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홍범도 장군’드디어 고국의 품에 글쓴이 신상구 날짜 2021.05.14 03:55

                       ‘홍범도 장군’드디어 고국의 품에

                                             글쓴이 :      고두막한     날짜 : 2020-06-08 (월) 18:48 조회 : 879 

             

                         산리대첩·봉오동전투 100주년 되는 뜻깊은 해
                        1943년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75세로 서거’

                       민족혼 역사의식 일깨운‘환단고기’사비들여 편찬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조만간 영구귀국
                            ●‘이념대립’유해봉환 의미 퇴색될까 우려

   올해는 대일항쟁기 광복을 위한 독립투쟁사에 길이 남을 청산리·봉오동전투 승전 1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또한 이 전투의 영웅이라 일컬어지는 홍범도장군의 유해가 머나먼 카자흐스탄에서 조국 대한민국으로 돌아온다 하니 더욱 의미가 있는 해가 될 것이다. 몇 년 전 (사)겨레 얼 찾기 국민운동본부의 일원으로 카자흐스탄을 방문하였는데 비 내리는 가운데 홍범도 장군의 묘역을 찾아가 참배했을 때의 가슴먹먹함이 다시 느껴진다.

   동북공정, 독도, 임나일본부 등 주변국들의 한국사 역사침탈이 강해지고 있는 이 때 대한민국은 좌우이념의 대립각이 서슬 퍼른 칼날로 서로를 겨누고 있는 국론분열의 최고조를 향해 가고 있다. 그 속에서 홍범도 장군유해 봉환의 의미도 이념의 대립각 속에 퇴색될까 삼가 우려가 된다.

   독립투쟁사의 영웅이었지만 하지만 너무나 초라했던 말년의 모습은 아직까지도 대일항쟁기 독립투쟁사와 그 속에 온 생을 희생했던 많은 분들의 삶이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고 평가받지 못한 그 실정의 씁쓸함과 흡사하다. 역사의 곡직이 바로잡혀 역사의 정의가 바로서길 희망하며 홍범도 장군의 삶을 공유해 보고자 한다.

   일본이 조선의 식민지화를 낙관하며 원활한 통치를 위해 조선의 역사부터 그들의 손으로 써내려 갈 시점, 큰 난관에 봉착한다. 바로 조선국민들이 광복을 위해 떨쳐 일어난 1919년 비폭력 3·1만세 운동이 하나였으며 1920년 무쟁투쟁을 통해 제국주의 군사강국인 일본의 예봉을 꺾어 버린 1920년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이 그것이었다. 이 역사적 사건을 통해 조선국민들은 광복을 위한 강력한 투쟁의 역사를 펼쳐가게 되었다.

   이에 반해 일본제국주의는 안으로는 조선민의 역사 혼을 빼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직접 총괄 지휘하며 식민사관이 내재된 그들이 만들어 낸 조선사(朝鮮史)를 조선사 편찬이전에 조선사학회나 청구학회를 통해 더욱 가속화하며 전파해 나가며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조선사’ 편찬 작업에 매진한다.

   이를 위해 언론과 출판을 더욱 통제해 나갔다. 당시 조선인의 머리와 가슴 속에 살아있던 “배달”과 “단군조선”에 대한 역사의식을 지우고 “고대 지나의 식민지, 일본의 식민지(임나일본부)로부터 시작하는 나라가 조선“이라는 역사를 심어주는 것이 목표였다.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조선인에 대한 강력한 탄압과 무자비한 살상을 진행하며 무력으로 조선을 통제하려 하였다.

   신(神)의 군대로 자신한 일본 정규군에게 큰 충격을 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대첩 승전의 영웅 홍범도 장군에 대해 잠시나마 그의 삶을 살펴보자. 또 다른 영웅 김좌진 장군과 백포(白圃) 서일(徐一) 총재는 다음 기회를 통해 삶을 살펴볼까 한다.

                                                                          ▲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 위치한 홍범도장군 묘역


                                      ● 역사사상가로서도‘비범한 업적’

   홍범도 선생(1868.8.27~1943.10.25)은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이다. 그는 가난한 농부 홍윤식(洪允植)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남양(南陽), 호는 여천(汝千)이다.

   그동안 홍범도 장군에 대한 이미지는 대한민국 어린이들부터 “사냥꾼 독립운동가”, “ 총 잘 쏘는 운동가”로서 인식되어 있다. 일부분 맞는 이야기지만 일부는 역사왜곡인 것이다. 고주몽이 활을 잘 쏘아 고구려를 건국한 것처럼 인식시킨 결과이다.

   존재란 물질(육체)과 정신의 종합체다. 한 인물을 평가함에 그의 정신사를 평가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역사도 같은 것이다. 역사도 틀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그 틀을 만든 정신을 강조하고 후손들이 인식하게 해야 그것이 역사교육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혼 빠진 인물 중에 영웅은 없었다.

