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연합뉴스) 울산 출신 독립운동가 박상진(1884∼1921) 의사의 증손자 박중훈(57)씨가 박 의사 관련자료 수 점을 울산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다. 기증하기로 한 박 의사의 사진.
친일부호에 보낸 포고문에 '조국독립 열망' 가득독립군 자금조달, 친일파 처단…37세때 형장의 이슬로
(서울=연합뉴스) 이웅 기자 = "우리 4천년 종사는 흔적 없이 아주 없어졌다. 우리 2천만 민족은 노예로 변하여 섬 오랑캐의 악정 폭행은 날로 더해가고 날로 거듭해 간다. 이를 생각할 때는 피눈물이 샘솟아 조국을 회복시키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이것이 본회를 성립한 까닭이다. 각 동포는 각기 능력이 있는 바에 따라 이를 도와 훗날 본회의 의기(義旗)가 동지(東指)함을 기대하라…"
3.1운동이 있기 2년 전인 1917년 국내 최대 의열단체인 대한광복회가 군자금 모집을 위해 친일 부호들에게 보낸 포고문의 일부다.
당시 대한광복회 총사령으로 이 단체를 이끌었던 고헌(固軒) 박상진(1884~1921) 의사는 친일 부호와 악덕 관리 살해를 교사하고 내란을 주도한 혐의로 기소돼 대구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37세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대한광복회는 만주에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면서 일경(日警)에 밀고하거나 협조하지 않는 친일 부호를 처단하는 의열투쟁을 전개한 단체다.
친일 부호들에게 보낸 포고문은 조국의 독립에 대한 박 의사의 열망이 그대로 담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대법원 법원도서관이 발간한 '국역 고등법원판결록'에 실린 박 의사의 사형 당시의 재판 기록에는 나라를 잃은 비분강개와 독립에 대한 뜨거웠던 열망을 쏟아낸 일제치하 독립운동가들의 치열했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울산=연합뉴스) 울산 출신 독립운동가 박상진(1884∼1921) 의사의 증손자 박중훈(57)씨가 박 의사 관련자료 수 점을 울산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다. 사진은 박 의사가 법원에 낸 청구서.
28일 울산시에 따르면 박씨는 박 의사의 독립운동 활동상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 청구서 1점과 재판증인 청원서 1점, 사진 등 수 점을 내년 6월 개관할 울산박물관에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법치(法治)로 도탄에 빠진 백성을 돕고자 판사가 됐지만 나라를 잃자 주저없이 판사직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박 의사도 그들 중 한 명이다.
1884년 울산에서 태어나 유교 전통 속에서 자란 박 의사는 양정의숙(養正義塾) 에서 법률학을 공부한 뒤 판사 시험에 합격해 1910년 평양법원에 발령받았다.
하지만 경술국치를 지켜본 뒤 "일제의 식민지 관리가 되지 않겠다"며 스스로 법복을 벗어던졌다.
망국의 설움을 안고 중국 만주로 떠난 박 의사는 1912년 귀국해 대구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라는 곡물상회를 차리고서 이를 거점으로 비밀결사 활동을 벌였다.
그러다 계몽운동가, 의병출신 인사들을 규합해 1915년 대한광복회를 결성하고 초대 총사령에 추대됐으며, 이후 군자금 마련과 친일 부호 처단 등 본격적인 의열투쟁을 전개했다.
박 의사는 1917년 만주에서 무기를 들여오다 체포돼 옥고를 치렀으며, 1918년 악덕 지주ㆍ관리로 지탄받던 경북 칠곡의 부호와 충남 아산군 관리를 살해한 것을 계기로 조직이 발각되면서 체포돼 1921년 8월13일 대구형무소에서 사형당했다.
박 의사와 대한광복회는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통치가 자행되던 1910년대 억눌렸던 민족의 기개를 떨쳐 용기를 줬으며, 1920년대 활발한 의열투쟁의 도화선이 됐다.
정부는 박 의사의 공로를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고등법원판결록은 박 의사 외에도 함께 대한광복회 활동을 하다 체포돼 순국한 채기중 선생, 동경 조선유학생들이 결성한 조선청년독립단 사건, 3.1운동에 참가해 옥고를 치른 많은 지식인과 민초들의 울분과 기개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법원도서관은 1909년부터 1943년 사이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등에서 선고된 민ㆍ형사 판결을 수록한 이 판결집을 2004년부터 번역ㆍ출간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10권을 펴냈다.
<참고문헌> 1. 이응, "판사직 내던지고 독립투사 변신 박상진 의사", 연합뉴스, 2010.8.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