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라의 병은 무엇인가?
책문(策問)은 조선시대 과거 시험의 마지막 관문이다. 생원 진사시에 문과의 초시 복시를 거쳐 뽑힌 상위 33명이 왕 앞에서 최종 전시(殿試)를 치르는데 이때 시험이 곧 책문이다. 출제자는 바로 왕. 자신의 정치 정책에 대한 응시자의 의견과 대책(對策)을 물었다. 시대정신과 철학, 그리고 문제 해결책을 들어 국가정책 수립 아이디어로 삼고 최고급 인재를 등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다’ 김태완 2004 소나무)
1611년, 즉위 3년 차 광해군은 이런 책문을 냈다. "나는 지혜도 모자라고 현명하지 않다. 인재를 불러들여 나랏일을 해결해야 하는데 선비들은 의견이 달라 서로의 차이를 조정할 길이 없고 서로 마음을 다해 공경하고 화합을 이루려는 미덕도 찾아볼 수 없다. … 지금 당장 시급히 힘써야 할 중요한 시무(時務)는 무엇이 있겠는가?" 왕은 여기에 세제 개혁이나 토지 정비, 호적정리 등 민생정책도 내놓기 바쁘게 당쟁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다며 "과거에 상황에 맞는 조치를 제때 취하지 못해 줄줄이 난리가 일어나 망했던 까닭이 무엇이었는지"도 밝혀내면 직접 살펴보겠노라고 했다. 지금 읽어보면 광해군의 질문은 상당히 구체적이며 절절하기까지 하다.
’임금의 잘못이 국가의 병’
그러나 이 물음에 선비 임숙영의 대답은 칼 같았다. 다른 것에 앞서 임금 자신의 실책과 조정의 병폐를 책문에서 우선 논의 대상으로 삼아야 옳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왕비·후궁의 권력 개입을 용납 묵인하고 ▶왕의 잘못을 비판하는 간쟁(諫諍)을 막으며 ▶유능한 사람에게만 관직을 주는 도리가 사라져 "진심으로 바른말을 하는 선비들이 지금 전하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라고 했다. 또 당시 세태를 겨냥해 "임금의 허물을 바로 잡으려다 되레 임금에게 벌을 받고, 이 때문에 위로 조정부터 아래로 초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말하는 것을 조심하게 되었다"라고 개탄했다. 그런 결과 "아버지는 자식이 바른말을 할까, 형은 아우가 곧은 말을 할까 경계하며 시대적 금기가 된 직간을 피하려 한다"라며 "잘 보이고 아부하는 풍조, 부드럽게 꾸미는 게 절개와 지조가 되고 말았는데 이는 다 전하가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들이댔다.
참으로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대담한 질책이다. 왕이 직접 보고 읽을 줄 알면서도 이렇게 쓰는 선비의 강단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러나 그는 그 정도에서도 그치지 않는다. "신하의 직책 중 군주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기 위해 충고하는 언책(言責)보다 더 어려운 건 없다"더니 작심한 듯 "임금의 잘못이 곧 국가의 병"이라고 직격탄을 날린다. 말을 꺼내면 죄를 불러들이고, 그 말이 흐르면 화를 부르는 걸 알지만 나랏일이 날로 잘못되고 국정이 더욱 어지럽게 되는 것을 차마 보고 있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반쪽 광복절, 검은 선동 세력
지난주 우리는 나라의 최대 경축일인 광복절 기념식이 반쪽으로 쪼개져 열린 걸 보았다. 정부 따로 광복회 따로 기념식은 친일 인식 논란에 휩싸인 새 독립기념관장 임명 때문이다. 광복회가 공개 반대했으나 대통령은 임명을 강행했다. 새 관장은 "일제강점기 우리 국민의 국적은 일본" "진정한 광복은 1945년 아닌 48년" "친일 인명사전에 오른 안익태, 백선엽 억울" 등 발언으로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세 차례 윤석열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 그의 임명 부당성을 전했지만 묵살됐다고 했다. 근 열흘 나라 전체가 임명 적부를 놓고 다투다 끝내 반쪽 경축식 파국을 맞았다.
정부 경축식에서 윤 대통령은 광복회 등 독립운동단체가 불참한 이유를 밝히지도 묻지도 않았다. 단 가짜뉴스에 기반한 허위 선동과 사이비 논리, 사이비 지식인들이 거짓 선동으로 자유 사회의 가치와 질서를 부수려 한다고 경고했다. 또 국민이 진실의 힘으로 무장하여 검은 선동 세력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론 대통령은 ‘검은 선동 세력’ ‘사이비 지식인’이 누구며 어떻게 행동하는지 명시하지는 않았다. 다만 가짜뉴스 유통 선동 날조 등에 방점을 찍은 것으로 미루어 대통령의 정치와 이념 정책에 반대하는 말을 하거나 퍼트리는 사람 단체를 모두 뭉뚱그렸고 광복회와 이 회장도 그중 하나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임숙영의 논리에 입각하면 이는 매우 두려운 일이다. 그는 "임금에 관련된 것이거나 임금이 싫어하는 것을 말하지 않으려는 풍조를 좇아 진실하고 간절한 마음을 숨긴다면" 장차 나라가 망하는 아픔을 겪는다고 경고했다. 이는 400년 전 한낱 젊은 지식인이 그냥 겁 없이 왕에게 들이민 주장이 아니다. 고전 역사 철학서에서 두루 취한 사실과 예시 경구의 총체였다. 언로(言路)가 통하면 나라가 편하고 언로가 막히면 나라가 망한다는 명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진리이다. 문제는 윤석열 정부 들어 언로를 틀어막는 듯한 현상이 여러 군데서 목도되고 그 빈도수도 점점 더 잦아진다는 데 있다.
‘입틀막’ ‘또틀막’ ‘삼틀막’
반쪽 경축식 이후에 정부 여당은 거의 한 목소리로 광복회 이 회장을 인격적으로 모욕하며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늙어서까지 자리와 이득을 탐해 가족을 욕보인다는 식의 패륜적 비아냥도 서슴지 않는다. 사실 그보다 더하다.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를 비판하는 목소리에는 어떤 형식으로든 불이익을 주고 있다. 사정기관을 동원해 더 이상 소리를 못 내게 명예훼손죄 수사와 압수 수색을 벌이는 등 옛 공안 사정 정권의 악습을 답습한다는 항변이 적지 않다. 대통령의 정책에 반대하는 언설을 조금이라도 할라치면 ‘입틀막 경호 대상’(입을 틀어 막혀 끌려 나간다는 뜻의 줄임말)이라는 자조가 나오더니 최근엔 ‘또틀막’ ‘삼틀막’이라는 풍자까지 유행이다.
하긴 법무부 장관을 지낸 여당 대표가 김건희 여사에 대한 ‘국민 눈높이’ 처리를 말했다고 용산으로부터 사퇴 압력을 받기도 했으니 보통 사람 입틀막은 별 뉴스가 되지도 않는다. 김 여사의 명품백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고뇌하던 정부 국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그 진상 규명을 말하면 정치 쟁점화를 하지 말라고 다그친다. 이 정부 들어 대형 사건 사고로 숨진 이들의 죽음 규명 요구는 거의 다 "죽음까지 정쟁화하는 저열한 정치 작태"로 낙인찍혀 발붙일 자리를 잃어가는 중이다. 그래서 조용히 묻고 싶다. 지금 이 나라의 병(病)은 무엇인가?
<참고문헌>
1. 민병욱, "지금 나라의 병은 무엇인가", 충청투데이, 2024.8.20일자. 1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