   그는 짐승들을 사냥하던 포수 출신이었으나 조국의 망국을 보면서 독립투사로 다시 태어난다. 여천 홍범도장군 기념사업회 연혁에 따르면, 홍범도 장군에 대한 주목할 만한 아래와 같은 사실이 있다. 정확한 역사적 사실 전달을 위해 기념사업회의 연혁자료와 코리안 스프릿의 자료를 인용한다.

   그이 인생은 14세(1882) 나이로 세상 현실과 대면하게 된다. 어린 14세 대한제국군 평양진위대에 근무하다가 이탈하여 현실 생업으로 돌아와 다시 제지공으로 취업하다가 친일지주를 처단하고 묘향산 보현사, 금강산 신계사 등지로 피신하였는데 그 때 이순신장군의 직손 지담 대사를 상좌승으로 하여 민족혼과 단군역사”를 배웠다고 한다. 그의 인생에서 처음 역사 혼이 뇌리에 꽂힌 시기였던 것 같다.

   1909년에는 직접 일본군과 무장항일전쟁을 치렀는데 이 문제로 1년 뒤 부인인 이옥구 여사는 일제 고문으로 잃고, 아들은 정평 바베기전투에서 전사한다. 1909년 이상설 선생과 함께 대종교 노령북도 총본사 지도사로 취임하여 역사정신 지도자로서 길을 간다.

   1911년에는 대종교 교우 임시정부 참획군정(參畫軍政) 계연수 장군이 편저하고 해학(海鶴) 이기(李沂) 선생이 교열한 ‘환단고기’를 광복군 총영장 오동진 장군(1889-1930)과 사재를 틀어 편찬했다.

   1911년 노령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항일단체 권업회를 조직하고 부회장에 취임한다. 이어 1916년 만주 장백현에서 대종교 단애 윤세복 선생과 만주 전 항일무장단체를 연합하여 최초 만주 독립군의 모체인 포수단 창설한다. 1918년에는 3·1운동선언문에 앞서 “무오독립선언서”를 채택하여 김좌진, 박은식, 이동녕, 신채호, 윤세복, 이시영 선생 등과 오로지 무장투쟁으로 조선독립을 천명하였다.

   1919년 독립운동가 28인 리상룡, 계연수, 홍범도, 신채호, 리탁, 최시홍, 오동진, 리관집, 리덕수, 김효운, 편강렬, 량승우, 최석준, 허경호, 박룡담, 리봉우, 리태즙, 주상옥, 라창헌, 박웅백, 최지풍, 리용담, 김병수, 서청산, 백형규, 김황석, 리동규 등이 함께하여 ‘조선인 십보장’을 발표하였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 우리는 조선인이다. 세계 인류와 함께 평등하며 신앙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가질 수 있는 기본 권리를 버릴 수 없다.
   ▼ 우리는 환웅천왕님이 처음 태백산에 천강하옵신 목적과 사명을 오늘도 우리에게 부과되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다
   ▼ 우리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가져야 하므로 어떠한 폭력에 대하여 우리의 원칙과 주장이 좌절될 수 없다.
   ▼ 우리는 조국의 주권과 국토의 회복을 방해하는 자들의 일체의 행동을 방관할 수 없다.
   ▼ 우리는 일본의 무력침략과 또 그 외에 방조하는 구미 열강들의 외교사상을 규탄하지 않을 수 없다.
   ▼ 우리는 모든 파당과 차별을 초월하여 오직 항일투쟁의 통일강화에 전력하지 않을 수 없다.
   ▼ 우리는 국권회복의 목표를 세우고 오직 현실의 지평선에서 모든 물질과학의 전 분야를 하나에의 길로 이끌어서 먼저 민족의식의 귀일을 사회적 조직으로 나타내지 않을 수 없다.
   ▼ 우리는 적의 어떠한 굴욕과 속박이 있을지라도 언제나 정확한 판단을 찾고 저항하지 않을 수 없다.
   ▼ 우리는 끝까지 국토를 지키면서 조선인이 먼저 외국의 침략세력에 대한 치욕의 역사와 오늘의 비참한 생활을 잠시라도 잊을 수 없다.
   ▼ 우리는 매일 아침 마음속으로 성지 백두산을 향하여 염표문을 외우고 가족과 함께 전곡사백이 저축으로 항일운동을 돕지 않을 수 없다. - 신시개천 5860년 3월 16일 (서기 1919년) -

   이를 볼진대 홍범도 장군에 대한 평가는 단순한 독립투쟁가로서 면만 주목하여 이루어질 것이 아니라 역사사상가로서의 작업도 앞으로 필요할 것 같다. 아직도 역사문제에 있어 국뽕, 환빠, 유사사학을 부르짖는 대한인의 후손들이 망발을 하는 세태를 보면 “非倭似倭 甚於倭 以鮮打鮮 死者鮮”(왜놈도 아닌 것이 왜놈 같으면서 왜놈보다 심하구나. 조선 놈으로 조선 놈을 치니 죽는 놈은 조선 놈이로구나) 소파 이병화선생의 옥중시가 생각이 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전투 기록화 (photo source 독립기념관)


                                 ● 역사의식 부재‘청산리 전투’로 격하

   1920년 드디어 최진동의 도독부, 안무의 국민회군과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하고 북로 제1군사령부 부장을 맡았다. 6월 7일 대한북로독군부 사령부장으로 700여 명의 독립군을 지휘하여 봉오동에서 일본군 월강부대를 섬멸했다. 이를 계기로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인 탄압은 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더욱 가혹해져 800만이 희생당할 정도로 무차별적으로 계속된다.

