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10월 경복궁에서 최종 5명이 뽑혔는데, 태종이 관료들에게 이리 말했다. “하나같이 추색이니 이 뭐하자는 건가?”(같은 해 10월 11일 ‘태종실록’) 과연 이듬해 5월 또 사신으로 온 황엄이 황명을 전했다. 이번에도 구두(口頭)였다. “황명을 전한다. ‘지난해 너희가 바친 여자들은 살찐 것은 살찌고, 마른 것은 마르고, 작은 것은 작아서 모두 매우 좋지 못하였다. 너희 국왕 체면을 봐서 받긴 했으나, 다시 뽑아라’.”(1409년 5월 3일 ‘태종실록’)
중국에 바친 여자, 공녀(貢女) 이야기
‘(명나라로 가는 공녀(貢女) 선발을 피하기 위해) 딸자식 둔 어떤 자는 사윗감 서넛을 동시에 부른 뒤 맨 먼저 온 사내에게 시집보낸다. 강보에 싸인 어린 계집을 유모가 안고 시집을 보내기도 한다. 심지어 어느 집에서는 하루에 딸 서넛을 한꺼번에 시집보내기도 한다. 서울에 남은 총각과 처녀가 전혀 없었으니 천고(千古)에 들어보지 못하던 일이었다.’(1521년 1월 21일, 22일 ‘중종실록’)
그랬다. 잊을 만하면 어김없이 나타나 처녀들을 내놓으라고 닦달했던 중국 사신들과, 그들로 인해 공포 속에 던져졌던 조선 처녀들 이야기.
여자들의 삶-1: 수절(守節)
조선 과부가 정정당당하게 재혼할 수 있게 된 때는 자그마치 서기 1894년이었다. 동학농민전쟁 이후 성립한 갑오개혁정부가 이 너무나도 당연한 권리를 500년 만에 인정한 것이다. 그때까지 조선 여자에게는 ‘수절(守節)’이라는 규범이 강요됐고 그녀들은 강요된 규범임을 깨닫지 못한 채 당연한 일로 지켜왔다. 해도 너무했다.
고려는 달랐다. 예컨대 이런 일. ‘충렬왕(재위 1274~1308) 때 종3품 대부경 박유가 이리 주장했다. “고려가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데 처가 하나밖에 허용되지 않는다. 계급에 따라 첩을 여럿 둘 수 있게 하자.” 부녀자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두려워하며 박유를 원망하였다. 그 박유가 임금 행차를 따라가는데, 거리에서 한 노파가 손가락질했다. “저자가 바로 그 빌어먹을 늙은이다!” 사람들이 연이어 손가락질하니 거리에 붉은 손가락들이 줄줄이 엮어놓은 듯했다. 당시 재상들 가운데 공처가가 많아(有畏其室者·유외기실자) 결국 일부다처제는 시행되지 못했다.’(‘고려사’106 열전19 박유)
여자들의 삶-2: 고려 공녀
당당한 여자들이 고려에 살았고, 그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되었다. 여자들은 수절이 강요됐고 남자들은 어느덧 첩을 거느리며 살게 되었다. 두 왕조를 관통해 여자들을 벌벌 떨게 만들고 남자들을 애타게 만든 일이 있었으니, 공녀(貢女)다. 역대 왕조에서 중국으로 바친 여자다. 위 충렬왕 때인 1275년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가 이리 요구했다. “칭기즈칸이 세계를 정복할 때 그 나라 왕들이 앞다퉈 미녀를 바쳤다는 사실을 들은 적이 있겠지? 그저 알려주기 위한 것이지 그대에게 자녀를 바치라는 것은 아니다.”(‘고려사’28 세가 충렬왕 원년 10월)
바치라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고려에서는 처녀들을 원나라에 바치기 위해 국내 혼인을 금지시켰고 결국 공녀로 선택된 처녀 10명이 원나라로 갔다. ‘고려사’에 기록된 원나라 공녀는 모두 44차례에 170명이었다.(정구선, ‘공녀’, 국학자료원, 2002, p28) 고려 여자들이 퍼뜨린 풍속도 원나라에 역수입돼 ‘사방의 의복, 신발과 모자, 기물 모든 것을 고려를 모방해 온 세상이 미친 것 같았다(皆仿高麗 擧世若狂·개방고려 거세약광).’(필원, ‘속자치통감’ 214 원기(元紀) 32 1358년)
