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은폐해버린 기록들
경기도 팔달산 수원화성에 있는 화성장대. 장대는 군사작전을 지휘하는 사령부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함께 사도세자가 묻힌 현륭원(현 융릉)에 참배한 뒤 화성장대에서 야간 군사훈련을 지휘했다. 많은 의혹 속에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는 아들 정조에 의해 상당량의 사료가 왜곡되거나 삭제되고, ‘무사 기질과 현명함을 갖춘’ 군주로 변신했다. 현륭원 참배길에 정조는 ‘그 아버지를 기억하기 위해’ 어김없이 군복을 입고 말에 올랐다. /박종인
재위 15년째인 1791년 마침내 화성으로 이장한 사도세자에게 정조가 첫 참배를 떠났다. 무덤 이름은 현륭원이다. 사도세자에게는 일찌감치 장헌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출발 전 정조는 이렇게 하명했다. “옛날 온천에 행차할 때도 평융복(平戎服)을 입기도 하고 혹은 군복을 입기도 했다. 앞으로 현륭원에 행차할 때 복장도 이대로 해야겠다.”(1791년 1월 14일 ‘정조실록’) 평융복 또한 군복 일종이다. 1월 16일 한성을 출발한 참배 행렬은 진눈깨비 속에 수원부에 도착했다. 다음 날 정조는 현륭원에 올라 제사를 올린 뒤 18일 궁으로 돌아왔다. 뒤주에 갇혀 죽은 전주 이씨 왕실 비극의 주인공은 그렇게 공식적으로 복권됐다.
그리고 4년 뒤 어머니 혜경궁 홍씨 회갑을 맞아 정조가 화성으로 행차를 한다. 어머니가 탄 가마가 앞서고 군복을 입은 정조가 백마에 올라 뒤를 따랐다. 윤2월 꽃들이 만발한 봄날이었다.
참배를 마친 그날 밤 정조가 황금 갑옷으로 갈아입고 화성 산성에 올라 야간 군사훈련을 벌였다. 훗날 정조가 ‘화성장대’라 명명한 서쪽 지휘소, 장대(將臺)에서 포성이 울리자 화성 동서남북문에서 잇따라 청룡기와 주작기와 백호기와 현무기가 나부끼고 포를 응사했다. 발아래에는 야심작인 신도시 화성이 펼쳐져 있었다. 장관이었다. 만족한 정조가 시를 썼다. ‘한나라 고조 대풍가 한 가락을 연주하니 붉은 해가 비늘 갑옷에 있구나(大風歌一奏 紅日在鱗袍·대풍가일주 홍일재린포)’.(화성장대에 걸린 정조 어제시(부분))
위 글에 나오는 ‘장헌세자’와 ‘온천행차’와 ‘화성장대의 장엄함’에는 몇 가지 정조가 은폐해버린 진실이 숨어 있다. 그 진실 이야기.
[박종인의 땅의 歷史] 284. 사도세자 아들 정조가 은폐해버린 기록들
지워진 진실 1: 승정원일기
왜 영조가 친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였나.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여러 종류다. 당쟁의 희생물이라는 말도 있고 아들 사도세자가 비정상적인 광기를 보인 탓에 그리 됐다는 분석도 있고 반역을 기도하다가 실질적으로 처형됐다는 말도 있다. 탕평책을 쓸 정도로 당쟁은 극심했었다. 실제로 대리청정을 하는 세자에게 사사건건 노론이 시비를 건 흔적도 보인다. 세자가 광기 속에 여러 목숨을 앗았다는 기록도 있다. 그 기록들이 저마다 당파가 다른 입장에서 쓰인 기록들이라 명쾌한 파악이 쉽지 않다. 불리한 사실을 왜곡하거나 은폐한 흔적들도 숱하게 보인다.
그런데 실록에 기록돼 있는 ‘공개적인’ 왜곡 혹은 은폐 흔적이 있으니, 바로 사도세자 사망 직후 그 아들 이산(정조)에 의해 시도된 왜곡이다.