   봉오동 전투는 일본군에게 충격적 패배를 심어 준 사건이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무부는 봉오동 승첩에서 일본군은 157명이 전사한 반면 아군은 불과 4명만 전사했다고 발표했으며 상해임시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일본군 측 피해는 전사자 157, 중상 200, 경상 100명이며 독립군 측 피해는 전사자 4, 중상 2명에 불과했다고 발표하였다.

   일본군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된 북로독군부군은 10월 청산리로 옮겨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연합하여 대한민국 국민들의 뇌리 속에 심어준 역사적 “대첩”의 쾌거를 만들어낸다. 청산리 대첩은 1920년 10월 21일에서 10월 26일까지 일본군과 계속되었다.

   10여 회의 전투를 벌인 끝에 적의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 명을 사살하였고, 독립군측은 전사자 100여 명을 내었다. 크나 큰 승리였다. 최근에는 역사의식의 부재로 한국인 중에 청산리대첩을 일본의 기록과 비교분석 한답시고 “청산리 전투”로 격하시키는 자까지 출현하니 개탄할 지경이다.

   11월에는 만주 밀산으로 이동하여 대종교 지도자 백포 서일 장군과 만주 전 독립군 연합체이며 광복군의 전신인 대한독립군단을 창설, 부총재에 취임했다.

   1921년 6월 러시아 자유시에서 일·러군의 공작에 의한 대한독립군의 상호 분열로 동족상쟁이 발생하여 자유시참변이 일어났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참극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이 여파로 아직까지 이 사건과 결부된 독립투쟁가에 대한 평가가 서로 극단적인 것이다.

   1937년 스탈린 강제 이주정책으로 69세의 나이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하여 크질오르다 극장의 수위로 근무했으며 1943년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 75세로 서거하였다. 이에 국가는 1962년 홍범도 장군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이상이 홍범도 장군의 생의 주요 일대기이다.

        ▲ 1920년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전투 전적비와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를 홍범도 장군의 모습과 함께 담은 2018년 발행기념 우표


                               ● 독립운동가‘계연수 선생’ 가공인물 치부

   서두에서 올해가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 승전 100주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더 추가한다면 같이 동지로서 독립투쟁에 몸 담았던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 선생이 서거하신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1920년 8월 15일 남만주 관구현(寬句縣) 홍석납자(紅石拉子)에서 일본제국 순사감독 감연극(甘演極, 一云 甘永極)이 보낸 조선독립군으로 위장한 밀정의 덫에 걸려 목과 팔,다리가 다섯 토막으로 잘려 무참히 살해되어 압록강에 버려졌다.

    최근 국뽕, 환빠, 유사사학이라고 주장하는 무리들이 한창 ‘계연수는 가공의 인물’, ‘환단고기는 가짜’라고 주장할 때 계연수 선생에 대한 독립투쟁사 기록이 나오고, 선생을 살해한 일본 순사 감연극의 실체가 1920년 미주신문 신한민보에 공개되어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얼마 전 계연수 선생의 친필 원고까지 등장하여 역사의 정의가 살아 있음이 드러났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좌우이념의 극한대립 속에 중국과 일본의 미래를 위한 역사침탈을 넋 놓고 좌시하며 우선 순위에서 역사광복 역사정립을 뒤로 돌리고 자국 문화와 역사에 대한 자긍심과 긍지를 ‘국뽕’이라 주장하는 국민들이 존재하는 나라가 되었다.

    자신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은 ‘자뽕’인가? 스스로 자국의 역사와 문화에 자부심과 긍지가 없는 나라가 좋은 나라인지 자문해 볼 시기이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의 대한민국의 존립근거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뜨겁게 생을 바쳤던 수많은 독립투쟁가들의 희생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는 보은해야 한다. 지금도 독립투쟁에 모든 걸 다 바친 이름도 남기지 않은 그 분들의 기록과 후손들을 찾아 보은해야 한다.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조국의 품안에 모시는 애국애족의 자세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대한민국의 품격이자, 한국인들이 가져야 할 인격인 것이다.

                                                 ◆ 참고문헌
   1. 코리안스피릿, 여천 홍범도장군 기념사업회 기사
   2. 사단법인 여천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자료
   3. 韓國 上古史 史料 檢證에 대하여(朴成壽)
   4. 한국독립운동사(애국동지원호회, 1956)
   5.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1967)
   6.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7. 독립군항쟁사(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5)
   8. 청산리독립전투(이강훈, 『군사』 5,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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