조선의 은폐된 조공품, 공녀
명나라 행정법전인 ‘대명회전’에 따르면 조선이 연례적으로 명나라에 바치는 공물(貢物)은 아래와 같다. 금은기명(金銀器皿), 나전소함(螺鈿梳函), 백면주(白綿紬), 색색 저포(苧布)와 용문염석(龍紋簾席), 색색 세화석(細花席), 초피, 수달피, 황모필(黃毛筆), 백면지(白綿紙), 인삼, 종마.(‘대명회전’ 권105)
그런데 이와는 별도로 조선에 요구해 가져갔던 공물이 두 가지 더 있었으니 여자, 공녀(貢女)다. 공녀는 효종 때까지 모두 146명이 명나라로 조공됐다.(정구선, 앞책, p51, 56) 명나라 공녀는 정치적인 목적보다는 황제 개인의 유희성이 짙었다. 원나라는 고려에 대대적, 공개적으로 공녀를 요구한 반면 명 황제는 관리를 보내 비밀리에 공녀를 요구하곤 했다. 하지만 사대 질서 속에 생존하던 조선 왕실은 그 무리한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임상훈, ‘명초 조선 공녀의 성격’, 동양사학연구 122, 동양사학회, 2013)
황제 특명을 받은 이 관리들은 출신이 조선이다. 정확하게는 조선이 바쳐야 했던 또 다른 공물, 고자들이다. 성종 때까지 성기능을 상실했거나 거세당한 조선 고자 198명이 명나라로 끌려갔다.(정구선, 앞책, p122) 여자보다 52명 더 끌려간 저 사내들 삶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자.
남자의, 남자를 위한, 여자
참 딱했다. 여자는 정식 공물 리스트에 들어 있지 않은, 은밀한 공물이었다. 공녀 선발 명 또한 물증이 남지 않는 구두로 통보됐다. 선발은 조선에 파견된 사신들이 결정했다.
건국하고 20년이 채 되지 않은 1408년 봄, 명나라 사신 황엄이 경복궁 근정전 서쪽 계단에 무릎을 꿇은 조선 국왕 태종에게 명황제 영락제 명을 전했다. 황엄은 조선 고자 출신이다. “황제께서 나에게 ‘조선국에 가서 국왕에게 말하여, 잘 생긴 여자 몇 명을 간택해 데리고 오라’고 명하였다.” 태종은 머리를 계단 바닥에 조아리며(叩頭·고두) 이리 답했다. “어찌 감히 마음을 다해 명령을 받들지 않겠습니까(敢不盡心承命·감부진심승명)?”(1408년 4월 16일 ‘태종실록’)
여자를 숨기는 남자
‘이날 평성군 조견의 딸은 중풍 걸린 듯 입이 삐뚤어졌고 이조참의 김천석 딸은 머리를 흔들었으며 전 군자감 이운로 딸은 다리가 병든 것처럼 절룩거렸다.’(1408년 7월 2일 ‘태종실록’)
딸 가진 부모들은 처절했다. 침이나 뜸을 떠서 병신 흉내를 내기도 하고(앞 실록 기사) 뽑힌 자 중에는 스스로 삭발하는 자도 있었다. 처녀를 숨긴 자를 색출하기 위해 온 마을 아전과 부녀자를 가두고 매질을 하는 일까지 생겼다.(1408년 7월 5일 ‘태종실록’) 명에서 청으로 대륙 주인이 바뀐 효종 때 또 공녀 선발이 진행되자 7~8세 되는 아이 부모는 아이들을 거의 모두 혼인시켰다.(1650년 9월 9일 ‘효종실록’) 그 같은 풍경을 보고받은 중종은 이리 탄식했다. “여자 뽑는 일이 어찌 원통한 일이 없겠는가? 혹시라도 구덩이에 몸을 던진다든가 목매 자살하는 폐가 있을까 염려스럽다.”(1521년 6월 2일 ‘중종실록’)
여자를 보내는 남자
1417년 태종 때 명나라에 공녀로 간 두 처녀 가운데 한씨는 지순창군사 한영정의 딸이었다. 한씨는 그 미색이 명나라 영락제 눈에 띄어 황제 후궁이 되었다.(1417년 5월 9일 ‘태종실록’) 사람들은 그녀를 여비 한씨(麗妃 韓氏)라 불렀다.
