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 1872-1937)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正毅, 1852-1919)가 우리 주권을 일본에 송두리째 넘겨주는 한일합병 문서에 조인했고, 8월 29일에는 이를 공포함으로써 27대 519년 만에 조선왕조는 멸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래도 충신인 학부대신 강암(剛庵) 이용직(李容稙, 1852-1932)은 "이 같은 망국 안에는 목이 달아나도 찬성할 수 없다"라고 반대하면서 뛰쳐나갔다. 그리고 병합조약 직후 역사학자이자 시인인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 참정대신(현재의 부총리)인 한규설(韓圭卨 1848-1930), 의정부 참찬을 역임한 이상설(李相卨, 1871-1917) 등 일부 지식인과 관료층은 이를 일방적 압력에 의해 이루어진 늑약으로 보고 극렬하게 반대의사를 표현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 후 35년 동안 우리 한민족은 일제의 억압적인 식민통치 아래 온갖 핍박을 당하다가 1945년 8월 15일 해방되어 영예롭게 우리 주권을 다시 찾았다.
8.15 광복은 미국 · 영국 · 러시아 등 50여 개 연합국(聯合國, allied powers)이 세계 제2차 대전에서 승리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무려 14만 명의 항일독립투사들이 국내외에서 끈질기게 전개한 항일독립운동의 결실이기도 하다.
8.15 광복절은 온 백성이 일시에 거리로 쏟아져 나와 태극기를 하늘 높이 힘껏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을 만큼 우리 한민족 모두에게 대단히 기쁜 날이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태평양전쟁까지 60여 년간의 기나긴 전쟁이 끝난 날이며, 동아시아 광복의 날이었다.
그런데 해방 직후인 8월 16일 '좌파 중심으로 어서 빨리 건국 준비를 하자'는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1886-1947)과 '임시정부가 귀국할 때까지 경거망동해선 안 된다'는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 1887-1945)의 의견 대립으로 첫 좌우합작 시도가 실패하는 바람에 한반도는 좌우갈등이라는 거대한 불씨를 품은 채 38선을 경계로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이 분할 점령하고 군정을 시행하게 되어 조선민중들은 해방의 기쁨을 단 하루만 잠시 누리다가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 후 광복 79년이 흐른 지금 우리 조국 대한민국은 해방 직후의 좌우 대립과 갈등으로 분단된 최빈국에서 한국전쟁과 IMF 금융 위기를 슬기롭게 잘 극복하고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고도 경제성장으로 경제대국이 되어 이제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선진국이 되었다.
한강의 기적으로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룬 덕에 주거, 교통, 환경을 비롯한 생활기반은 물론 교육과 문화생활 수준이 해방 전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됐다. 실제로 대한민국은 세계 6대 제조 강국, 세계 6대 수출 강국의 당당한 경제력을 갖추게 되었다. 국민소득 3만 불 시대를 열었고, 김구 선생이 소원했던 문화국가의 꿈도 이뤄가고 있다.
한편 대한민국 국민들이 4·19혁명, 광주 민주화 운동, 6·10민주항쟁, 촛불혁명 등을 통해 독재 정권을 몰아내고 민주 정권을 창출하여 민주화에 성공함으로써 세계 제2차 대전 후 독립한 140여 개 신생 독립국가 중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모든 국민이 자유·평등·인권을 존중하는 민주사회에서 골고루 함께 잘사는 선진민주복지국가, 어떤 강대국도 넘볼 수 없는 자주 국방의 나라, 사회 정의가 확립된 법치국가, 남한과 북한이 하나가 되는 통일 국가, 세계 여러 나라를 선도하면서 세계 평화와 인류 공영에 이바지하는 명실상부한 선진 국가는 이루지 못했다.
윤석열 정권은 우선 먼저 한반도 주변 4강국인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과의 등거리 외교를 강화하고 남북한 당국 간의 회담을 재개하고 다각적인 교류와 협력을 강화하여 남북한의 평화적 통일과 동북아의 평화를 기해야 한다.
그리고 친일잔재를 청산하고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악행을 고발하여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하며, 한일 간의 국교 정상회로 위안부 문제·역사교과서 왜곡 문제·강제노동 배상 문제·독도 영유권 문제·무역 역조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해야 한다.
특히 국립묘지법을 개정하여 지금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친일반민족행위자 69구의 시신을 다른 곳으로 이장하도록 하고, 전국에 분포해 있는 일본인 귀속재산을 완전히 환수하여 국유화해야 한다.
또한 기초과학 육성과 기술혁신으로 세계 1등 상품 7개(스마트폰, D램, 대형 LCD 패널, 올 레드 패널, 박형 TV, 조선)를 중국 12개 이상으로 늘려 많이 생산하고 수출 시장을 다변화하여 국부를 창출해야 한다.
그런가 하면 사분오열된 사회 통합을 기하기 위해 광복 79년의 역사를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사관(史觀)을 정립하고, 국가보훈처가 아직도 국가로부터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는 항일독립운동가들을 새로 발굴하는 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광복 79주년을 맞이하여 윤석열 정부는 서울에서 광복절 기념식과 '광복절 전야 음악회' 등 다양한 축하공연을 개최할 예정이고, 항일독립운동의 성지인 천안 독립기념관에서는 경축 문화행사로 '그날이 오면'을 연다고 지난 8월 1일 밝혔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이 평소에 국정에서 '국익·실용·공정·상식·자유'를 강조하면서도 올 초부터 광복회와 야댱과 시민단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사편찬위원장 · 한국학중앙연구원장 ·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 독립기념관 관장에 대한민국임시정부 법통과 항일 독립운동 역사를 부정하고, 반쪽 정부 수립, 이승만 독재를 미화하며 1948년 건국론을 적극 주장해 온 뉴라이트 계열로 분류된 인사들을 대거 임명하는 바람에, 역사 앞에서 국민 배신한 대통령으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항일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로 구성된 광복회 이종찬 회장이 분노하여 윤석열 대통령이 독립기념관 김형석 관장 임명을 철회하지 않으면 광복절 경축 행사에 불참하겠다고 선언하여 심각하게 국정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그래서 대한민국 국민들은 모두가 광복 79주년을 맞이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사회정의(social justice)와 올바른 역사관을 확립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고, 각 가정에 대한민국의 상징인 태극기를 달며, 순국선열과 호국영령 · 애국지사들에게 머리 숙여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명복을 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1. 신상구, "광복 79주년의 역사적 의미와 당면 과제", 충북일보, 2024.8.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