을 창설했으나 지금껏 독립
운동가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석탑출판 제공
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 장명국 총쟁의 숙원 사업은 바로 ‘동농의 독립운동 인정’이었다. 대동단기념사업회는 1929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난 동농의 손자인 김자동 회장을 중심으로 2004년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임정기념사업회)에 앞서 2003년 창립했다. 이후 지금까지 25년간 7차례 동농의 독립운동가 서훈을 신청했지만 학계 일부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됐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강조한 문재인 정부들어, 독립운동 평가의 폭을 크게 넓히도록 심사기준을 완화했지만 국가보훈처에서는 같은 결정만 반복해왔다.
“우선 대한제국 대신 가운데 유일하게 망명해 임정 고문을 지낸 인물로만 알고 있던 동농 선생의 기록을 살펴봤어요. 그런데 서훈 반대의 근거로 거론된 행적들이 실제와 다르고 일부 오류도 있다는 사실을 승정원 일기 등 사료를 통해서 발견했어요. 그래서 확신감이 생겨 지난해 말 회장을 수락하고 본격적으로 출간작업에 나섰죠.”
그가 말한 확신은 ‘외교관 출신 대동단 총재 동농 김가진, 친고종 개화파 외교관에서 독립운동가로’라는 책의 부제에 압축되어 있다. “동농은 19세기 후반 대한제국 관리로는 드물게 중국어·일어·영어까지 능통해 고종이 순국할 때까지 가장 신임하고 의지했던 ‘대변인’이었어요. 그래서 1919년 고종이 승하한 이후에야 망명을 결행하고 독립운동에 나선 것이죠.”
책에서 그는 동농에 대한 서훈 반대 이유들을 차례차례 재검증하고 반박의 근거들을 실증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서훈 반대의 첫번째 이유인 ‘충남관찰사 시절 의병 탄압’부터 사실과 달랐어요. 김가진은 1907년 1월 홍주성 의병장 민종식을 평리원으로 압송했고, 그를 숨겨준 이남규와 성우영은 집으로 돌려보냈음을 상부에 보고했어요. 이어 4월 김가진은 중추원 찬의로 발령나고 5월에는 관찰사로서 겸직했던 충남재판관에서도 퇴임해 지방관직에서 완전히 벗어났어요. 민종식은 그뒤 7월 유배형을 받았고, 이남규 등은 다른 사건으로 다시 붙잡혀 9월 처형당했어요. 김가진이 떠난 뒤의 일이니, 날짜같은 기본 사실관계조차 검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거죠.”
두번째로 그는 ‘친일 행적’에 대해서 적극적인 반론을 펴고 있다. 가장 강력한 친일의 낙인인 ‘작위와 은사금 문제’부터 짚고 있다.
“1910년 한일병탄 조약을 강제로 맺은 일제는 대한제국 관료 76명에게 일방적으로 작위를 줬어요. 동농도 남작 작위를 받았는데 반납하지 않았다는 것이 친일의 근거로 발목을 잡고 있죠. 그런데 그가 고종 황제의 뜻을 따르고 개인적인 입지보다는 ‘국익’을 우선해야 하는 외교관으로서 곧바로 거부하기 어려웠다고 판단할 수도 있어요. 무엇보다 그는 은사금을 받은 기록이 없어요. 대신 그 집안의 청지기가 가산을 몰래 빼돌리는 바람에 망명 직전엔 단칸방에서 살아야 했을 정도였더군요.”
그는 책의 부록으로 동농 집안에서 청지기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 기록도 찾아서 첨부해놓았다. 또한 이른바 ‘친일시’ 지적에 대해서도, 그는 시를 실었다는 사실만으로 ‘친일’ 평가를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1908년 5월 이토 히로부미의 67살 생일에 유림 어용단체가 발행하는 잡지에 김가진의 시 ‘이토에게-시중춘색창환수’가 실려 있어요. 그런데 1889년 이토가 쓴 시에 대한 화답이었어요. 그래서 두 시를 비교해보니 ‘총칼 안 쓰고 대화한다더니 거짓이었구려’라며 대한제국을 강제로 침탈한 식민지 권력자 이토를 조롱하는 내용이었어요.”