1776년 2월 4일 왕세손 이산이 관료들 앞에서 펑펑 울면서 이리 하소연했다. 처음으로 자기 아버지 사도세자 묘인 수은묘에 참배를 하고 온 날이었다. “승정원일기에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볼 수 없는 말이 많이 실려 있다. 이것을 버려두고 태연하게 여긴다면, 이것이 어찌 아들의 도리이겠는가?” 그리고 왕세손은 곧바로 할아버지 영조에게 상소를 한다. 내용은 이러했다. “실록 기록은 영원히 남아 있으니 승정원일기에서만는 (사도세자 부분을) 삭제해주소서.” 그날 영조는 뒤주에 갇혀 죽기까지 경위를 적은 승정원일기를 세초(洗草·물에 씻어 없애버림)하라고 지시했다. 이리 말했다. “천민도 다 보고 사람들 이목을 더럽히며 죽은 사도세자가 보면 눈물을 머금을 것이다.”(1776년 2월 4일 ‘영조실록’) 한 달 뒤 영조가 죽었다. 그 흉악한 날에 대한 기록은 승정원일기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사라진 진실 2: 실록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던 1762년 윤5월 13일 자 ‘영조실록’은 이렇게 끝난다. “이때에 밤이 이미 반이 지났었다. 임금이 전교를 내려 중외에 반시했는데, 전교는 사관(史官)이 꺼려하여 감히 쓰지 못하였다(傳敎史官諱而不敢書·전교사관휘이불감서).” 이날 밤 영조가 내린 전교는 세자를 서인으로 강등시키는 이유를 담은 ‘폐세자반교’다. 이리저리 얽혀 있는 사도세자 죽음의 원인을 가장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자료인데, 이 반교문이 ‘사관이 꺼려서’ 삭제된 것이다. 다른 문집에 기록된 반교문에는 ‘백여 명에 이르는 사람을 죽이고 불로 지졌고 주야로 음란한 짓을(...)’이라고 적혀 있다.(‘현고기 번역과 주해’, 김용흠 등 역주, 서울대출판문화원, 2015, p80)
사도세자가 영조에게 반역을 기도했다는 내용까지 적힌 이 반교문이 실록에서 사라져 있으니, 이는 “승정원일기를 삭제해도 실록에는 기록이 남는다”는 왕세손과 영조 논리에 맞지 않는다. 어찌 보면 이는 당연한 결과였다.
영조실록은 정조 때 편찬됐다. ‘영종대왕실록청의궤’에 따르면 정조는 편찬 작업 당시 이렇게 명했다. “1758~1762년 사이 각 부서 업무 기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사람들 눈을 어지럽힐 부분이 있으니 당분간 꺼내지 말라.” 그리고 이 기간 사료 분류 작업을 담당한 사람은 이휘지라는 인물 한 사람이었다.(정병설,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 동아문화 58, 서울대 동아문화연구소, 2020) 대개 집단적 취사 선택으로 이뤄지는 실록 편찬 작업이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던 시기만은 한 사람에 의해 단독으로 진행됐고, 그마저 어명에 의해 진행이 늦춰진 것이다. 이유는 ‘사람들 눈을 어지럽힐 부분이 많으니까.’ 이미 영조 또한 승정원일기 세초를 명하면서 “일기를 보더라도 다시 그 글을 들추는 자는 흉악한 무리로 엄히 징계한다”고 경고했었다.(1776년 2월 4일 ‘영조실록’) 그리하여 승정원일기에 이어 실록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라지고 말았다.
정조릉인 건릉 분묘에서 바라본 정자각. 생전에 사도세자를 항상 염두에 뒀던 정조는 사후에 아버지 옆에 묻혔다. /박종인
사라진 진실 3: 영조가 쓴 묘지명
즉위 열흘 뒤 정조는 영조로부터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받았던 자기 아버지에게 ‘장헌(莊獻)’이라는 존호를 추가했다. 사도는 무엇이고 장헌은 무엇인가. 사(思)는 ‘追悔前過(추회전과·지난 과오를 뉘우침)’이다. 도(悼)는 ‘年中早夭(연중조요·일찍 죽음)’다. ‘사도’는 ‘죄를 뉘우치고 일찍 죽었다’는 뜻이다. 아들 정조에게는 끔찍하기 짝이 없는 시호다. 정조는 즉위와 함께 아버지에게 무인(武人) 기질을 지닌 총명한 사람을 뜻하는 ‘장헌’으로 존호를 올렸다.