10년 뒤 1427년 세종 9년 여름, 한씨 막냇동생 또한 그 미색이 알려져 공녀로 뽑혔다. 마침 병에 걸려 오라버니 한확이 약을 지어주니 그녀가 이리 말했다. “누이 하나 팔아서 이미 부귀가 극진한데 뭘 위해 나에게 약을 주시오?” 그녀는 시집가려고 만들었던 이불채를 칼로 찢어버리고 재물을 주위에 나눠줘 버렸다. 이듬해 그녀가 떠날 때 사람들은 그녀를 산 송장(生送葬·생송장)이라 했다.(1427년 5월 1일, 1428년 10월 4일 ‘세종실록’) 실록에 따르면 ‘한확은 재산이 넉넉하면서도 장차 공녀로 뽑히기 위해 혼기가 지난 누이를 시집보내지 않았다’며 사람들이 누이를 슬피 여겼다.(1435년 7월 20일 ‘세종실록’)
먼저 공녀로 갔던 여비 한씨는 영락제가 죽으면서 다른 후궁들과 함께 자살을 강요당하고 순장(殉葬)됐다. 그 여동생 한씨는 선덕제 후궁이 되었다. 그런데 그녀는 ‘황제를 권하여 자주 조선에 사신을 보내 친족을 입조(入朝·명 황실로 찾아오게 함)케 하니 이후 한씨 일족은 앉아서 부귀를 취하고 해를 나라에 끼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1479년 7월 4일 ‘성종실록’)
세종의 선택 – 금은보화와 처녀
1409년 10월 자기 딸을 공녀로 보냈던 임천년이라는 자가 밀무역 혐의로 탄핵당했다. 태종은 “탄핵하지 말라”고 명했다.(1409년 10월 10일 ‘태종실록’) 1425년 9월 두 누이를 공녀로 보낸 한확이 간통 혐의로 탄핵당했다. 세종은 이를 불허했다. 이유는 “이 사람은 내가 죄 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1425년 9월 28일 ‘세종실록’) 한확은 훗날 자기 딸을 왕실로 시집보내 왕실 외척이 됐다. 성종의 어머니인 이 딸이 인수대비다.
명이 됐든 청이 됐든 대중(對中) 사대 외교에 또 다른 큰 이슈가 있었으니 바로 금과 은 조공이었다. 금을 캐는 데 민폐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1429년 8월, 세종이 명 황제 선덕제에게 친서를 보냈다. 이러했다. “우리나라는 땅이 좁고 척박해 금 은이 생산되지 않나이다. 금은 조공이 면제되면 황제의 덕(德) 가운데 춤출 뿐이겠습니까.”(1429년 8월 18일 ‘세종실록’) 백성 눈물 속에 공녀 20명을 떠나보내고 한 달이 지난, 한가위 사흘 뒤였다. 그해 12월 황제가 금은 조공 면제를 허가했다.(같은 해 12월 13일 ‘세종실록’) 세종이 보낸 친서에도, 명 황제가 보낸 칙서에도 공녀 면제 관련 사항은 없었다.
이미 1427년 공녀 문제에 대해 세종이 명쾌하게 이렇게 결론을 내려놓았다. “그 원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으나 간쟁 대상이 될 수 없다. 명이 떨어지면 좇아야 하느니라(唯令是從而已·유령시종이이).”(1427년 7월 21일 ‘세종실록’) 어디에서 무엇부터 잘못됐는지 모르겠으나, 어찌 됐건 공녀는 여자가 아니라, 공물(貢物)인 나라였다.
<참고문헌>
1. 박종인, " 중국에 바친 여자, 공녀(貢女)", 조선일보, 2021.12.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