마지막으로 그는 ‘복벽주의자’-‘사회주의자’라는 상반된 평가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는 점도 역사학계의 자료를 통해 지적한다. “대동단과 김가진이 의친왕 이강의 망명을 시도한 것이 복벽주의의 주근거인데, 3·1운동을 기점으로 민본주의에 눈을 떴을 뿐 아니라, 의친왕을 임시정부의 황제로 내세우려는 계획조차 없었어요. 1919년 9월 발표한 ‘대동단 2차 강령’에 처음으로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들어갔는데, 이는 왕정을 청산하는 ‘반(反)복벽’의 뚜렷한 선언으로 볼 수 있어요.”
장 대표는 “서거 100주기인 내년에는 상하이 홍교로 만국공묘에 홀로 묻혀 있는 유해나마 당당히 모셔와야 할 것”이라며, ‘독립운동가 동농 김가진’에 대한 재평가가 보훈당국은 물론 역사학계에서 전향적으로 이뤄지기를 기대했다.
5. 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
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 회장은 내일신문 발행인 겸 대표이사 장명국(74) 사장이다. 그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1970~80년대 <노동법 해설> 저술과 강의 등 노동운동가로 활약했던 그는 1993년 주간 <내일신문> 창간에 이어 2000년 일간지로 전환한 뒤 지금껏 무차입 흑자경영을 해와 ‘경영 귀재’로 불리운다.
그런데 비전공자가 쓴 이 역사서인 <대동단 총재 김가진>(석탑출판)이 출간 두 달만에 4쇄를 찍을 정도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더 뜻밖이다.
<참고문헌> 2. 김경애, "내년 100주기엔 독립운동가 김가진 당당히 모셔와야지요", 한겨레신문, 2021.12.17일자. 25면.
<대산 신상구 국학박사 주요 약력>
.1950년 6월 26일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부친 신종순(辛鍾淳), 모친 유옥임(兪玉任)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
.아호 대산(大山) 또는 청천(靑川), 본관 영산신씨(靈山辛氏) 덕재공파(德齋公派)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한국 인플레이션 연구(A study of korean inflation」(1980.2)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A study of shamanic culture in Taean)」(2011.8)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 종로구 재동지점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조치원중, 조치원여고, 삽교중, 한내여중, 천안북중, 천안여중, 태안중, 천안중 등 충남의 중등학교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2019.3.15),『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5권.
.주요 논문 :「태안지역 무속인들의 종이오리기 공예에 대한 일고찰」(2010),「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2012),「2020년 노벪문학상 수상자인 루이즈 글릭의 생애와 문학세계」(2020) 등 113편
.주요 발굴 : 민촌 이기영의 천안 중앙시장 3·3항일독립만세운동 기록(2006)
포암 이백하 선생이 기초한 아우내장터 독립선언서(2007)
.수상 실적 : 예산군수 감사장, 대천시장상(2회), 천안시장상(2회),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한국문화원연합회장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2회) 교육부장관상(푸른기장),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문학 21』시부문 신인작품상,『문학사랑』·『한비문학』 문학평론 부문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동아일보·중앙일보·조선일보·경향신문·한국일보·서울신문·서울일보·신아일보·문화일보·전국매일신문·시민신문·천지일보 등 중앙 일간지, 대전일보·충청일보·충청투데이·중도일보·동양일보·금강일보·중부매일·충남일보·중앙매일·충청타임즈·충청매일·대전투데이·충청신문·충북일보·우리일보·시대일보·중부일보·영남일보 등 지방 일간지, 충남시사신문·천안일보·충남신문·천안투데이·아산투데이·아산시사신문·예산신문·태안신문·태안미래신문·홍성신문·보령신문·내포시대·진천신문·증평신문·옥천신문 등 주간신문, 아산톱뉴스·천안일보·디티뉴스·대전뉴스·충청뉴스·충청뉴스인·시티저널·충북인뉴스·굿모닝충청·대전문화신문·예산뉴스 무한정보·백제뉴스·괴산타임즈·코리안스프릿 등 인터넷신문 등에 수백 편의 칼럼 기고.
.30년 간 우리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환경운동 전개, KBS 중앙방송국 라디오 <논술 광풍>프로 출연, STB 상생방송 <홍범도 장군> 프로 출연, KBS 대전방송국·MBC 대전방송국·CJB 청주방송국 라디오 <아우내장터 독립선언서 발굴> 프로 출연
.대전 <시도(詩圖)> 동인,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충남민주시민교육연구회 회원, 한국사회과교육연구회 회원, 한국국민윤리교육회 회원, 천안향토사 연구위원,『천안교육사 집필위원』,『태안군지』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동양일보 동양포럼 연구위원, 통합논술 전문가, 평화대사, (사)대한사랑 자문위원, 천손민족중앙회본부 연수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