그리고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묘 수은묘를 영우원으로 격상한 뒤 이를 화성 현륭원으로 천장했다. 그때 천장 기록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배봉산 사도세자묘 관을 꺼내던 날, 묘 속에서 영조가 직접 쓴 묘지문이 발굴됐다. 묘지문은 무덤 주인의 행적을 기록해 함께 묻은 기록이다.(1789년 8월 12일 ‘일성록’: 정병설, ‘이장 과정을 통해 본 현륭원지의 성격’, 장서각 43, 한국학중앙연구원, 2020, 재인용) 그런데 영조 때 승정원일기에는 ‘영조가 묘지문을 구술했다’는 기록만 있고 내용은 삭제돼 있다. 이 또한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정조는 본인이 새로운 묘지명을 작성하면서 ‘한 글자를 쓰면 쓰는 대로 감추고 비문이 완성되자 곧바로 묘 속에 묻어버려 세상 사람들이 내용을 알지 못했다.’ 그 덮개에는 ‘장헌세자 현륭원지’라고 새겼는데, 현장에서 ‘사도’라는 글자가 빠졌다고 하자 그제야 추가하라고 명했다.(’현고기 번역과 주해’, p262)
정조 생전에는 아무도 몰랐던 이 묘지문 내용은 정조 사후 출간된 정조 문집 ‘홍재전서’에야 수록됐다. 정조의 명(혹은 묵인)에 의해 다시 배봉산 옛 무덤에 묻힌 영조 묘지문은 1968년 기적적으로 배봉산 땅속에서 발견됐다. 묘지문에는 ‘무도한 군주가 어찌 한둘이오만 세자 시절 이와 같다는 자의 얘기는 내 아직 듣지 못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서장대야조도(西將臺夜操圖) 부분. 정조가 현륭원 참배 후 화성 산성에서 야간 군사훈련을 지휘하는 장면이다. /화성박물관 복제본
황금갑옷과 군복과 온천
아버지와 갈등 끝에 말기에 광증과 기행을 보이다 죽은 세자는 그렇게 무사 기질을 가진 위풍당당한 비운의 군주로 둔갑했다. 1793년 정조는 ‘영조 선대왕 또한 세자 죽음을 후회했다’는 내용을 담은 ‘금등지서’를 공개하면서 자기 판단과 주장에 대한 반론을 결정적으로 봉쇄해버렸다.(2021년 12월 8일 <박종인의 땅의 역사> 참조)
그리고 그가 군복을 입고 자기 아버지를 찾아간 것이다. 왜 군복이었나.
1796년 정조가 다시 화성으로 행차를 한다. 참배 후 귀경길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는지, 이리 시를 읊는다. ‘오늘 또 화성에 와 보니/궂은 비는 침원에 부슬부슬 내리고/이 마음은 재전을 끝없이 배회하누나’ 그리고 그가 말을 이었다. “1760년 (내 아버지가) 온천에 행행하실 때 군복을 입으셨다. 기유년 이후 내가 참배할 때 군복을 입은 것은 제대로 그리지 못한 아버지 영정을 이어서 그리겠다는 뜻이다(必用軍服 蓋出於追述之意也 필용군복개출어추술지의야).”(1796년 1월 24일 ‘정조실록’)
기유년은 배봉산에 있는 사도세자묘 천장을 결정한 1789년이다. 1760년 온천 행행은 사도세자가 군사 호위 속에 온양온천으로 행차했던 사실을 가리킨다. 한해 전인 1795년부터 정조는 이 온천행차를 세세히 조사해 ‘온궁사실’이라는 책을 편찬하기도 했다.
정조는 이 온천 행차를 아버지 사도세자가 ‘수원부 산성에서 군사를 사열하고 연도에서는 민심을 청취한 뒤 행궁에서는 날마다 경연을 열었던’ 행차로 기억한다.(정조, ‘홍재전서’ 16권, ‘현륭원지’)
위풍당당하게 군사를 지휘하고 민심을 묻는 그 모습. 누구인가. 바로 정조다. 그 풍경이 무엇인가. 백마를 타고 군복을 입고 장엄한 행렬 속에 산성에 올라 수천 병졸을 지휘하고 연로에서 민심을 직접 듣는 화성행궁 행차 풍경이다. 사도, 아니 장헌세자가 아들 정조로 환생한 것이다. 사도세자 죽음의 진실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창조해낸 장헌세자가 스스로에게 환생했으니까.
<참고문헌>
1. 박종인, "내 아버지처럼 나도 군복을 입고 산성에 올랐느니라", 조선일보, 2021.12.15일자. A3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